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중권의 미학 오디세이 1 에셔와 함께 탐험하는 아름다움의 세계 (에셔와 함께 탐험하는 아름다움의 세계) - 진중권

빙켈만은 고대 예술의 역사를 유기체의 삶으로 간주했다. 예술을 탄생하고 성장하여 이제 완숙기에 도달했다. 그 다음엔? 물론 죽어야 한다. 그늘 이 사멸의 단계를 로마 예술에서 보았다. 여기에 빙켈만은 ‘모방자 양식’이란 경멸스러운 이름을 붙이고, ‘보잘것없음’으로 특징지었다.

 사실 로마 시대의 조각들 가운데에는 어디선가 본 듯한 느낌을 주는 게 있다. 그건 대개 그리스 조각에서 동작이나 자세 또는 모티프를 따왔기 때문이다. 어쨌든 로마인들은 수많은 그리스 조각의 모작을 만들어냈는데, 사실 우리가 알고 있는 그리스 조각들은 대부분 진품이 아니라 로마인들의 모작이다.

 빙켈만은 예술이 그리스에서 완성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후세인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이 완전한 모범을 모방하는 것뿐이다. 그래서 그는 당시 사람들에게 그리스를 모방하라고 열심히 권하고 다녔는데, 그의 이런 생각은 오랫동안 커다란 영향을 끼치게 된다. 가령 헤겔이 예술의 시대가 고대 그리스에서 끝나고 그 뒤 예술은 사멸한다고 말했을 땐, 역시 빙켈만의 편견(?)에 사로잡혀 있었던 거다. 하지만 그럴 만도 하다. 어찌 인간의 손으로 이보다 더 아름다운 형태를 만들어낸단 말인가. P.84~85

  • 빙켈만의 시대 구분
     
고대 양식 페이디아스 이전(아르카익) 엄격함, 딱딱함
숭고 양식 페이디아스와 동시대인 폴리클레이토스 숭고함, 딱딱함
미의 양식 프락시텔레스, 리시포스 아펠레스 우미
모방자 양식 그 뒤 예술의 멸망까지(로마) 보잘것없음
<라오콘>은 헬레니즘 예술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헬레니즘 시대는 그리스의 몰락기로, 빙켈만의 시대 구분에 따르면 대충 ‘미의 양식’과 ‘모방자 양식’ 사이의 기간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이 시기의 조각은 아주 역동적이고 극적인 성격을 띠는데, 이런 특징이 <라오콘>에서도 잘 드러난다. 라오콘은 원래 트로이의 신관으로, 목마를 성 안에 들여놓으면 안 된다고 경고했다가, 하늘의 비밀을 누설한 죄로 두 아들과 함께 신들이 보낸 뱀에 휘감겨 비참한 최후를 맞은 인물이다. 빙켈만은 이 작품 속에서 그리스 예술의 본질적 특징을 보고, 그걸 ‘고귀한 단순함과 고요한 위대함’으로 특정지었다.   일반적으로 그리스 걸작들의 두드러진 특징은 그 자세나 표정에 나타난 ‘고귀한 단순함과 고요한 위대함’이다. 바다의 표면이 아무리 거세게 일어도 그 깊은 곳만은 언제나 고요함을 간직하고 있는 것처럼, 그리스 인물들의 표정은 아무리 격정적인 상황에 있어도 한결같이 위대하고 침착한 영혼을 보여준다.  하지만 빙켈만의 설명도 라오콘의 표정에 드러난 저 깊은 고뇌의 흔적은 지우지는 못할 것 같다. 이 비극적 감정은 도대체 어디서 비롯된 걸까? 몰락하는 그리스 사회의 불안한 심리를 표현한 걸까? P.85 하지만 드보르자크에 따르면 그렇지가 않다. 중세 예술은 애초부터 고대 예술과 전혀 다른 ‘정신’에 뿌리박고 있었다. 문제는 능력이 아니라 의지다. 중세인들이 고대인들처럼 그럴 능력이 없었던 게 아니라 그럴 의도가 없었단 얘기다. 중세 예술은 예술사의 퇴보가 아니라 그 자체가 훌륭한 가치를 지닌다. 사실 묘사에서 물질세계를 희생했지만 인간의 영혼 깊숙이 파고드는 힘에선 중세 예술을 따라갈 수 있는 건 없다. 