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중권의 서양미술사 후기 모더니즘과 포스트 모더니즘 편 - 진중권

종전 후 세계 미술의 주도권은 유럽에서 미국으로 넘어간다. 한때 전 세계 예술가들을 끌어 모았던 파리를 제치고 이제 뉴욕이 세계 미술의 수도로 떠오른다. 미국은 파시즘의 위협에서 유럽의 민주주의를 정치적으로 구원했고, 마셜 플랜을 통해 유럽의 경제적 부흥을 도와주었으며, 전쟁 후의 미소 냉전구도 속에서 유럽의 자유주의를 군사적으로 지켜주었다. 전쟁으로 폐허가 된 유럽은 정치적,경제적,군사적 측면에서 미국의 강력한 영향 아래 놓인다. 문화 역시 이 분위기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이 과정에서 생긴 가장 중요한 변화는 예술의 탈정치화다. 전쟁 전의 아방가르드는 주로 혁명운동과 연대했다. 하지만 미국의 현대미술은 1930년대에 횡행하던 이전까지의 좌익 선동에 대한 지지를 포기하고, 인간의 자유를 위함으로 탈바꿈한다. 예술이 공개적인 사회적 표현을 삼가고, 개인의 자유를 표방하게 된 것이다. 

<아방가르드와 키치="">(1939)에서 클레멘트 그린버그는 이미 아방가르드를 순수 형식주의적으로 규정한 바 있다. 거기에는 물론 스탈린주의로 전락한 소련의 사회주의에 대한 실망이 깔려 있다. 하지만 이 탈정치화는 다른 한편으로는 미국의 보수적 분위기에 강요된 것이기도 하다. 모더니즘 운동의 주도자들은 대부분 좌익이었기 때문에 보수적인 미국 사회에 모더니즘을 소개할 때, MoMa의 관장 알프레드 바는 이 새로운 미술이 정치적으로 전혀 위험하지 않다는 사실을 강조해야 했다. 그 결과 현대 미술은 ‘아방가르드’로서 가졌던 정치적 급진성을 제거하고, 그것을 오로지 예술 ‘형식의 혁신’으로 규정하게 된 것이다.  이로써 미국 화가들의 실존주의는 철저히 개인주의적인 것이었다. 그들은 사르트르의 정치적 실존을 개인주의적 서사로 바꾸어놓았다. P.18 돈데로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미국 미술은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단순한 방식으로 아름다운 우리나라를 찬양하는”예술이었다. 하지만 약간의 예술적 교양을 갖춘 사람이라면, 이야말로 전체주의 예술, 즉 나치와 공산주의 예술의 특성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때문에 ‘미국에 침투한 공산주의 예술’로 여겨지던 추상표현주의가 졸지에 자유 진영을 대표하는 양식으로 호출된 것이다. 이것이 추상표현주의의 역설이다. 그린버그는 전통적 회화와 구별되는 아방가르드 회화의 특징은 “사실적인 원근법적 공간을 만들기 위해 구멍을 파내려는 노력을 거부”하는 데 있다고 보았다. “그림의 면 자체가 점점 더 얕아져서 깊이의 효과를 내는 가상의 면들이 실제 캔버스의 표면인 진짜 물질 면 위에서 하나로 만날 때까지 평면화되고 압착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그린버그의 ‘평면성의 원리’이다. <모더니즘 회화="">에서 그린버그는 칸트를 원용하여 자신의 모더니즘 이론을 철학적 수준으로 끌어 올린다. 여기서 그는 자기비판 혹은 자기반성을 현대성(모더니티)의 기준으로 제시한다. 칸트가 이성을 비판하기 위해 이성을 사용했듯이, “모더니즘의 본질은 어떤 분야 그 자체를 비판하기 위하여 그 분야의 특징적 방법들을 사용하는 데 있다.” 