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키 17


크리퍼

봉준호 감독의 영화에는 다양한 괴생명체(Creature)가 등장한다. 영화 <괴물>에서의 괴물, 그리고 <옥자>에서의 (그것의 크기를 감안했을 때) 슈퍼돼지가 그렇다. 이러한 괴생명체는 관객으로 하여금 인간과 인간이 아닌 것의 관계를 떠올리게 하고, 더불어 인간다움은 무엇인지에 대해 성찰하게 한다. 나아가 이들 생명체는 인간의 추함을 더욱 극단적으로 보여주는 매개체로서 작용한다. 영화 <미키 17>에서의 인간의 지도자는 원주민인 크리퍼와 소통하려는 일말의 노력도 없이 가스로 말살시키려 한다. 이처럼 봉준호의 영화에 등장하는 괴생명체는 단순한 공포의 대상이 아닌, 인간 사회의 민낯과 윤리적 모순을 드러내는 강력한 서사적 장치로 기능한다.옥자>괴물>

죽음에 대하여

죽는 것이 일인 미키에게 사람들은 ‘죽는다는 건 어떤 느낌’인지 묻는다. 어쩌면 이는 신과 같은 불멸의 능력으로도 느껴질 수 있겠지만 미키에게는 아니다. 미키가 죽어도 살아나는 것을 이용해 온갖 생채실험을 아무렇지 않게 벌이기 때문이다. 그에게 죽음은 노동이며 일상이다. 불행 중 다행인 것은 미키가 어수룩하다는 점이다.

영화는 마땅히 죽었어야 할 17번 째 미키가 죽지 않음으로써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된다. 복제 인간이 둘 이상 공존하는 것을 멀티플이라고 부르는데, 영화 속 사회에서는 (심지어 지구 밖 우주에 있더라도)이것이 엄격히 금지되어 있다. 그러나 연구원들은 빙하에 떨어진 17번째 미키가 당연히 죽었으리라 짐작해 18번째 미키를 생성했거, 17번째 미키와 18번째 미키가 만나게 된다.

18번째 미키는 17번째 미키와 전혀 다른 성격을 갖고 있다. 걸핏하면 ‘저자식을 죽이겠다’고 소리 지르며 지금까지의 그 어느 미키보다도 과격하고 괴팍하다. 둘이 공존한다는 사실이 발각되면 죽을 것이므로 둘은 처음에 서로를 죽이려 하지만 이내 마음을 고쳐먹고 ‘홀수 번째 미키는 내가, 짝수 번째 미키는 네가’ 맡기로 하면서 극적인 합의에 도달한다.

비슷한 장르를 다루는 «a class=’internal-link’ href=’/%EB%9F%AC%EC%8B%9C%EC%95%88-%EC%9D%B8%ED%98%95%EC%B2%98%EB%9F%BC’>러시안 인형처럼</a>>에서, 주인공은 죽어도 자꾸만 태어나는 것에 대해 - 한다. 이처럼 죽지 못한다는 것은 누군가에게는 권력이, 누군가에게는 권태가, 누군가에게는 노동이 된다.

~~이는 배우의 역할과도 맞닿아 있다. 그는 다양한 역할을 수행하며 관객 앞에 계속해서 새로 태어난다. ~~

리더 이야기

마더크리퍼의 존재도 흥미롭다. 전쟁과 섬멸밖에 모르는 극중 마크 러팔로와 달리 마더크리퍼는 협상하고 평화를 지킬 줄 아는 리더이다.

노동자

미키는 ‘죽어도 되는’ 존재로 전락한다. 이는 우리 사회의 노동자들의 얼굴을 떠올리게 한다. 누군가의 부주의, 현장의 위험으로 인해 많은 노동자들이 현장에서 죽어 나가지만, 그것에 관심을 기울이는 이는 없다. 법적으로 바뀌는 것도 없고 기업들은 교묘히 책임으로부터 빠져 나간다. 결국 대체되는 것은 자리이고 죽음의 위험은 늘 그자리에 존재한다.

물론 미키의 삶이 이러한 노동자의 삶을 대변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러기에는 너무 희화화 되어있고 어수룩하고 한없이 가벼운 인물이다. (왜 대변하는 것이 이상하다 생각하는지는 아직 나도 잘 모르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