예수가 무덤을 깨고 부활했듯이, 고대인을 장사 지낸 그 무덤에서 예술도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부활한다. P.142 중세는 숨을 거두기 직전에 고딕이라는 위대한 양식을 낳는다. 이 변화의 토대는 늑재 궁륭이라는 기술이었다. 늑재란 갈비뼈란 뜻이다. 고딕 성당에 들어가면 건물의 골격과 추력의 흐름을 한눈에 볼 수 있다. 둥근 아치는 끝이 뾰족한 첨두형 아치로 바뀌고, 덕분에 건물은 더욱더 날씬해진다. 건물 내부의 두꺼운 벽이 사라지고 건물이 하늘 높이 치솟다 보니, 건물 내부에 빛을 받아들이는 부분도 넓어진다. 이 채광층은 화려한 스테인드글라스로 채워진다. P.147 로마네스크 성당이 악의 무리로부터 보호받는 안전한 피난처였다면, 고딕 성당은 사람들에게 물질세계를 초월한 별세계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두꺼운 벽은 이제 보석처럼 빛나는 스테인드글라스로 바뀌고, 성당 내부는 온통 찬란한 금빛으로 빛난다. 형형색색의 스테인드글라스를 통해 쏟아져내리는 천상의 빛과 성가대석에서 흘러내리는 천사의 합창. 이 정도면 하늘나라를 믿게 하는 데 충분하지 않았을까? P.149 중세 예술의 미학은 플로티노스에서 유래한 ‘빛의 상징주의’였다. 플로티노스에게 아름다움은 무엇보다도 단일한 속성이었다. 그건 부분들 사이의 양적 비례 관계가 아니라 어떤 질적인 것, 말하자면 초월적인 존재에서 흘러나오는 ‘빛’이었다. 금빛으로 빛나는 비잔틴의 모자이크, 금박으로 장식된 필사본 성서와 스테인드글라스의 오묘한 빛 속에서, 우리는 이 ‘빛의 미학’을 찾아볼 수 있다. 특히 화려한 색채의 효과는 중세 회화의 아주 중요한 특징이다. 색채란 빛이 어둠을 극복할 때 떠오르는 것이기 때문이다.  중세 회화는 눈에 보이는 외부세계의 재현을 포기하고 정신세계의 아름다움을 담으려 했다. 이 생각 역시 모방론이라는 고대의 관념을 저버린 플로티노스에서 유래한 것이다. 사실 비잔틴 예술에서 로마네스크는 물론, 심지어 고딕의 자연주의까지도 외부세계의 모사보다는 영적인 세계를 표현하는 게 목표였다. 인물의 형태는 딱딱한 기하학적 형태를 띠게 되고, 그 결과 인물들은 저 하늘 위에 사는 사람들처럼 보이게 된다.  자연 모방이란 관념에서 해방된 탓에, 중세 회화는 대상이 가진 원래의 형태와 색채에서 과감히 벗어나 ‘형태와 색채의 자유로운 구성’에 도달할 수 있었다. 중세 예술의 위대함이 바로 여기에 있는데, 사실 대상에서 해방된 형태와 색채의 자유로운 구성은, 곧 현대 회화의 원리이기도 하다. 어쨌든 이처럼 기하학적으로 단순화한 형체로 ‘정신’의 계기를 강조하고, 밝은 빛과 화려한 색채로 초월적 존재에 대한 신비스런 ‘관조’를 표현하는 게 바로 중세 회화의 가장 큰 특징이었다. 여기서 중세 미학은 기독교적으로 해석된 플로티노스라는 걸 알 수 있다. P.155 중세 예술이 내내 이런 추상적 경향만 띠고 있었던 건 아니다. 13세기부터 발달하기 시작한 고딕 예술은 이제까지와는 상당히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이제 묘사는 과감하게 자연주의적 경향으 띠기 시작한다. 실제로 고딕 후기의 조각 작품은, 르네상스의 조각과 구별이 잘 안 될 정도다. 중세 후기 예술에 나타난 이 새로운 경향을 흔히 ‘고딕 자연주의’라 부른다. 이 변화는 도대체 왜 생긴 걸까? 드보르자크는 중세 예술을 이상주의와 자연주의의 대립으로 설명한다. 중세 초기엔 이상주의적 경향이 우세했다. 이는 물질세계와 정신세계를 날카롭게 대립시켰던 아우구스티누스 때문이리라. 이 기독교 이상주의 때문에 비잔틴과 로마네스크 예술은 물질세계의 가치를 낮게 평가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니 자연주의적 묘사는 사라지고, 인간의 정신과 영혼을 드러내려는 추상적, 기하학적 경향이 나타난다.  