미술사 방법론 (헤겔에서 포스트식민주의까지 미술사의 다양한 시각들) - 마이클 해트^샬럿 클롱크
미술사 방법론
푸코- 마그리트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 ‘언어와 회화는 무한한 관계’이것은>
목적: 그릴 수 없거나 읽을 수 없는 것, 재현 자체의 틈새, 그리고 담론의 띠와 켜와 단층, 즉 텍스트와 이미지 사이의 공백을 보여주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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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의 본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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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
시각 예술 = 미메시스(모방)와 테크네(기술), 모방의 모방(illusion)
본질로부터 멀어지는 것. 위험하다고 인식(부정적)
- 아리스토텔레스
경험주의, 미메시스와 테크네의 조합이라는 데에는 동의하였지만 미술을 복제로 한정하지 않음
사물을 알기 위해서는 재료, 형태, 만든 목적을 알아야 한다.
미술= 지식을 얻을 수 있는 길, 모방된 것에서 기쁨을 느낌
- 형식주의
내용<형식
로저프라이(20c) [플라톤, 칸트: 자연과도 예술과도 다른 본질적이고 이상적인 미의 존재에 대한 믿음]
미술은 작품을 만든 작가 또는 그것이 속한 문화와 거의 관련이 없고 있어도 별로 중요한 관계는 아니다.
탈역사적, 미술작품이 일으키는 감성적인 효과에 초점
칸트의 체계에서는 기능, 기원, 맥락 등을 고려하는 것은 한 대상의 미적 특성을 경험하고 판단하는 데 방해가 되는 것
프라이는 시각예술이 플라톤적 추방에도 불구하고 기본적인 인간의 표현이기 때문에 존속되어 왔다는 것을 지적하면서도, 시각예술은 단지 모방에 불과하다는 플라톤의 견해를 이용한다.
인간의 능력: 실제의 삶, 상상적인 삶
프라이는 상상적 삶에는 행동이 제외되기 때문에 서로 다른 가치들이 존재하고 각기 다르게 인식하게 된다. 그러므로 미술은 상상력이 표현되어 생긴 것이지 플라톤이 생각했듯이 단순한 모방이 아니다. P.34
프라이는 미술이 생물학에서 분화되어 나온 것이라고 한다. 눈의 생물학적 기능이 눈에 들어오는 것을 보는(to see) 것이라면 그 예술적, 미적 기능은 주시하는 것(to look)이다. 하나의 사물을 ‘주시할’ 때 우리는 그 형태의 관계를 인식한다. 그리고 미술가의 시각은 ‘창조적 시각’이기 때문에 그 시각은 주제를 대신하는 요소들의 조화로 구체화된다. 프라이는 미술과 삶의 차이를 강조함으로써 작품들을 ‘맥락에서 분리하여’ 시간과 공간의 표현이 아닌 순수한 형태로 보고 분석한다. P.35
형식주의 방법론은 우선 작품 전체에서 각 부분들이 만들어내는 미적 효과에 관심을 갖는다. 이 부분들은 형식요소라고 불리며 미술가가 사용하는 시각언어의 기초가 된다. 그것은 선, 형, 공간, 색, 명암으로서, 미술가들은 이들을 서로 다른 여러 가지 방식으로 배열해 디자인의 범주를 넓혀간다. 한편 디자인은 균형, 질서와 비례, 패턴과 리듬으로 이루어지는데 구성요소들과 함께 관객에게 어떤 반응을 불러일으킨다. 미술가가 하는 마지막 정리를 미술작품의 구성이라고 한다. 이 구성에 대한 형식분석은 어떻게 각 요소가 작품의 전반적인 인상을 결정하는 데 도움이 되는가를 고찰하는 것이다. P.35
회화는 보통 평평한 표면에 그려진 이차원적 이미지로, 아무리 깊이감이 있어 보여도 그것은 환영(illusion)에 불과하다. 회화, 조각, 건축에서 실제 깊이와 일루전적인 깊이가 다르므로 또다른 형식요소들을 고려해야 한다. 그 요소들에는 양감과 입체감이 포함되는데 이들은 조각과 건축의 실제적인 특징과 회화의 일루전적 특징을 이룬다. 부분적으로 미술가가 쓰는 재료 즉 매체의 성질에 의해 결정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어떤 기법으로 창조된 일루전에 따르기도 한다. 평면에 깊이의 일루전을 창조하는 기법인 여러 종류의 원근법 또한 셩식분석의 한 대상임에 틀림없다. ….
물체의 크기 차이에 의한 이러한 깊이의 일루전은 선원근법이라는 기법으로 이루어진다. 다른 종류의 원근법은 서양미술에도 사용되지만 극동의 미술에 더 많이 상용되는 대기원근법이다. 대기원근법에서 거리감은 크기를 줄이기보다는 선명도를 감소시킴으로써 생긴다. P.38
미술작품이 형식 요소의 선택과 구성에 의해 결정되는 한, 작품들의 미적 차이는 양식이라는 범주로 정리되어 왔다. 1950년대에 미국의 미술사학자 마이어 샤피로는 양식을 “개인 또는 집단의 미술작품에 나타나는 지속적인 형태-때로는 지속적 요소, 특질, 표현”이라고 정의했다. 양식사로서의 미술사는 18세기 독일 학자 빙켈만의 저술에 처음 등장했다. 그는 그리스 조각에 매료되어 그리스, 로마 유물에 관심을 갖게 되었는데 마침 남부 이탈리아의 헤르쿨라네움과 폼페이에서 발굴작업이 행해져 이에 따라 고무된 열띤 분위기 속에서 1764년에 <고대미술사>를 출간하게 되었다. 고대미술사>
빙켈만의 입장은 칸트나 프라이와는 달리 미술이란 역사와 밀접한 관계가 있고 미술을 만들어내는 문화가 바뀜에 따라 함께 변화한다는 것이다. 그는 미술에서 가장 위대한 업적은 기원전 5C~4C 사이 그리스에서 이루어졌다고 보았다. 빙켈만과 같은 독일인으로서 18세기 말과 19세기 초에 활동한 철학자 헤겔 역시 양식의 변화를 문화 발전과 결부시켰다. 그는 미술사를 3단계로 나누어, 고대 이집트가 보여주는 상징적 단계, 기원 전 4세기의 그리스 조각으로 구현된 고전적 단계, 그리고 후기 고전적, 초기 기독교적 단계인 낭만적 단계로 구분했다. 헤겔은 미술이란 그것을 제작하는 사람들의 중요한 표현이고, 따라서 미술을 문화 유물, 혹은 문화의 역사적 기록으로 해석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빙켈만처럼 헤겔도 시간의 흐름에 따른 양식의 변화 속에서 규명되고 설명되어야 할 일종의 진보가 미리 예정되어 있음을 발견했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의 스위스인으로서 <미술사의 원리="">를 저술한 하인리히 뵐플린은 그리스 고전 양식과 밀접하다는 이유에서 스스로 ‘고전’이라고 명명한 전성기 르네상스로부터 17세기 바로크 양식으로 변화한 것을 예로 들면서 미술의 발전에 관한 문제를 제기했다. 뵐플린은 다섯 쌍의 양식개념들을 규정하여 르네상스와 바로크 미술의 형식 구조에 각각 적용했다. 그 개념들은 선적인 것과 회화적인것, 평면성과 깊이감, 절대적 명료성과 상대적 명료성, 폐쇄된 형태와 개방된 형태, 다원성과 통일성이다. 미술사의>
뵐플린이 주장한 평면성이란 르네상스 화가들이 연속적인 공간을 화면과 평행하게 배열하는 것을 말한다. ….