또한 예술의 영역에서 각 예술의 효과들 가운데 다른 예술로부터 빌려왔다고 여겨지는 효과를 제거하여 예술의 순수성을 지향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로써 각 예술의 독자성과 질적 수준을 보장받게 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그린버그에게 모더니즘은 더 이상 과거와의 단절이 아니라, 마네와 인상주의에서 출발하여 세잔과 입체주의를 거쳐 추상표현주의에 이르는 연속적 운동일 뿐이다. 모더니즘 회화의 ‘질적 수준’을 평가하는 기준도 회화의 순수성을 향한 이 목적론적 운동의 연장선 위에서 얻어질 것이다.  하지만 이는 모더니즘에 대한 지극히 일면적인 이해에 불과하다. 그린버그에게 모더니즘은 피카소의 입체주의에서 추상표현주의로 이어지는 순수화, 추상화의 과정일 뿐이다. 하지만 전전의 모더니즘에는 추상운동과 나란히 또 하나의 흐름이, 말하자면 삶과 예술의 경계를 무너뜨리려는 아방가르드의 반미학적 충동이 존재했다. 뒤샹이 그러하다. 그러나 그린버그는 그의 존재에 끝까지 눈을 감으려 했다. 하지만 그린버그의 의지와 상관없이 현대미술에 내재한 반미학의 충동은 결국 발현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1950년대 말에 미국의 추상 운동은 그 정점에 도달한 후, 그린버그의 형식주의 비평이 허용할 수 있는 한계 너머로 발전한다. 그린버그는 끝까지 회화가 회화이기를 원했다. 즉 회화가 회화이려면, 비록 원근법적 가상은 아닐지라도 적어도 미적 가상으로 남아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폴록 이후에 미국의 회화는 환영주의를 파괴하고 순수성과 평면성을 향하는 미적 가상의 영역을 벗어나 아예 사물의 영역으로 진입한다. 환영주의를 완전히 떨쳐버리려면, 회화가 미적 가상이기를 포기하고 그 자체가 사물이 되는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P.24 이를테면, 미니멀리즘은 작품을 사물로 만들었고, 개념미술은 미술을 문학으로 만들었으며, 팝아트는 키치를 예술의 영역으로 끌어들였다. 이 추세를 막을 수는 없었다. 1968년 이후 그린버그는 결국 비평 활동을 사실상 중단하게 된다. 마이클 프리드의 에세이 <예술과 사물성="">(1966)은 예술의 사물화 경향에 대한 형식주의 비평의 마지막 반격이라고 할 수 있다. 미니멀리즘 미술은 회화도, 조각도 아닌 ‘사물성’을 지향한다. 미술이 일종의 사물이 되어 현전의 효과를 낼 때, 그것은 관객의 참여를 요구하는 연극에 가까워진다. 이는 물론 회화는 회화여야 한다는 그린버그의 모더니즘 강령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다. 프리드에 따르면, 이렇게 ‘연극적 조건에 접근할수록 예술은 퇴보한다.’ 따라서 미술의 성공과 생존은 ‘연극을 부정할 수 있는 능력’에 달려 있으며, 작품의 ‘질과 가치’를 따지는 기준도 미술이 미술로 남을 때에만 얻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로잘린드 크라우스는 이 모더니즘의 공격에서 미니멀리즘을 방어한다. 그녀의 접근 방법은 현상학적이다. 즉 형식주의에서는 작품을 지각하는 주체가 순수 관념적 존재로 상정되나, 미니멀리즘의 지각은 신체를 움직여 작품과 상호작용하는 육화된 주체를 요청한다. 그리하여 미니멀리즘의 지각에는 필연적으로 시간성이 개입된다. 크라우스는 이 연극적 특성을 아예 모더니즘으로 역투사하여, 모더니즘 조각의 역사를 아예 ‘정적이고 관념화된 매체로부터 시간적이고 물질적인 매체로 전환’하는 과정으로 설명한다. 