하지만 후기에 이르면 물질세계에 대한 태도가 달라진다. 아퀴나스의 철학은 현실세계에 더 많은 가치를 부여했다. 이제 교회는 물질세계를 소극적으로 무시하지 않고, 그걸 신의 섭리를 실현하는 장으로 바라본다. 이 세상은 신이 창조한 거다. 그러므로 이 세상 사물 속엔 창조의 질서가 들어 있다. 따라서 신이 지으신 세계를 묘사하는 건, 곧 창조의 아름다움을 파악하는 걸 의미한다. 고딕 자연주의는 이러한 사회적, 철학적 분위기에서 나왔다. P.155 물론 고딕에서 자연주의적 요소를 과대평가하면 안 된다. 그건 어디까지나 기독교 이상주의를 벗어나지 않는 범위 안에서의 자연주의일 뿐이니까. 그래서 고딕은 르네상스 자연주의와는 근본적으로 구별된다.  고딕은 자연주의적 요소를 기독교 이상주의 테두리 안에 끌어들여 물질세계에까지 이상주의적 원칙을 관철하려는 시도지만, 르네상스의 자연주의는 기독교 이상주의와 아무런 관계가 없기 때문이다. 드보르자크는 고딕을 이렇게 중세 초기의 이상주의와, 후기의 자연주의적 경향 사이에 놓았다. P.157 루벤스의 그림이 보여주듯이, 바로크 예술은 르네상스나 고전주의와 매우 다르다. 윤곽은 뚜렷하지 않고, 묘사는 격정적이며, 구도는 복잡하고 역동적이다. 독일의 미술사가 뵐플린은 르네상스에서 바로크로의 변화를 시형식의 변화, 즉 사물을 바라보는 눈의 변화로 설명했다. 그는 이걸 다섯 개의 개념 쌍으로 요약했는데, 내가 아는 한 르네상스예술과 바로크 예술의 대립되는 특징을 이보다 더 훌륭하게 설명하는 이론은 없다. P.224 - 선적인 것에서 회화적인 것으로 르네상스의 회화는 ‘선적’이다. 그래서 드로잉을 가장 중요시한다. 거기서 대상들은 뚜렷한 윤곽을 가지고 배경과 분명하게 구별된다. 그러므로 르네상스 회화는 촉각적이라고 할 수 있다. 윤곽은 눈을 감고 손으로 더듬어서 파악할 수 있는 거니까. 반면 바로크 회화는 ‘회화적’, 곧 시각적이다. 중요한 건 더듬어 확인할 수 있는 대상의 고정된 윤곽이 아니라, 눈에 보이는 대로 시시각각 변하는 대상의 외관이다. 그 때문에 윤곽선은 희미해지고 종종 흐르다가 끊기곤 한다. - 평면에서 깊이로 - 닫힌 형식에서 열린 형식으로 르네상스의 회화는 ‘닫힌 형식’이다. 가령 대상들은 안정된 건축적 구조를 이루며 그림 안에서 완결되어 있다. 반면 바로크 예술은 ‘열린 형식’이어서 뭔가 그림이 완결되지 못하고 바깥으로 열려 있는 느낌을 준다. 가령 인물의 배치가 삼각형 구도를 이룬다고 하자. 르네상스 회화에선 삼각형이 전부 그림 속에 들어와 있다. 하지만 바로크 회화에선 종종 꼭지점들이 그림 바깥으로 벗어나 있어, 그림이 바깥으로 무한히 연장될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 다양성에서 단일성으로 르네상스 회화는 ‘다양성’으로 특징지어진다. 즉 대상들은 뚜렷한 윤곽선에 의해 배경과 뚜렷이 구별된다. 반면 바로크 회화는 ‘단일성’이 특징이다. 윤곽이 뚜렷하지 않다 보니, 대상들은 독립성을 갖지 못하고 전체에 녹아들어 있다. 르네상스 회화에선 독립성을 가진 각 부분들의 조화로 통일성이 이루어진다면, 바로크 회화에선 각 부분이 독립성을 잃고 전체 테마에 합류함으로써 이루어진다. - 명료성에서 불명료성으로 르네상스 회화는 ‘명료성’을 갖고 있다. 그림의 각 부분들은 뚜렷한 형태를 갖고 있고, 거기에 모호함은 조금도 없다. 하지만 바로크 회화에선 형태들이 ‘불명료’하다. 형태들은 온전한 모습으로 전개되지 않고, 본질적인 것만 나타내면 그걸로 충분했다. 중요한 것은 전체의 효과이므로 명확한 디테일 묘사는 의미가 없다. 