모든 인물과 사물은 화면 너머에 있는 것처럼 보이는 상자형 공간 속에 놓여 있다. 이 확인할 수 있는 유한한 공간이 바로 뵐플린이 말한 폐쇄된 형태이다. 이 그림의 소실점은 화면 외부에 있지만 소실점의 존재는 관람자가 공간을 통제할 수 있다는 느낌을 준다. 폐쇄된 형태는 자기 충족적이고 합리적으로 결합되어 있으며 질서정연하고 비교적 대칭형을 이루는 것처럼 보인다.
뵐플린이 규정한 바에 의하면 고전미술의 특징은 그림의 작은 부분들이 보다 큰 형식 구도의 일부이기도 하지만 각각 독립된 요소로서 관람자의 눈길을 끈다는 것이다. 그는 이 현상을 다원성이라고 설명한다. 예를 들어 그리스도의 흉곽은 뚜렷한 뼈의 구조와 근육과 살로 구성되어 있지만 보는 사람은 해부학적인 각 부분들과 그 부분들이 속한 전체를 모두 느끼게 된다.
이 선적인 것, 평면성, 폐쇄된 형태, 다원성은 뵐플린이 분류한 고전미술의 마지막 특징-절대적 명료함-을 만든다. 여기서 뵐플린은 빛과 색채의 본질을 언급하면서 이들이 “그 자체의 생명을 갖고 있다.”고 한다. 르네상스 회화에서 일반적으로 빛은 자연광선과는 상관없이 일정한 한 방향에서 그림의 공간으로 들어온다. <그리스도의 주검="">에서 빛은 실제의 창문에서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오른쪽에서 들어와 견고한 형태를 비추고 있다. 각 형태에서 왼쪽을 향해 점차 어두워지는 명암은 관람자에게 그 형태의 삼차원적인 입체감을 느끼게 한다. 이 일관된 구조는 형태의 윤곽선과 함께 덩어리들을 명료하게 한다. 그리스도가 걸친 천을 예로 들면 우리는 그 천이 몸에 어떻게 놓여 있는지 알고 있고 다가가서 만져볼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을 받게 된다. 그리스도의>
뵐플린의 형식 분류를 렘브란트의 <니콜라스 튤프="" 박사의="" 해부학="" 강의="">에 적용해 보면 그 형식이 17세기 바로크 양식에서 어떻게 표현되었는지 알 수 있다. 회화적인 것이라는 말은 물감 자체, 붓질, 약간 흐릿한 가장자리의 느낌을 말한다. 이와 대조적으로 <그리스도의 주검="">에서는 재료가 형상에 묻혀서 물감의 질감보다는 인물과 옷감의 견고하고 조각적인 성격에 의해 감명을 받게 된다.그리스도의>니콜라스>
평면성과 대조되는 깊이감이란 그려진 공간의 구성을 말하는 것이다. 만테냐의 회화에 보였던 상자 같은 공간은 이제 상자의 마주보는 양 모퉁이가 안으로 밀려들어간 것처럼 무너졌다. 그 결과로 생긴 대각선들은 바로크 공간구성의 특징을 이룬다. 렘브란트의 <해부학 강의="">에서 시체를 받치고 있는 침대는 우측 아래쪽의 전경으로부터 좌측의 공간을 향해 대각선 방향으로 들어간다. 이리하여 관람자는 안쪽으로 들어간 대각선을 따라 화면으로 끌려들어간다.해부학>
폐쇄된 공간과 대조되는 개방된 공간은 열린 마음처럼 포용력이 있다. 개방된 공간은 열린 마음을 가진 사람이 다양한 생각과 관점을 가질 수 있듯이, 인물과 사물이 쉽게 접근하고 연결될 수 있도록 해준다. 마찬가지로 바로크 구성의 비스듬한 면들은 형태를 개방하는 비대칭을 형성한다. 렘브란트의 공간은 어두운 배경에도 불구하고 그림틀 자체가 한정하는 것을 제외하면 거의 제한되어 있지 않다. 그림의 내부에 있는 인물, 사물, 구조 등은 르네상스 그림과 비교할 때 보다 부드럽게 이어진다. 렘브란트의 그림에서 책의 양면이나 튤프 박사의 손과 모자, 앞으로 몸을 기울인 의사들, 그리고 시체 등 개개의 대각선적 요소들은 형식상의 운동감을 더해 준다.
<해부학 강의="">에서는 인물의 성격이나 행동과 조명방식에서 뵐플린이 말하는 다원성보다는 통일성이 나타난다. 의사들은 해부대 주위에 모여 있어 어떤 집단인지 말해 준다. 빛은 한쪽 방향에서 일정하게 그림 속에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얼굴, 칼라, 손 위에, 책 위에 떨어지고 특히 시체를 두루 비추고 있다. <그리스도의 주검="">에서는 빛이 형태를 명확하게 해주는 데 반해 이 그림에서는 무대의 스포트라이트처럼 형태를 집중 조명한다. 그러므로 뵐플린의 고전적 구조 개념에서는 형태가 빛보다 우선했지만 바로크 양식에서는 빛이 주도적인 역할을 함으로써 전체를 통일하는 효과를 낸다.그리스도의>해부학>
렘브란트의 상대적 명료성은 만테냐의 절대적 명료성과 대조된다. <해부학 강의="">에서는 빛이 형태를 명확히 하지 않기 때문에 화면의 어떤 부분은 밝게 조명되고 다른 부분들은 어둠 속에 남게 된다. 인물들의 외곽선, 책의 겉장, 해부대의 윤곽 등은 르네상스 그림에 나타나는 외곽선만큼 분명히 보이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회화적인 붓자국 때문에 윤곽이 뚜렷하지 않으며 몇몇 사람의 위치가 모호해서 그들 상호간의 공간적인 관계가 불분명하게 되어 있다. P.48해부학>
뵐플린은 양식의 형식적 특징과 관람자에 대한 미적 효과를 강조했지만 양식을 역사나 문화나 연결시키고 있고, 따라서 칸트나 프라이의 순수한 형식주의적 접근과는 차이가 있다. 프라이는 미술에는 그 배경과는 별도로 이해해야 할 자체의 역사와 자체의 전개과정이 있다고 한다. 그는 문화의 한 영역에서 혁명이 일어났다고 해서 다른 영역에서도 동시에 혁명이 일어나는 것은 아니라고 함으로써 사회적, 정치적 역사로부터 예술이 독립적이라는 관점을 제시한다. 일례로 그는 로마제국의 미술은 그 전성기에 발생한 기독교 혁명에 크게 영향 받지 않았다는 데 주목한다. 프라이에 의하면 르네상스의 미술 혁명은 휴머니즘의 사회적, 정치적, 철학적 발전과 상응하는 것이었지만 17세기에 르네상스로부터 바로크에로 미술이 변화한 것은 사회적, 혹은 정치적 변화를 반영하는 것이 아니었다. P.52
프라이가 살았던 시대와 역사적으로 근접한 시대의 사람들은 인상주의자들로서, 이들은 19세기 중엽부터 전통적인 미메시스의 관점과 미술의 목적이 자연을 구상적으로 재현하는 것이라는 개념을 거부하기 시작했다. 프라이는 세잔이 화면을 혁신적으로 다루어 관람자의 심미적 감수성에 호소함으로써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었다고 하였다. 그는 세잔이 이룩한 혁신과 역사적 진보와의 상응관계에 대해서는 유보적인 입장을 취했다.
