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쩔수가없다

박찬욱 감독의 신작 ‘어쩔수가없다’는 미국 작가 도널드 E.웨스트레이크의 소설 ‘액스(The Ax)‘를 원작으로 한 블랙 코미디 스릴러이다. ‘다 이루었다’는 생각이 들 만큼 삶이 만족스러웠던 25년 경력의 제지 전문가 ‘만수’(이병헌)가 갑작스러운 해고 통보를 받으며 이야기가 시작된아. 아내 ‘미리’(손예진), 두 아이, 반려견들과 함께 행복한 일상을 보내던 만수는 회사로부터 “미안합니다. 어쩔 수가 없습니다”라는 말과 함께 하루아침에 일자리를 잃으며 삶이 송두리째 바뀌게 된다. 만수네 가족은 딸아이가 사랑하는 두 반려견을 잠시 부모님 댁에 맡기고, 아들의 넷플릭스 구독까지 해지하면서 긴축 재정에 돌입한다. 만수는 가족을 위해 석 달 안에 반드시 재취업하겠다고 다짐하지만, 1년 넘게 마트에서 일하며 면접장을 전전하게 되고, 급기야 어렵게 장만한 집마저 팔아야 할 위기에 처하게 된다. 만수는 문 제지의 현장 반장 ‘선출’(박희순)을 제거하려는 생각까지 하게 되고, 실제로 그를 처치하기 직전까지 이르지만 문득 한 가지 생각에 사로잡힌다. ‘선출이 제거되더라도 내가 그 자리에 들어갈 수 있을까? 나보다 더 뛰어난 경쟁자가 있다면 내가 손을 더럽혀 선출을 죽인다 한들 결국 죽 쒀서 남 주는 꼴이 되어버리는 게 아닌가’ 그는 가상의 회사 레트페퍼페이퍼컴퍼니의 채용 공고를 올리고, 자신보다 뛰어난 경쟁자 ‘구범모(이성민)’와 ‘고시조(차승원)’의 존재를 파악하고, 그들을 차례로 제거하기 시작하면서 본격적인 이야기가 흘러간다.

영화는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고용 불안정 문제를 ‘노사갈등’이 아닌 ‘노노갈등’으로 접근한다. 해고의 불공정함을 들어 시위를 하거나, 사회에 자리를 더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나와 같은 처지에 놓인 다른 노동자를 제거함으로써 내가 그 자리를 차지하겠다는 식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오히려 노동자가 얼마나 사회에서 나약하고 도구처럼 다루어지는가가 더욱 분명히 드러난다.

‘어쩔 수 없음’은 이 작품을 관통하는 인물들의 주요 태도일 것이다. 이병헌 배우의 연기에 몰입되어 우리는 잠시 만수를 응원하게도 되지만, 극이 마지막으로 향할 수록 이러한 생각이 드는 것을 멈출 수가 없다. ‘정말 어쩔 수 없는 것인가? 어쩔 수 없다고 사람을 죽여도 되는 건 아닌데.’ 영화를 지배하는 이 최면은 관객 스스로 빠져나올 수 있을 만큼의 느슨함을 지니고 있어 관객으로 하여금 내내 웃다가 이내 집으로 돌아가게끔 하지 않는다.

‘미리’와 ‘아라’는 두 가장을 두고 ‘꼭 제지 회사에 들어가야만 하는 건 아니지 않느냐’라고 설득한다. 더 나아가 ‘아라’는 ‘범모’에게 노골적으로 이야기한다. 당신이 회사에서 짤려서가 아니라, 당신이 회사에서 짤리고 나서 대처하는 행동이 보기 싫은 거라고. 이렇듯 영화는 대한민국의 중년 남성, 가장의 애처로우면서도 미련한 면모를 적당한 희화화와 함께 연민의 시선도 함께 담아 바라보는 듯하다. 특히 대한민국의 내로라 하는 배우들의 능란하게 연기하는, 슬프면서도 우스꽝스러운 몸짓과 표정이 이에 맛을 더한다.

결국 모든 과업(살인)을 성공적으로 마친 만수는 그가 바라던 선출의 자리를 차지하고야 만다. 만수는 제자리로 돌아왔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아내와 아들이 그를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졌고, 어렵게 차지한 자리 마저 언제든 AI(혹은 로봇)에 의해 대체될 수 있는 불안함이 서려 있다. 그렇다면 그는 같은 일에 처했을 때 또 다른 살인을 벌여야 하는가? 만약 대상이 인간이 아니게 된다면? 이야기는 순환되는 과정에서 모든 것이 원상복구되는 것이 아니라 조금씩 틈이 벌어지고 상황이 달라짐을 분명히 한다.

영화에서 나무는 단순히 미장센의 배경이 아니라, 개개인의 심리와 자본주의 구조, 인간성과 자연성의 복합적 상징을 지닌다. 파괴와 재생, 변형의 과정은 영화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와 정서를 직관적으로 시각화하여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