이 경우 미니멀리즘의 ‘연극성’은 모더니즘으로부터의 일탈이 아니라 그것의 정상적 진화가 될 것이다. …… 사실 그린버그와 프리드의 형식주의는 모더니즘 미술을 설명하기에는 지나치게 협소한 것이었다. P.27 그린버그와 프리드의 형식주의에 결정적 타격을 입힌 또 하나의 흐름은 팝아트였다. 1992년 여름, 그린버그는 미국의 미술계에 ‘지난 30년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린버그가 이렇게 팝아트를 백안한 데에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첫째, 팝아트는 구상회화로, 자신의 바깥에서 제재를 취한다. 이는 회화가 오직 자기 자신만을 탐구해야 한다는 모더니즘의 강령에 위배된다. 둘째, 팝아트는 일상 사물과 시각적으로 잘 구별되지 않는다. 그로써 작품의 미적 수준을 가늠할 비평적 기준이 사라진다. 셋째, 팝아트는 대중문화를 고급문화로 끌어들인다. 그린버그의 눈에 이는 고급예술을 ‘키치’로 전락시키는 것으로 보였을 것이다. 레오 스타인버그는 라우센버그의 콤바인, 뒤비페의 그래피티, 리히텐슈타인의 만화 그림 등이 ‘팝아트’로 이어지는 과정을 설명하기 위해 ‘평판화면’의 개념을 도입한다. 팝아트를 주도한 작가들은 디자이너, 일러스트레이터, 만화가 등 다양한 상업미술의 배경을 갖고 있었다. 수직으로 세운 캔버스 앞에서 작업을 하는 전통 화가와 달리, 상업미술가들은 수평의 작업대 위에서 작업을 한다. 이것이 ‘평판화면’이다. …… 이를테면, ‘테이블 윗면, 스튜디오 바닥, 게시판과 같은’ 평판화면은 ‘오브제가 배열되거나, 데이터가 기입되거나, 정보가 수신, 인쇄, 각인된느 수용기’다. 이처럼 평판화면 위에서 제작되는 이미지는 일종의 메타 코드, 즉 자연의 그림이 아니라 자료와 정보의 그림이다. 스타인버그는 여기서 르네상스 이후 최초로 회화의 주제가 자연에서 문명으로 이행한다고 주장한다. P.31 재스퍼 존스의 성조기 그림, 앤디 워홀을 비롯한 팝 아티스트들의 이미지는 직접 자연을 그린 것이 아니라, 만화나 사진 등의 시각 정보를 메타코드로 취한 것이다. 스타인버그의 논리에 따르면, 팝아트는 모던 이전으로의 퇴행이 아니라, 르네상스 이후 500년 미술사에 종지부를 찍은 거대한 ‘사건’인 셈이다.  거창하지는 않지만, 철학자 아서 단토 역시 팝아트를 ‘획기적’ 사건으로 규정한다. 그에게 모더니즘은 그저 ‘1860년경부터 1880년대의 어느 때까지 번성했던 하나의 양식’일 뿐이다. 팝아트는 그 <예술의 종말="">(1984)을 가져왔다. 종말을 맞은 것은 물론 예술 자체가 아니라 모더니즘의 ‘내러티브’였다.  모더니즘은 단선적인 ‘진보’를 상정한다. 그리하여 모더니즘의 내러티브는 회화가 인상주의에서 입체주의, 거기서 추상표현주의로 나아가면서 더욱더 순수해진다고 말한다. 하지만 팝아트는 이 모던의 서사를 무너뜨린다. 동시대 예술은 존재하기 위해서 ‘이야기 전개 과정상 적절한 다음 단계로 보일 수 있는 모종의 확증적 내러티브에 더 이상 힘입지 않아도 된다.’ 모더니즘은 ‘새로움’을 위해 과거와 결별하려 하나, ‘동시대 미술에는 과거의 미술에 반대하는 지침 같은 것이 없으며, 과거라는 것은 그에 대항해서 해방을 쟁취해야 하는 것이라는 생각도 없고, 심지어 자신이 미술로서 일반적으로 모던 미술과도 다르다는 의식도 전혀 없다.’  모더니즘 예술은 ‘타자들을 배제하는 단일한 내러티브’를 갖고 있어, 저마다 자신만이 진정으로 새롭다고 주장할 수 있었다. 하지만 ‘선언문의 시대’는 끝이 났다. 오늘날 다른 것을 제치고 자신만이 역사적 위임을 받았다고 주장할 수 있는 예술 형식은 존재할 수 없다. 팝아트 이후 이렇게 변화한 예술의 상태를 단토는 ‘탈역사적’이라고 부르자고 제안한다. 