20세기 초, 영국의 클라이브 벨은 또 다른 중요한 형식주의 비평가로서 로저 프라이보다 앞서 활동하고 있었다. 그러나 벨의 견해는 프라이만큼 복합적이지도, 그렇게 영향력이 크지도 않았다. 그 역시 세잔의 회화에서 새롭고 혁명적인 발전상을 알아보았다. 벨은 1911-1912년경에 쓴 글에서 세잔이 근본적으로 “의미 있는 형태”를 얻어내려고 그림을 그렸다는 이유로 그를 완전한 미술가로 규정했다. “그대는 형태를 창조할지어다.”라는 것이 벨이 미술에 대해 내린 첫 번째 계명이었다. 미술작품에 대한 개인의 주관적인 경험에 근거하여 미적 감동을 일깨우는 의미 있는 형태는 벨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었다. 프라이와 마찬가지로 미적 반응은 작품의 주제보다는 미술가가 선, 색채, 공간, 형태, 명암 같은 형식적인 요소들을 어떻게 배열하는가에 달려 있었다.
벨은 미술을 종교에 비유하고 이에 도덕적 가치를 부여했다. 그는 역사적인 맥락을 무시한 채 시간과 장소에서 벗어나 “일상생활에서 활홀경으로” 사람들을 인도하는 미술의 종교적 힘을 믿었다. 벨에 의하면 미술은 시간이나 공간과 별도로 존재하는 데 그치지 않고 나아가 삶을 풍부하게 하는 ‘숨어있는 실재’인 내적 진실을 전달한다고 했다. 왜냐면 벨은 미술이 삶에 전혀 빚을 지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삶이 미술에 많은 것을 빚지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삶에 미치는 미술의 힘을 강조하기 위해 그는 역사에 비추어 미학을 해석하지 말고 미학에 비추어 역사를 해석하라고 권한다.
그러므로 벨에게는 미술의 배경이나 내용보다 미적 형태가 우선이었다. 이는 문화사나 개인사를 보는 그의 관점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어린이는 선천적으로 형태감각을 가지고 태어나므로 누구나 어느 정도 미술을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
벨은 미술사를 지속적인 흐름 속에서 기복을 거듭하는 것으로 보고 형식에 대해 매우 분명한 미적 반응을 보였다. 그는 유럽에서 1450~1850 보다 서기 500~900 사이에 훌륭한 미술작품이 더 많이 만들어졌다고 믿었고 고딕 미술에서 질이 떨어지기 시작했다고 생각했다. 그는 고딕 건축이 미적으로 전율을 불러일으키지 못한다고 하였다. 그는 비잔틴 양식을 미술이 퇴락하기 직전의 절정으로 보고, 조토의 작품의 실물 같은 성격보다 비잔틴의 ‘의미 있는 형태들’을 더 좋아했다.
르네상스를 모방으로서의 미술이라는 ‘새로운 질병’의 시대로 간주했던 벨의 부정적 태도는 형식주의의 관점에서만 나올 수 있는 것이었다. …. P.54
벨의 미적 선호 대상은 그의 형식주의와 일치한다. 그는 르네상스나 19세기 초 미술처럼 가장 자연주의적인 것을 싫어했다. 중세 초와 비잔틴 시대의 정신적인 미술, 샤르댕의 작업윤리에 나타난 ‘도덕적’인 분위기, 그리고 인상주의자들이 매체의 표현적 성격을 강조한 점 등이 그에게는 호소력이 있었다. 세잔이 새로운 류의 ‘의미 있는 형태’라고 소개한 그의 미적 확신은 이후의 서양미술사에서 계속 지지를 받았다. P.55
형식주의적 접근은 인상주의와 후기인상주의의 발전과 동시에 시작되었다. 프라이는 일찍이 영국에서 후기인상주의를 지지했는데, 그 양식(특히 세잔의 예)이 내용보다 형식을 중요시하는 자신의 신념을 구현한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었다. 후기인상주의는 인상주의에서 형태가 용해됨으로써 결핍되었던 구조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20세기에 형식주의 비평이 널리 퍼진 것은 추상미술의 발전과도 병행하는 것이었다.
프라이의 관점을 가장 잘 이어받은 형식주의자로 미국 비평가 클레멘트 그린버그가 있다. 그린버그는 1930년대부터 1960년대에 걸쳐 저술활동을 하면서 모더니즘은 일루전(미메시스에 대한 플라톤적인 사고에서)의 포기와 화면을 무대의 제 4의 벽이라고 보는 개념에 대한 거부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하였다. 그 결과 삼차원적 공간의 느낌을 더 이상 흉내내지 않는 평면적인 그림이 나오게 되었다. 현대 회화에서 시각적 요소들은 원근법(르네상스 회화)이나 후퇴하는 경사면들(바로크 회화)을 이용한 가상의 공간 속으로 관람자를 끌어들이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그 요소들이 존재하는 곳인 화면 위에서 직접 일어난다. 그린버그는 “그림의 공간은 그 ‘내부’를 잃어버리고 모두 ‘외부’가 되었다”고 하였다. 그는 추상미술을 당대의 가장 뛰어난 미술이라고 여기고 추상은 미술가들이 자연의 모방에서 벗어나 미술의 형식과 제작과정으로 방향을 돌렸을 때 발전했다고 했다. 그린버그도 프라이처럼 미술작품은 깊이 있고 의미 있게 경험될 때 비로소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다. 두 비평가 모두 주관적인 경험의 깊이와 의미는 내용이 아니라 형식에 대한 반응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P.56
도상학(ICONOGRAPHY)
미술작품을 도상학으로 연구하는 방법은 주제의 의미를 우선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도상학이라는 용어는 두 개의 그리스 단어, ‘이미지’를 뜻하는 ‘에이콘’과 ‘기록하기’를 뜻하는 ‘그라페’에서 유래했다. 따라서 도상학은 한 미술가가 이미지를 ‘기록하는’ 방법이며 또한 이미지 자체가 ‘기록하는’ 것, 즉 이미지가 전하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작품을 도상학으로 분석할 때에는 늘 타당하지는 않지만 형식적 특징이 무시될 수 있다. 역시 도상학적 연구는 대개 형식보다는 내용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통례이다.