구도, 빛, 색채도 더 이상 형태를 분명히 나타내는 데 사용되지 않고, 그 자체의 삶을 살게 된다고 한다. P.230 이 시기 프랑스에선 푸생이 활약하고 있었다. 푸생과 루벤스는 동시대를 살았지만 전혀 다른 경향을 띠고 있었다. 푸생의 꿈은 고대와 르네상스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그래서 바로크 취향이 유럽을 휩쓸던 17세기에, 프랑스에선 난데없이 고전주의로 ‘리바이벌’이 일어난다. 이는 아마 데카르트 철학과도 관계가 있을 거다. 데카르트는 기하학처럼 명확하고 뚜렷한 지식을 추구했는데, 고전주의 예술이야말로 데카르트 철학의 예술적 구현물이니까. 푸생은 자기가 철저하게 ‘이성’에 따랐다고 믿고 있었다.  고전주의 미학은 르네상스 미학과 큰 차이가 없다. 르네상스가 그들의 이상이었으니까. 미는 질서, 비레, 척도로 표현된다. 미를 보는 건 ‘눈’이지만 미를 평가하는 건 ‘이성’이다. 예술은 자연의 모방이며, 자연은 예술의 모델이다. 예술은 과학이기에 이성과 엄격한 규칙에 따라야 한다. 예술은 중요한 주제와 그 주제를 분명히 드러내주는 명료한 형식을 취해야 한다. 따라서 예술의 생명은 디자인 또는 드로잉이다.   17세기 유럽엔 이렇게 서로 다른 두 흐름이 있었다. 고전주의 예술이 데카르트적 ‘이성’의 예술이라면, 바로크는 무엇보다도 ‘감정’의 예술이었다. 루벤스와 푸생의 그림을 비교해보면, 둘이 얼마나 다른지 금방 알 수 있다. 당시에 비평가들은 둘 중 누가 더 위대하냐를 놓고 격렬한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푸생의 추종자들에게 바로크 예술은 기괴하고 혼란스런 ‘취미의 타락’으로 보였다. 반면 루벤스 편에 섰던 사람들에게 고전주의 예술은 구태의연하고 천편일률적으로 보였을 거다. P.231 독일의 철학자 바움가르텐은 ‘미학’이란 말을 만든 사람으로 유명하다. 그의 가장 큰 업적은 처음으로 인간의 ‘감성’을 학문 연구의 대상으로 삼았다는 데 있다. 가령 인간의 ‘지성’은 인식론에서, ‘의지’는 윤리학에서 연구해왔다. 하지만 이제까지 인간의 감성을 연구하는 학문은 없었다. 여기서 바움가르텐은 새로운 학문을 생각해내고, 거기에 감각을 뜻하는 그리스어 ‘에스테시스’를 본떠 ‘에스테티카’란 이름을 붙였다.   우리는 예술이 감성의 문제라고 생각하나, 르네상스 시대까지만 하더라도 예술은 이상적 작업이었다. 가령 다빈치는 예술과 과학 사이에 아무 차이도 발견하지 못했다. 그러나 바움가르텐은 적어도 예술이 감성의 문제란 걸 앍lㅆ었다. 하지만 감성은 오랫동안 정신을 현혹하고 진리를 왜곡한다고 매도되어왔다. 어떻게 하면 감성의 권리를 회복할 수 있을까? 두 가지 길이 있다. 감성을 이성 ‘아래’ 포섭하든지, 아니면 낭만주의자들처럼 아예 이성 ‘위’에 올려놓든지. 그는 전자의 길을 택했다. 감성도 일종의 이성으로 봄으로써 감성을 복권시키려 했던 거다. 근대 미학은 이 데카르트 정신에서 탄생했다.  데카르트 같은 합리주의자의 이상은 당연히 기하학처럼 ‘명확하고 뚜렷한’ 지식의 체계를 세우는 거다. 원래 ‘명확’하다는 건 어떤 개념이 외적으로 다른 개념과 뚜렷이 구별된다는 뜻이며, ‘뚜렷’하다는 건 그 개념의 내용이 내적으로 명확하다는 뜻이다. 우리는 명확함을 위해선 개념을 분류하고, 뚜렷함을 위해선 개념을 정의한다. P.235 그리고 다른 하나는 ‘명석’하나 아직은 ‘혼연’한 관념인데, 미와 예술이 바로 여기에 속한다. 하지만 미와 예술이 왜 명석하고 혼연하다는 걸까? … 여기서 바움가르텐과 17세기 고전주의 미학의 차이가 드러난다. 고전주의자라면 미와 예술까지도 명석하고 판명한 관념 속에 집어넣었을 테니까. 하지만 이 차이를 과장하면 안 된다. 왜냐하면 그는 감성을 일종의 이성으로, 즉 ‘유사 이성’으로 보기 때문이다. 