미술작품을 도상학적으로 연구한 중요한 학자들은 바르부르크 연구소와 관련된 일군의 학자들이었다. 바르부르크 연구소는 독일 함부르크에 설립되었다가 제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전 나치의 박해를 피해 럳던으로 이전되었다. 에르빈 파노프스키는 바르부르크를 주도한 인물이자 도상학적 연구방법의 창시자였다. 그는 도상학으로 작품을 읽는 방법을 3단계로 구분했다. 제 1단계는 ‘전도상학적’ 단계, 즉 ‘일차적, 즉 자연 그대로의 주제’의 단계이다. 예를 들어 기독교 미술에서 십자가에 못박힌 남자 인물을 보고 십자가에 못박힌 남자라고 기술하는 것은 전 도상학적 해석이다. 같은 이미지를 관습과 전례의 차원인 제 2단계에서 묘사하면 이 인물은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 즉 ‘십자가에 못박힘’을 의미한다. 이 단계에서는 텍스트가 이미지의 기초가 된다.
제 3단계는 이미지의 내재적 의미에 도달하는 것이다. 이 단계에서는 그 이미지가 만들어진 시간과 장소, 지배적인 문화의 양식이나 특정 미술가의 양식, 그리고 후원자의 요망사항 등을 계산에 넣는다. 이것은 종합적인 해석 단계로서 여러 가지 원천으로부터 수집한 데이터를 종합하는 단계이다. 그것은 문화적 테마, 참조할 수 있는 당대의 문헌들, 과거의 문화로부터 전해내려온 텍스트들, 예술적 선례들, 등등을 포함한다.
도상학과 관련된 연구는 도상해석학, 즉 이미지의 ‘과학(로고스)’이라고 하는데 이는 작품이 속하는 보다 넓은 지평(만약 있다면)에 대한 연구를 의미한다. 도상학과 도상해석학의 차이는 1972년, 역시 바로부르크 학자인 곰브리치가 설명했다. 곰브리치에 의하면 도상해석학은 전체적인 문화의 지평을 재구축하는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단일한 텍스트보다 많은 것을 포괄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것은 예술적인 배경뿐 아니라 문화적인 배경을 포함하는 하나의 컨텍스트속에 들어간다. P.60
19세기 말, 폴 고갱의 회화 <신의 아들="">은 침대에 누워 눈을 감고 있는 갈색 피부의 여인을 보여준다. 그녀는 아랫도리에 파란 천을 두르고 있고 발치에는 고양이가 자고 있다. 침대 너머에는 연보라색 옷을 입은 한 여자가 아이를 안고 있다. 그녀의 오른쪽 바로 옆에는 녹색 날개가 달린 인물이 서 있다. 우측의 배경에는 동물 몇 마리가 있는 헛간이 있다. 수직으로 선 두 개의 목재 형상은 방의 마루에서 천장까지 닿는 것 같다. 하나는 기하학적 무늬로 장식되었고, 다른 하나는 짙은 갈색인데 거기에는 그림의 꼭대기까지 닿는 두 개의 사선이 붙어 있다. 이렇게 보는 것이 전 도상학적 해석이다.신의>
제목이 없다 해도 고갱 그림의 도상이 예수의 성탄과 관계가 있다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헛간의 동물들은 예수가 탄생한 장소를 떠올리게 한다. 고갱이 그린 어머니와 아기는 모두 금빛 후광을 두르고 있다. 앉아 있는 여인 옆의 날개 달린 인물은 분명히 천사이다. 그리고 앉아 있는 여인 뒤의 나무 기둥은 그 모양 때문에 예수의 십자가를 연상시킨다. 이 모든 모티프들은 어느 정도 기독교 텍스트들과 일치한다. 그러나 이 그림의 도상에는 그보다 훨씬 많은 내용이 들어 있다.
고갱은 자신이 생애의 말년을 보낸 남태평양의 섬들과 예수가 태어난 성지를 결합했고 기독교 모티프를 타히티의 신화적 요소들과 융합했다. 고갱은 또 자신의 정부를 성모 마리아와도 결부시켰는데 이것은 12월 24일과 그와의 개인적인 관계를 암시한다. 고갱의 일생에서 중요한 사건들이 연중 그때를 전후해서 일어났다. 1877년 12월 24일에는 그가 가장 아끼는 딸이 태어났다. 그의 친한 벗이자 격렬히 싸우기도 했던 빈센트 반 고흐는 1888년 12월 23일에 귀를 잘랐다. 이 그림에 나오는 고갱의 정부는 1896년 크리스마스로부터 2주가 못 되어 아이를 낳았다. 그러므로 고갱은 이 작품을 정부가 임신할 때쯤 구상했다고 볼 수 있다. P.73
글로 쓰인 텍스트를 그림으로 변안하는 것은 근사치에 불과하기 때문에 텍스트를 기준으로 그림을 해석한다는 것은 결코 완전한 해석이 못 된다. 따라서 방법론의 연구가 더 필요하며, 이를 다음 장들에서 살펴보게 될 것이다. P.84
미술을 사회경제적 맥락에서 다루는 가장 최근의 미술사 방법론 두 가지는 마르크스주의와 페미니즘의 영향을 받아 형성되었다. 이 방법론들은 어느 정도 형식주의에 대한 반동이며, 문화적 맥락의 제양상들을 포함하는 도상학의 확장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이 장에서는 오리엔탈리즘, 콜로니얼리즘, 인종주의 도상학을 간단히 논하고자 한다. 이러한 방법론들은 문화적, 사회적, 경제적 맥락을 강조하기 때문에 마르크스주의와 관련된다. 또한 그 방법론들은 정치적, 경제적 이익집단을 탐구하거나 문화적 맥락과 의미를 파악하지 못하면 알 수 없는 형태들을 차용하기도 하여, 역사적 명령들과 공조하기도 한다. 로저 벤자민에 따르면 “유럽인들이 만든 모든 오리엔탈리즘 미술은 식민주의적 규범을 은밀히 감추고 있거나 최소한 그것을 수단으로 삼는다.”