비록 미와 예술은 어디까지나 감성의 일이지만, 이 감성 자체가 일종의 불완전한 이성이라는 거다.   그 결과 미와 예술은 일종의 인식이 된다. 그건 감성을 이용한 인식, 말하자면 감성적 인식이다. 감성적 인식의 토대를 이루는 건 상상, 기억, 감정 등이다. 과거에 사람들은 감성을 인간 정신을 현혹하는 것으로 매도했다. 바움가르텐이 감성의 권리를 복권시키려 했을 때, 합리주의자로서 그가 택할 수 있었던 유일한 길은 그걸 ‘인식’으로 간주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미와 예술이 일종의 하위 인식 능력이 되었다. 물론 이성에 비하면 이 뚜렷하지 못한 인식은 차원이 낮다. 하지만 이 저급한 인식에도 법칙이 있어, 그걸 학문적으로 연구할 수가 있다. 그게 바로 미학이다. 미학은 ‘감성적 인식의 학’이며 저차의 논리학이다. 하지만 이 저급한 인식이 도대체 어디에 필요한 걸까? P.237 바움가르텐이 보기에, 이 하위의 인식 능력은 이성을 보완하는 역할을 한다. 이성적, 논리적 인식은 추상적 인식이다. 추상이란 글자 그대로 상을 뽑아낸다는 뜻이다. 대상이 가진 개별적 성질이 모두 사라지므로, 추상적 인식엔 ‘생생함’이 없다. 그러니 추상이란 상실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때 감성적 인식은 명석함을 높여줌으로써 이러한 ‘상실’을 보완한다. 관념의 명석함을 높이는 데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그 관념의 의미를 분명히 드러내는 거다. 이를 ‘내포적 명석함’이라고 한다. 또 하나는 그 개념이 지시하는 대성을 제시하는 거다. 사실 인간이 뭔지 구구절절 늘어놓는 것보다 그림 한 장 보여주는 게 훨씬 더 낫지 않은가. 이게 바로 ‘외연적 명석함’이다. 예술은 이 외연적 명석함을 가지고 이성적, 논리적 인식의 추상성을 보완한다. P.237 바움가르텐은 미를 ‘감성적 인식의 완전성’으로 보았다. 그리고 가장 완전한 형태의 감성적 인식을 시에서 찾았다. 왜? 아마도 시인들이 머릿속에 떠오른 희미한 느낌, 연상, 감정을 완전한 형태로 다듬어 독자에게 제시하기 때문일 거다. 어쨌든 그는 고대 수사학의 전통을 따라 시를 감성적 표상, 이 표상들의 연쇄, 분절화한 음성이라는 세 부분으로 구분하는데, 시는 이 모두가 완전할 때 비로소 아름다울 수 있다. 그게 바로 감성적 인식의 완전성이다. ‘감각적 표상’이란 대충 말하면 시가 전달하는 관념이다. 한 편의 시를 읽고 당신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세계의 생생한 표상들 말이다. 바움가르텐에 따르면 시인은 꼭 ‘현실세계’만이 아니라 존재할 수 있는 ‘가능세계’까지도 묘사한다. 말하자면 그는 ‘허구’의 가능성을 인정한 거다. 하지만 예술은 어느 가능세계에서도 불가능한 것(부재적 허구)을 묘사해선 안 된다고 한다. 가령 ‘동그란 삼각형’같은 거 말이다. 그런 논리법칙을 개는 명백한 ‘오류’니까. 세계의 질서를 깨는 이런 불완전한 표상은 시에서 배제해야 한다. 그가 <벨베데레>를 보았다면, 과연 뭐라고 했을까? P.238 시는 이렇게 세계의 완전한 질서를 드러내는 표상들로 이루어진다. 똑같은 길이라도 가능한 한 많은 표상을 불러일으키는 게 좋은 시다. 그럴수록 시는 외연적 명석함을 띠니까. 하지만 이걸로 충분하지 않다. 한 편의 시를 이루려면, 수많은 부분적 표상이 전체 속에 질서정연하게 결합되어야 한다. 하지만 어떻게? 시가 불러일으키는 많은 표상을 하나로 결합하는 것이 바로 ‘주제’다. 주제는 시의 목적이다. 라이프니츠의 ‘충족 이유율’에 따르면, 존재하는 모든 것엔 그것이 존재하는 이유가 있어야 한다. 