<마르크스주의> 마르크스주의의 영향을 받은 미술사가들은 미술작품을 주로 사회에 대한 작품의 정치적, 경제적 역할과 관련지어 해석한다. 예를 들어 <근대의 화가들="">에서 러스킨이 생생하게 묘사한 터너의 <노예선>은 노예무역 반대운동에서 영감을 받은 것이다. 마르크스주의는 터너의 그림을 해석할 때 노예제도 뒤에 숨은 정치적, 경제적 요인과 그것이 화가에게 미친 영향을 간과하지 않는다. 마르크스주의에서 영향을 받아온 미술사는 상당 부분 마르크스주의 정치가, 비평가, 철학자들의 견해를 따르고 있다. 일찍이 1857-1859년에 칼 마르크스는 <정치경제학 비판="" 입문="">에서 예술은 그것을 생산한 문화와 연결시켜 해석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과거의 문화 조건은 똑같이 되풀이될 수 없다는 전제 하에 마르크스는 예술생산은 필연적으로 당대의 맥락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고 믿었다. 예를 들면 그리스 미술은 그리스 신화를 전제로 하는 만큼 19세기의 산업화된 사회에서는 나올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견해는 19세기를 풍미했던 ‘예술을 위한 예술’ 미학에 대한 마르크스의 반대 입장을 반영한다. 그는 또한 순수하게 형식만 연구해서는 미술작품을 만들고 판매하는 데 따른 도덕적, 사회적, 경제적 요소들을 밝히지 못한다는 이유로 이에 반대했다. 마르크스는 미술이란 미학자들이 거주하는 상아탑에 갇혀 있는 것이 아니라 보다 큰 사회적 맥락과 경제의 역사적 발전과정에 속해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미술품의 생산, 작품과 노동계급(프롤레탈리아)과의 관계, 지배계층에 의한 미술의 이용에 초점을 맞췄다. 이러한 견해로 볼 때 미술작품은 ‘노동자들’이 만들지만 부르주아 계층이 주문하고 소유하며 그들의 이익을 위해 사용한다고 하였다. 그 결과 미술가는 다른 노동계급처럼 상품이 되어버린 자기의 작품에서 소외되고 만다. 미술가는 어떤 의미에서는 자신의 일부와 멀어졌고 자기가 살던 시대와 지역이라는 전체로부터 격리되었다. 미술에 대한 마르크스의 관점은 정치가, 철학자, 비평가, 미술사가들에게 영향을 끼쳤다. 이들은 각기 그 분야의 지적이고 실제적인 성향에 따라 마르크스의 견해를 해당 학문에 반영했다. 많은 마르크스주의 작가들은 논증적 입장을 취하며, 중세 봉건주의가 끝나면서 프롤레탈리아 계급과 부르주아 계급이 양분되기 시작했다고 하는 마르크스의 견해에 대부분 동조하는 것 같다. 이러한 역사적 발전은 르네상스와 거의 동시에 시작되었다. 1925년, 레온 트로츠키는 고딕 시대의 압제로부터 새로운 소유계층이 대두했을 때 르네상스가 시작되었다고 하였다. 트로츠키에 따르면 이 새 계층은 생산수단과 교육제도와 매체들을 마음대로 조정했다. 트로츠키는 미술의 사회적 배경보다 미술의 요소들을 분석한 칸트와 형식주의자들을 문제삼았다. 형식주의를 반대한 이러한 정치적인 태도는 독일 아방가르드 희곡 작가인 베르톨트 브레히트에 의해 다시 거론되었다. 그는 그림이 사회적 메시지를 전달할 도의적 의무가 있다고 생각했고, 단순한 형태를 예술로 제시하는 비구상 화가들에 대해 불만스러워했다. 그들은 ‘정치와 미술의 통일’과 ‘내용과 형식의 통일’을 주장한 것이다. P.91 오스트리아 철학자 에른스트 피셔는 마르크스주의 이데올로기를 대입하여 경제사적 미술사를 신화적으로 구축하고자 했다. 그는 마르크스 사상을 사람들이 도구를 사용하기 이전 시대부터 20세기까지 인간이 발전해 온 역사에 대입했다. 피셔에게 미술이란 처음에는 모방함으로써, 나중에는 추상화시킴으로써 자연을 변형하는 작업이었다. 피셔에 의하면 어린 아이가 자기 세계를 마음대로 움직이기 위해 단어를 되풀이 말하고 사물에 이름을 붙이는 것과 같이 사람은 도구를 반복해서 만들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자연을 통제한다. 이것이 집단 활동으로 이어지고 사회 조직을 만들게 된다. 그는 “주체-객체의 관계는 노동을 통해서만 생긴다”고 하였다. 그는 노동에 역점을 두고 이것이 문화적, 역사적 진보를 추진하는 힘이라고 보았다. 피셔는 “도구를 처음 만든 사람은 인간이 사용할 수 있도록 돌에 새로운 형태를 부여했으므로 최초의 미술가였다.”라고 함으로써 미술이 확실히 노동과 결합된 것임을 주장했다. 예술의 근원에 대한 피셔의 마르크스주의 ‘신화’는 미국 인상주의 화가 휘슬러가 설명한 ‘최초의 미술가’라는 환상과 대조를 보인다. 휘슬러는 미술이 실용적, 사회적 또는 정치적 목적에 이용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미술은 남에게 교훈을 주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 자체의 완결성에만 전념한다고 보았던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미술이 자연의 부족한 면을 고쳐줄 수 있다고 믿은 것처럼 피셔는 미술의 힘이 인간성을 고취시킨다는 신념을 가졌다. 그는 미술이 조각나고 소외된 세상을 고쳐주고 온전함을 회복해 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 미술에서 위대했던 시대에는 미술이 바로 이런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발터 벤야민은 1936년 기계복제 시대의 예술에 관해 쓴 글에서 테크놀로지가 미술의 가치에 미치는 효과에 대해 문제를 제기했다. 휘슬러의 ‘예술을 위한 예술’ 미학에서는 창의성을 지닌 특정한 예술가의 작품이라야 그 작품의 가치를 높이 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벤야민은 19세기의 기술 발전이 가치 기준으로서 진짜의 권위-즉 어떤 작품이 어느 작가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것-를 제거했다고 생각했다. 그의 견해로는, 예술의 고유한(original), 문화적 의미는 바로 구석기 시대의 동굴벽화처럼 이제 정치적 목적 뒤로 물러난 것이다. 벤야민은 그려진 형상의 마력을 믿지 않게 되면서 이미지의 정치적 가치가 커졌다고 주장했다. 미술품의 복제(기계에 의한)와 전시(개선되고 더욱 편리해진 교통과 통신을 통한)가 더 쉬워짐에 따라 미술은 제례적 아우라(aura)를 잃어버리고 정치적 상품이 되었다. 마르크스주의 문학, 영화 비평가 움베르트 바르바로는 휘슬러의 형식주의에서 크게 벗어난 관점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미술의 ‘탄생’은 휘슬러가 말한 시각적 자유연상에 의해서가 아니라 경제적 필요성에 의해 생긴다고 하였다. 바르바로는 개인 미술가의 재능보다 사회의 집단적 요구를 더 중요시함으로써 창의성의 본질적 가치뿐 아니라 본질적 천재 예술가라는 개념을 극히 작게 평가했다. 1950년대에 바르바로는 만약 어떤 작품을 창조한 그 미술가가 태어나지 않았더라도 “그 작품은 아마도 다른 미술가가 만들어냈을 것이다.”라고 기술했다. 미술의 역사와 사회적 역할에 대한 이와 같은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주장은 미술을 사회경제적으로 해석하고자 했던 미술사가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이들 중 가장 중요하고 핵심적인 사람으로 프레데릭 안탈을 들 수 있다. 안탈은 1930년대와 40년대의 저술에서 마르크스주의 방법론을 주제와 테마 연구에 적용하고 지성의 역사와 결합시켰다. 이 같은 접근을 통해 그는 파노프스키와 바르부르크 학파의 도상학을 더욱 확장시켰다. P.95 안탈은 사회적 맥락을 중요시하여 ‘예술을 위한 예술’ 철학과 순수 형식주의에 반대했다. 그의 고전적인 저작 <피렌체 회화와="" 그="" 사회적="" 배경="">은 그의 연구방법을 보여주는 좋은 예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은 조토에서 마사초까지-14세기 초에서 1430년경까지-의 회화를 다루고 이 시기의 회화를 당시의 사회적, 종교적, 정치적, 경제적 맥락 속에 자리매김한다. 또한 구매자가 미술가와 작품에 끼친 영향을 밝혀주는 후원의 문제도 깊이 있게 다루고 있다. 안탈은 유럽 자본주의의 기초가 12세기부터 14세기 사이의 피렌체에서 생겼다고 본다. 그 시기에 직물 산업(특히 모직)과 국제 무역, 금융업이 “장인 기술자”의 손에서 “자본주 기업가”의 손으로 넘어갔다. 금화 플로린이 1252년에 최초로 주조되어 “세계 시장의 국제 통화”가 되었다. 칼리말라가 막대한 이익을 볼 수 있었던 것은 노동자들에게 저임금을 지불했기 때문이었다. 생산수단을 통제하는 데 그치지 않고 피렌체의 자본가들은 주요 은행들을 경영했으며 이와 함께 교황의 재산을 관리했다. 안탈에 따르면 재정적, 상업적 힘이 피렌체의 중상층에 이처럼 집중된 것은 전례 없는 일로서 이는 노동자들의 종속이라는 결과를 낳았다. 이러한 사회구조는 교회와 로마 공화정의 부활을 기대한 인문주의자들에 의해 심화되었다. 안탈은 이 사회적, 경제적 발전을 미술 양식의 변화와 관련지었다. 그는 새로운 합리주의적 시각이 퍼지게 된 것은 피렌체 부르주아 계층에 의해서이고, 이에 따라 예술 정신도 정신적 경향보다 인문주의적 경향으로 나아가게 되었다고 하였다. P.96 -오리엔탈리즘과 콜로니얼리즘 콜로니얼리즘 경향이 명백한 오리엔탈리즘 미학을 표현한 작품으로 앙투안 장 그로의 <자파의 환자들을="" 방문한="" 나폴레옹="">이 있다. 이 그림은 프랑스의 역사화 전통을 결합해 낭만적 무어풍 장면 속에 나폴레옹을 은근히 신격화한 것이다. 1804년, 나폴레옹이 스스로 황제가 된 바로 그 해에 그려서 프랑스 통치자의 식민지에 대한 야망을 이상화하고 기독교적 의미를 부여했다. 콜로니얼리즘을 내포한 19세기 프랑스 낭만주의 오리엔탈리즘의 맹아가 된 작품으로 들라크루아의 1827년 작 <사르다나팔루스의 죽음="">이 있다. 이 그림의 도상과 서양 위주의 관점은 동양이-아시리아 전제주의의 모습으로 그려져-성적으로 문란하고 여성에 대한 남성의 폭력이 만연한 곳이라는 의미를 내포한다고 여겨져 왔다. 들라크루아가 동양을 난폭한 관능성을 풍기는 이국적 지역으로 구성한 것은 침대 모서리의 코끼리 머리 장식, 선홍빛 색채, 힘찬 역동성, 반복 무늬가 있는 요소들, 그리고 황금으로 된 물건들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 여자들을 향한 남자들의 공격이 그림 속 다른 폭력적 모티프들과 더불어 서양의 동양에 대한 식민주의적 경향을 정당화하는 것이라고 보는 평론가들도 있다. -오달리스크 테마 오달리스크라는 오리엔탈리즘의 테마는 19세기 초, 주로 프랑스에서 등장해 20세기에도 이어졌다. 그러나 티치아노의 <우르비노의 비너스="">와 마네의 <올랭피아>같은 작품에서 분명히 보이듯이, 오달리스크 모티프는 비스듬히 누운 누드라는 고전적 전통과도 관련이 있다. 19세기 초, 오달리스크 모티프와 가장 잘 부합되는 프랑스 화가가 있는데 그는 한 번도 로마보다 멀리 여행한 적이 없었다. 1814년 로마에서 그는 유명한 <대 오달리스크="">를 그렸다.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 그의 동양에 대한 지식은 여행자들이 전하는 풍문을 펴낸 출판물에서 수집한 것이다. <터키탕>과 같이 하렘을 그린 회화에서 앵그르는 다양하게 에로틱한 포즈를 취한 육감적인 누드들로 공간을 가득 채움으로써 동양의 관능성을 넘어섰다. 그 중 어떤 사람은 레즈비언 관계에 빠져 있고, 누구는 도발적으로 관람자를 마주보고 있으며, 또 누구는 몸을 뒤튼 누드들로부터 고립돼 혼자만의 내면세계를 찾고 있다. P.115 마티스는 오달리스크 시리즈를 대부분 니스에서 그렸는데 거기서는 정오의 따뜻한 색채들에 둘러싸이곤 했다. 그는 모로코를 여행했고 훗날, 1930년에 타히티를 방문햇다. 두 곳 모두 프랑스 식민지였다. 마티스가 그린 오달리스크는 동양식 의복을 입고 동양식 장면을 차지하고 있는 프랑스 여인들이다. 마티스는 자신의 동양적 테마와 형태가 콜로니얼리즘적 시각이라는 데에 반대했다. P.118 -인종주의 도상학 서양미술사에서 인종주의 도상학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이를테면 고대 그리스에서는 아프리카 흑인이 자주 묘사되었는데, 대개 그리스인이 아닌 타자라는 특징이 부여되었다. 