시의 모든 표상은 주제와 관련을 맺어야 하며, 주제를 명석하게 드러내야 한다. 주제와 관련 없는 표상들은 시 속에 있을 필요가 없다. 그리고 시의 주제는 단 하나여야 한다. 주제가 여러 개라면 모호해질 테니까. P.240 바움가르텐은 감성을 인식으로 간주함으로써 감성을 복권시켰다. 바움가르텐의 가장 큰 업적은 예술이 가진 이 ‘인식적 기능’을 철학적으로 뒷받침했다는 데 있다. 예술을 ‘진리’의 전달 매체로 보는 근대 ‘진리 미학’의 전통은 바로 여기서 비롯되어 헤겔에게서 완성된다. 하지만 예술을 ‘인식’으로 보는 건 어딘가 문제가 있다. 과연 우리는 뭔가를 인식하려고 시를 읽는가?  여기서 또 하나의 노선이 나온다. 이 노선은 영국의 취미론에서 시작되어 칸트에서 완성된다. 이들에 따르면, 미는 ‘인식’이 아니라 ‘쾌감’이며, 예술의 본질은 ‘진리 내용’이 아니라 ‘형식’에 있다. 예술은 ‘이성’의 산물이 아니라 ‘상상력의 유희’며, 예술가는 고정된 법칙에 따르지 않고 ‘영감’에 따라 자유로이 창작을 한다. 이런 생각을 ‘형식 미학’이라 부르기로 하자. 이제 우리는 곧 그 대가를 만나게 될 것이다. P.241 아주 오랫동안 사람들은 미를 선이나 진에, 예술을 도덕이나 종교 또는 철학에 종속시켰다. 하지만 우리는 다르다. 우리는 그저 즐거움 때문에 예술을 감상한다. 하지만 수천 년 동안 사람들은 ‘순수 예술’, 즉 진리나 도덕적 교훈을 주는 예술이 아니면 타락한 것으로 여겼다. 이런 이상한 생각에서 예술을 해방시킨 사람이 칸트다. 예술이 오늘날처럼 자기 고유의 ‘자율성’을 갖게 된 건 순전히 칸트 덕분인데, 우리가 예술에 대해 갖고 있는 생각은 대부분 그에게서 물려받은 거다. P.247 취미 판단은 인식이 아니다. 왜냐하면 미는 사물의 객관적 성질이 아니니까. 취미 판단은 한갓 ‘주관’의 쾌, 불쾌에 대한 판단일 뿐, ‘대상’에 대한 인식이 아니다. 인식이란 어디까지나 사물의 객관적 성질을 파악하는 거니까. 바움가르텐은 이걸 몰랐다. 미는 선도 아니다. 유용성도 아니다. 칸트는 취미 판단의 이런 특성을 멋있게 ‘미적 무관심성’이라고 불렀다. 미적 판단은 ‘단칭 판단’이다. ‘모든 장미는 아름답다’고 하지 않는다. 취미 판단은 동시에 ‘보편 타당성’을 갖고 있어야 한다. ‘보편타당성’이 없다면, 피카소의 작품과 이발소 그림을 구별할 기준도 없어질 테니까. 사실 이 보편타당성 때문에 우리는 마치 미가 대상의 객관적인 속성인 양 얘기하는 거다. 그러나 취미 판단의 보편성은 결국 ‘주관적’ 보편타당성이다. 말하자면 그건 인간 ‘주관’의 구조가 똑 같은 데서 비롯된 현상이다. P.249 우리는 감각기관을 통해 여러 가지 감각 자료를 받아들인다. 풍부한 볼륨, 완만한 곡선, 백옥같이 흰색, 이 다양한 감각 자료를 하나로 모으면 머릿속에 어떤 상이 떠오른다. 이걸 ‘표상’이라고 하자. 다양한 감각 자료를 모아 이렇게 하나의 표상으로 만들어내는 능력을 ‘생산적 구상력(상상력)’이라고 한다. 구성력은 감각 자료를 뜯어맞춰 표상을 만든 뒤 이를 오성으로 가져간다. 오성은 이걸 개념의 상자 속에 집어넣어 판단을 내린다. 이렇게 상상력과 오성이 딱 맞아떨어져 하나의 개념 속에 들어갈 때, 인식이 성립한다. 하지만 취미 판단은 본디 인식이 아니다. 여기서 상상력과 오성은 개념을 만들어낼 필요에 구애받지 않는다. 양자는 서로 조화를 이루며 자유로이 ‘유희’하는 상태에 들어간다. 개념의 틀에 갇혀버리지 않고. 우리는 그저 놀이하듯 그 조화를 즐기면 된다. P.250 아름다움은 사용 ‘목적’과 관계없이 우리에게 만족감을 준다. 미가 존재하는 목적이 있다면, 단 하나 우리 마음에 상상력과 오성의 조화를 불러일으키기 위해 존재한다는 거다. 칸트는 이를 역설적으로 ‘목적 없는 합목적성’이라 불렀다. 미에는 목적이 없다. 