그런데도 그리스인들은 일반적으로 아프리카 흑인, 특히 이디오피아인이 정신적 품격을 지녔다고 여겨 그들을 찬미했다. 초기 기독교시대 이후 아프리카인은 경멸적으로 표현되기 시작했고 성경에 나오는 함의 저주받은 자식들과 결부되었다. 그 다음 14세기부터는 아프리카인에 대한 인식이 더 진전되어 결국 노예무역이 시작되었고, 콜로니얼리즘을 불러일으켰으며 18세기 도시 발달로 더욱 가속되었다. 19세기에는 흑인들이 서구 미술가들에 의해 계속해서 재현되었다. 그러나 화가들은 흔히 어떤 전형에 맞춰 표현했는데, 최근 비평가들은 이를 있는 그대로의 노골적 표현이라고 보기도 한다. 마네의 <올랭피아>속의 인물은 티치아노의 비너스 상과 비교해 성적 특징이 억제되었고, 리사 패링턴에 의하면 매춘과 결부되는 몇 가지 속성들이 흑인 하녀에게로 이동했다. 하녀는 또한 유모라는 모티프를 암시하기도 한다. 미국에서 노예제도와 노동계층 흑인 묘사가 갖는 경제적 역할은 마르크스주의적 해석으로 나아가게 한다. 1920년대에 할렘 르네상스가 일어나자 흑인 예술가들은 전통적 인종주의의 전형에 의식적으로 도전하는 사람으로 등장하기 시작한다. P.120 페미니즘과 젠더 미술사에 대한 페미니즘 연구방법은 미술의 창작과 내용과 가치평가를 이해하는 데 사회적인 성이 본질적인 요소라는 관점에 입각한 것이다. 마르크스주의에 영향을 받은 미술사가들처럼 페미니스트 미술사가들도 형식주의에 반대하는데, 미술작품이 미술가와 마찬가지로 당시의 문화 환경을 반영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페미니즘의 관점에서 보면 미술도 미술가도 그 환경을 떠나서는 이해될 수 없다. 한 페미니스트 비평가는 클라이브 벨의 ‘의미있는 형태’라는 찬사에 의문을 제기하면서 “형태가 예술로 인정되려면 누구에게 의미가 있어야 하는가?”라고 질문한다. 이 질문은 미술의 본질과 이제까지 미술을 평가해 온 기준에 대해 전통 미술사가 가지고 있던 생각들에 도전하는 것이다. 젠더 연구는 퀴어 이론에서부터 양성애, 레즈비언, 트랜스젠더 이미지 연구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방법들을 포함한다. 인종주의 도상이 그렇듯이 동성애에 대한 묘사는 서양미술에서 새로운 것이 아니다. 정작 새로운 것은 1970년대의 동성애자 해방과 에이즈의 성행과 더불어 시작된 급진적 정치와의 연관성이다. 이러한 문화적 사건들은 몇몇 예술가들이 동성애에 대한 전통적이고 때론 은밀한 표현에 맞서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의식적으로 공공연하게 표현하도록 인도했다. P.126 -페미니즘 페미니즘의 도전은 두 가지다. 첫째로 미술가로서, 그리고 미술의 주제로서 여성들이 차별받아 온 방식을 살펴본다. 둘째로 페미니즘 미술사가들은 여성들-미술가와 후원자 모두-이 행한 공헌을 밝혀내는 역할을 해왔다. 페미니스트들은 전통적으로 남성이 여성보다 미술 교육을 더 많이 접할 수 있었고 여성이 누드 모델을 그린다는 것은 부당하다고 여겨졌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더욱이 극소수의 예외를 제외하고 여성들은 16세기 초 유럽에 설립된 아카데미에도 들어갈 수 없었다. 출산과 가사일 또한 여성이 미술가로 활동하는 데 장애물이 되었다. 페미니스트들은 또한 특정한 문학적, 도상적 테마에 의해 여성이 계속해서 수동적이거나 부정적인 시각에서 묘사되어 왔다고 주장한다. 이 테마들은 티치아노의 <우르비노의 비너스="">, 마네의 <올랭피아>, 그리고 오달리스크들에서처럼 여성을 대상화하는 것에서부터 여성을 온갖 악의 뿌리로 취급하는 것에 이르기까지 전반적으로 퍼져 있다. … 페미니스트 미술사가들은 여성을 묘사한 이러한 부정적인 관점을 조명할 뿐 아니라 화가나 후원자였던 여성들의 모습을 더욱 상세히 제시한다. … 페미니즘 방법론의 또 다른 방향은 미술가와 관객이 모두 남자라는 생각에서 나온 도상학적 결과를 밝히고자 하는 것이다. 그 결과 페미니스트들은 작품에 표현된 여성은 남성(능동적 주체)에 응시 대상이 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페미니즘의 견해는 클라크가 마네의 <올랭피아>를 해석한 내용을 뒷받침하는 것이다. 일례로 클라크는 티치아노의 <우르비노의 비너스="">와 달리 올랭피아는 남성 관객에게 자신을 내어주지 않는다고 언급했다. 그녀는 인습적인 기대를 저버리고 비스듬히 기대앉는 대신 똑바로 앉아 남성의 시선을 단호히 되받아치면서 화면 밖을 응시하고 있다. 그녀는 자기에게 몰입하지도 않고 이상화되지도 않았다. 더구나 그녀의 동작은 티치아노의 누드와 달리 대항하는 것으로 보인다고 클라크는 말한다. … 마네는 이와 같이 19세기의 남성 관람자가 매춘부인 올랭피아를 마주보게 하고, “이 모습이 실제로 있을 수 있고 그 역시 포함될 수 있는 전체적인 사회구조를 상기하게 함으로써 자기 그림의 관객에게 도전한다. P.128 솔로몬고도는 여성의 신체가 <올랭피아>처럼 ‘문명화된’ 의미를 갖는 데서 벗어나 고갱이 ‘원초적’ 성의 자유를 찾아 타히티로 도피한 것에 대해 상세히 논술한 바 있다. 그녀는 ‘타히티인의 육체’에 대한 고갱의 욕망과 여인의 순종을 19세기의 정복자와 식민지민의 관계에 결부시키고, 또 지배하는 남성의 시선과 ‘종속되고’ 수동적인 여성과의 관계로 연결시켰다. 솔로몬고도는 여성에 대한 이러한 시각은 여성을 이질적인 ‘타자’로 인식한 데서 기인한 것이라고 하였다. 페미니스트들은 성의 문제에 초점을 맞추어 서구 미술의 전통적인 캐논(canon)과 가정에 대해 의문을 갖도록 한다. 전통적인 캐논은 천재의 개념에 가치를 두고 그것을 남자들에게만 부여하는 가부장적 체계이다. 페미니스트들은 예컨대 1970년대 이전에는 여성 미술가들이 주요 미술사 개설서에서 제외되었다는 점을 지적한다. 이 같은 상황은 여성들의 작품이 관습적으로 남성들의 작품보다 열등하다고 여겨지며 가치도 그렇게 매겨지는 사실과도 일맥 상통한다. 이런 편견을 강하게 드러낸 예로 1801년 작품 <그림 그리는="" 젊은="" 여인="">이 있다. 