다만 우리 마음에 들기 위해 존재할 뿐이다.  사물이 아름다운 건 ‘내용’ 대문이 아니다. 아름다움은 형식에, 말하자면 선들이 그려내는 형태에 있다. 미는 ‘목적없는 합목적성의 형식’, 구체적으로 말하면 자유로운 ‘드로잉’과 구성이다. 여기서 칸트는 완전히 새로운 미학, ‘형식 미학’의 선구자가 된다. P.251 취미 판단은 보편타당하다는데, 왜 우리는 서로 다른 판단을 내리는 걸까? 둘 가운데 하나에 문제가 있어서다. 미는 개념이 아니므로 어떤 게 아름다운 건지 판정할 보편적 규칙은 없다. 그런데도 우리는 우리에게 만족을 주는 대상이 타인에게도 필연적으로 똑 같은 만족을 주리라 믿는다. 왜 그럴까? 우리 모두가 ‘공통감’을 가졌기 때문이다. 칸트는 공통감을 ‘이념’으로 요청한다. 쉽게 말하면 공통감이 ‘있다’가 아니라, ‘있어야만 한다’는 얘기다. P.253 예술은 인위적인 것이 아니라 자연의 산물인 양 자연스러워야 한다. 작가는 작품에 고심한 흔적을 드러내면 안 되고, 자유로이 유희하고 있다는 느낌을 주어야 한다. 물론 고전주의자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이게 배워서 될 일은 아니다. 오직 자연의 천재만이 할 수 있는 거다. 여기서 칸트가 고전주의자와 얼마나 다른지 알 수 있다. 예술을 천재의 소산으로 봄으로써 그는 고전주의 미학과 대립되는 새로운 미학에 길을 열어준다. 바로 ‘낭만주의 미학’이다. 예술가는 더 이상 규칙을 습득하여 자연을 모방하는 ‘장인’이 아니다. 그는 스스로 규칙을 만들어내는 ‘천재’다. P.256  이념은 자신을 쏟아부어 물리화학적, 생물학적 자연을 만들고, 마침내 그 창조의 정점에서 인간을 낳는다. 인간은 특이한 동물이어서 정신을 갖고 있다. 결국 자연 속에서 다시 정신이 탄생하는 셈이다. 인간의 정신은 발전하여 마침내 자연이 이념의 다른 모습이며, 이 모든 게 절대자가 자신을 인식하는 과정임을 깨닫는다. 이때 스스로 자연이 되었던 이념은 원래의 자기로 복귀한다. 이렇게 자신을 인식하려고 스스로 다른 게 되었다가 다시 자기한테 돌아오는 ‘정신의 오디세이’, 이게 바로 우주의 역사다.  헤겔은 이 과정을 ‘논리학’, ‘자연 철학’, ‘정신 철학’이라는 세 부분으로 나누어 고찰한다. ‘논리학’은 이념이 아직 자신을 바깥으로 쏟아붓기 전의 상태를 다룬다. P.272 ‘정신 철학’은 세 단계가 있다. 먼저 ‘주관 정신’이다. 이건 개인들의 의식이 성장하는 과정을 생각하면 된다. 이어서 개인을 초월한 ‘객관 정신’이 등장한다. 이건 어떤 사회적인 정신 원리, 말하자면 도덕이나 법이나 인륜 따위를 말한다. 그리고 이 양자가 종합을 이루는 곳에서 마침내 ‘절대정신’이 탄생한다. 여기서 이념은 더 이상 출발하기 전의 추상적 상태가 아니라, 자신의 가능성을 모두 실현한 구체적 존재가 된다. P.274  절대정신은 다시 예술, 종교, 철학이라는 세 가지 형태로 드러난다. 사실 예술, 종교, 철학은 예부터 인간이 진리를 발견하고 전달하는 주요 수단이었다. 헤겔에 따르면, 이 가운데서 예술은 이념을 ‘감각’의 형태로 드러내고, 종교는 ‘표상’의 형태로 드러내며, 철학은 ‘개념’의 형태로 드러낸다. 예술에서 종교로, 종교에서 다시 철학으로. 이 운동의 마지막 단계인 철학에서 마침내 이념은 기나긴 여행을 마치고 자기한테 돌아가는데, 헤겔은 이 여정이 자기 머릿속에서 끝났다고 믿었다. 자기가 절대지에 도달했다는 거다. 얼마나 대담한 생각인가. P.274  예술은 절대적 진리를 드러내는 매체다. 헤겔은 이렇게 이념이 예술 속에서 감각적 형태로 드러난 게 곧 ‘미’라고 보았다. 진정한 미란 곧 예술미다. 물론 예술 밖에도 미는 있다. 가령 자연의 아름다움 말이다. 