이 그림은 자크 루이 다비드의 작품이라고 여겨져 뉴욕의 MET에 기증되었고 비평가들은 훌륭한 초상화라는 평을 아끼지 않았다. 그런데 이 그림이 마리 샤르팡티에가 그린 것이라고 알려지자 이 그림은 “갑자기 여성적인 속성을 갖게 되었다. 즉 ‘조형성보다는 시정과 문학성이 강하고, 분명히 아주 매력적이며 나약함을 교모하게 감춘 점, 수많은 섬세한 태도가 이루는 조화 등 모든 것이 여성적 기운을 드러내는 것처럼 보인다.’” … 페미니스트들은 미술과 공예를 구분하는 전통적인 분류에 대해서도 의문을 제기한다. 역사적으로 공예는 여성이 할 일로 여겨졌고 반면에 회화, 조각, 건축처럼 소위 기념비적 미술은 남성이 지배해 왔다. 페미니스트들이 미술 계보에서 공예가 처한 낮은 위치를 반대하는 것을 보면 16-17세기에 있었던 회화의 지위에 대한 논쟁을 연상하게 된다. 회화가 ‘수공예’로 여겨지던 중세 회화의 위치(왜냐하면 미술가들이 손으로 일했기 때문)는 미술가들의 사회적 지위가 향상됨에 따라 도전을 받게 되었다. 르네상스 시기에 이탈리아에서는 회화가 교양과목의 위치를 얻게 되었다. 페미니스트들은 공예가 여성과 연관되기 때문에 가치절하 되었다고 믿는다. 나아가 그들은 역사를 표현하고 해석하는 데 성별이-생물학적 이유보다 사회문화적 이유에서-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한다. 여성 미술가들은 전통적으로 서유럽의 고전 학자들과 인문주의 저술가들의 관심의 대상이 되어왔다. 로마의 역사학자 플리니우스는 고대 그리스의 유명한 여류화가들의 작품이 유실되었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의 이름을 인용했다. 조르조 바사리는 여성들의 업적이 차별받는 것을 개탄했다. … 만일 소포니스바가 남자였다면 다룰 수 있는 주제의 폭이나 후원자의 폭이 더 넓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게라드는 “젠더를 의식하고 젠더에 따라 판단되는 시대”에 살았던 교육받은 여성으로서 스포니스바가 자기의 불이익을 인식했다는 가설을 제시한다. 그녀는 남성이 지배하는 미술계에서 활동하는 능동적 여성으로서 자신의 역할이 자기가 살고 있는 바로 그 문화에 의해 부정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16세기에 여자는 그림을 그리는 작가이기보다는 그림에 나오는 대상으로 훨씬 더 적합하다고 여겨졌다. … 게라드는 소포니스바의 의도가 “여성 미술가에 대한 진부한 생각을 문제삼고, 관람자가 아름다움의 상징으로서의 그녀의 이미지와 화가-행위자를 결부시키지 않도록 하려는 것인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바사리는 여성 미술가들의 교육이 어려웠다고 본 점에서 현대의 페미니스트들과 인식을 같이 하지만 한편 위대한 미술가는 만들어질 뿐 아니라 그렇게 태어나는 것이라고 믿은 점에서는 차이를 보인다. 페미니스트들은 마르크스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19세기에 ‘낭만적’으로 형성된 선천적인 천재 미술가라는 개념에 반대하는 경향이 있다. 미술사학자 린다 노클린은 미술가로서의 성취는 일차적으로 교육의 결과라는 입장에서, 많은 여성 미술가들이 미술가 가문 출신이거나 아버지가 미술가라서 그로부터 가르침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러한 여성으로 틴토레토의 딸 마리에타가 있다. 19세기까지 고수되어 온 그러한 태도는 파리에 살면서 예술가를 꿈꾸었던 마리 바쉬키르체프의 글에서 잘 나타난다. 그녀는 베르트 모리조와 메리 카사트가 있긴 하지만 여성이 예술가로서 발전하는 데에는 제약이 있다는 것을 안타까워했다. 이처럼 여성 미술가들이 당면한 문제들을 인식했음에도 불구하고 1970년대에 이르기까지 페미니즘은 미술계에서 의미 있는 운동이 되지 못했다. 이제 페미니즘과 미술사 논의를 위한 틀로서 주디 시카고가 1979년에 제작한 <디너 파티="">라는 설치 작품을 제시하고자 한다. 이 작품은 페미니즘의 관점에서 하나의 아이콘이 되었다. 그것은 각 변의 길이가 46피트인 삼각형 모양의 식탁으로 이루어졌다. 그 식탁은 999명의 이름이 금색으로 적힌 삼각형의 … 이 작품은 전통적으로 수공예에서 여성이 차지한 역할과 가정에서 요리를 하고 음식 시중을 드는 여성의 위치를 상기시킨다. 그리고 끝으로 이 식사는 예수의 최후의 만찬을 의미하는 한편 삼각형은 여성의 기호(음부)인 동시에 삼위일체의 상징이기도 하다. 시카고가 전하는 메시지는 여성이 서구 사회의 가부장적 지배에 희생되어 왔다는 것이다. P.138 -젠더와 퀴어 이론 퀴어 미술사와 젠더 연구는 페미니즘처럼 전통적 미술사 방법들을 확장하는 연구와 관점을 내포한다. 동성애의 묘사가-그 주제에 대한 미술사적 논의도-항상 받아들일 수 있는 것으로 여겨지지 않았기 때문에 미술가들은 때로는-특히 공공의 주문에 대해-동성애적 내용을 위장하기도 했다. 그 결과 미술사가들은 이 문제에 접근할 새로운 방법에 의지해야 했을 것이다. 출처를 알기 어려울 수도 있고, 그래서 연구자들은 소문이나 일화적 정보에 의존해 동성애를 암시하는 숨은 내용을 해독하기 위해 행간을 읽어야 할 수도 있다. 퀴어 이론은 성과 젠더가 어느 정도 사회적 구축물이라고 여긴다. 이는 예술의 수용에 강한 영향을 주며, 작가의 정체성과 뗄 수 없는 것이다. 결국 연구와 해석의 새 통로가 활짝 열리고 형식 및 내용, 역사, 그리고 창작과정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넓혀준다. 카라바조의 <과일 바구니를="" 든="" 소년="">에서 우리는 두 가지 젠더가 융합된 것을 볼 수 있다. 왜냐하면 그 인물은 ‘소년’을 가리키고 있지만 현저히 여성적 특징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바니타스 전통에 따르면 과일이 썩기 전에 먹으라고 관람자를 초대하고 있는 것이다. 자웅동체 도상에 대한 또 다른 접근을 다음 장에서 살펴볼 마르셀 뒤샹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