하지만 헤겔이 보기에 자연은 이념의 그림자일 뿐 아직 주관성에 도달하지 못했기 때문에, 자연의 아름다움은 완전한 게 못 된다. 이런 자연미의 결함에서 예술미의 필연성이 나온다. 예술은 자연미의 결함을 제거해 완전한 아름다움을 만들어낸다. 특히 불순물이 섞이지 않은 순수한 형상 속에서 이념이 빛날 때, 헤겔은 이를 이상이라 했다.  그리스인은 이상적인 아름다움을 추구했다. 가령 파라시오스는 아프로디테를 그릴 때, 여섯 명의 아름다운 여인을 모델로 삼아, 각 사람에게서 가장 아름다운 부위를 따왔다고 한다. 아무리 아름다워도 현실의 모델에겐 어딘가 불완전한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그는 이런 방식으로 현실의 모델이 가진 결함을 제거하고, 불순물이 섞이지 않은 순수한 형태를 창조할 수 있었다. 이 순수한 아름다움 속에 빛나는 이상적인 아름다움, 이게 바로 헤겔이 말하는 이상이 아닐까? P.277 헤겔은 이념이 감각적 형상과 관련을 맺는 양상에 따라 예술의 발전을 다시 세 가지 단계로 나눈다. 상징 예술, 고전 예술, 낭만 예술이 그것이다. 먼저 상징 예술은 이념이 충분히 성숙하지 않아 물질적 매체에 압도당할 때 발생한다. 고대 동방과 이집트의 조각들이 바로 이 시기에 속한다. 영혼은 아직 육체의 모든 부분에 생명을 두루 불어넣을 정도에 이르지 못했다. 내용과 형식이 통일을 이루지 못해 예술은 뭔가 ‘숭고’한 느낌을 준다. 충분히 성숙하지 못한 이념은 자신을 분명히 드러내지 못하고 어렴풋하게 암시만 할 뿐이다. 그 때문에 예술은 수수께끼 같은 성격을 띠고 일종의 상징이 되어버린다. 이념이 더 성숙하면 상징 예술은 종말을 고하고 고전 예술이 시작된다. 이제 이념은 충분히 구체적으로 되어, 감각적 형태로 직접 모습을 드러낸다. 여기서 이념은 감각적 매체와 완전한 조화를 이룬다. 이 시기는 구체적으로 말하면 그리스 시대다. 헤겔은 이상적 아름다움이 그리스 조각에서 완전히 실현되었다고 믿었다. 말하자면 그리스 예술에서 정점에 도달했다는 거다. 여기서 헤겔 미학의 고전주의적 성격이 여실히 드러나는데, 이는 아마 빙켈만의 영향 때문일 거다. 사실 상징 예술에서 고전 예술로의 변화를 설명하는 헤겔의 논리도 빙켈만의 얘기와 똑같다.   정신은 더욱더 성장한다. 그리하여 마침내 물질적 매체를 압도하기 시작한다. 이제 이념은 너무 자라서 형상과 조화로운 통일 속에 머물러 있을 수가 없다. 물질적 매체는 더 이상 이념을 드러내기엔 적합하지 않다. 여기서 이념과 형상의 통일은 다시 한 번 파괴된다. 이념은 감각적 매체 속에 머무르기를 거부하고, ‘표상’으로 표현되기 시작한다. 예술은 바깥세계에서 서서히 인간 내면의 정신세계로 옮아간다. 이때 기독교적 근대의 낭만적 예술 형식이 탄생한다. 여기서 말하는 낭만 예술은 특정한 예술 사조로서의 낭만주의가 아니라, 중세는 물론이고 고전주의, 바로크, 낭만주의 등 고대 그리스 이후의 모든 예술 사조를 가리킨다. 예술의 시대는 저물어가지만, 정신은 한층 더 높은 단계에 이른다. P.278 동시에 헤겔은 상징 예술, 고전 예술, 낭만 예술이라는 삼분법을 여러 예술을 체계적으로 분류하는 기준으로 사용했다. 이에 따르면 건축은 대표적인 상징 예술이고, 조각은 전형적인 고전 예술이며, 회화와 음악과 시는 낭만 예술의 주요 장르라고 한다. 좀 지나친 단순화이긴 하지만, 이는 어느 정도 역사적 사실과도 부합한다. 실제로 고대 동방 예술은 주로 건축을 중심으로 발전했고, 그리스 예술은 조각을 중심으로 발전했으며, 회화와 음악과 시는 근대에 들어와 뚜렷한 발전을 보여주지 않았던가. 이런 걸 유식한 말로 ‘논리적인 것과 역사적인 것의 통일’이라 부른다. P.278 벨베데레>라오콘>라오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