미술이 취할 수 있는 역사적 방향 같은 것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P.32 아서 단토의 관념은 다분히 ‘포스트모던’이라고 부르는 1980년대의 다원주의적 분위기를 1960년대의 팝아트로 투사한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는 모종의 시대착오가 존재한다. 단토는 동시대 예술의 상황을 ‘완전한 미적 엔트로피’로 규정한다.  …… 리히터는 양식의 ‘엔트로피’ 상태에서 구상과 추상, 사진과 회화의 경계를 수시로 넘나든다. 그가 ‘포스트모턴’의 작가라고 불리우는 것은 그 때문이다. 하지만 워홀을 비롯한 팝 아티스트들에게서는 정작 이런 양식의 다원주의를 찾아볼 수 없다. 그들은 대부분 ‘팝아트’의 전형적 양식을 끝까지 견지했다.   따라서 팝아트가 그린버그식 모더니즘의 종언일지는 모르나, 그것이 ‘모더니즘’일반의 종언이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팝아트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차라리 뒤샹에서 유래하는 네오 다다의 제스처다. 그런 의미에서 팝아트는 입체주의에서 추상표현주의로 이어지는 노선에 가려져 있던 모더니즘의 또 다른 노선, 이른바 ‘네오 아방가르드’에 속하는 여러 흐름 중 하나로 볼 수 있을 것이다. 1960년대 전후 예술을 이렇게 ‘네오 아방가르드’로 규정할 때, 자기 정당화의 문제가 떠오른다. ‘이미 흘러간 아방가르드를 이 시대에 뒤늦게 반복하는 게 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리하여 페터 뷔르거와 같은 이는 네오 아방가르드의 효용성을 회의한다. P.34  아방가르드는 사실 전전의 아방가르드와는 전혀 다른 맥락에 놓여 있었다. 아방가르드는 사실 ‘상황주의’를 제외하면, 전후에 아방가르드라고 불릴 만한 운동은 존재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팝아트는 체제에 순응적이었고, 플럭서스는 거기에 모호한 태도를 취했다.   할 포스터는 정신분석의 용어로 네오 아방가르드를 옹호한다. ‘하나의 외상을 이루기 위해서는 두 가지 외상이 있어야’ 하듯이, ‘하나의 사건은 그것을 기록하는 또 다른 사건을 통해서만 등재’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네오 아방가르드는 억압에 저항하는 반복 강박으로 규정된다. …… 실패한 역사적 아방가르드를 반복함으로써 네오 아방가르드는 비로소 자신에 대한 비판적 분석과 제도의 해체 실험을 본격적으로 실행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 ‘반복’은 과거로의 복귀가 아니다. P.35 1960년대에 복귀한 재현의 여러 흐름 중에서 훗날 ‘포스트모던’이라고 불릴 만한 경향은 독일에서 일어났다. 이 흐름을 주도한 것이 동독 출신의 화가들이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 리히터가 현실에 냉정한 판단중지를 실천한다면, 폴케는 패러디와 메타패러디를 통해 현실에 반어적 태도를 취한다. 이렇게 ‘아이러니를 현실에 대한 본질적 태도로 취하고, 콜라주 기법을 세계의 세계화를 위한 가장 편한 언어로 사용’한다는 점에서 폴케의 태도는 단적으로 포스트모던하다. P.37 - 폴록 폴록이 이젤을 사용하지 않은 것은 “현대적 감각의 경향이 벽화를 지향”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의 작품은 그림이라기보다 차라리 벽지처럼 보인다. 벽지가 화면이자 동시에 벽면이듯이, 그에게서 액자 안(3차원의 환영)과 밖(2차원의 벽면)의 구별은 흐려진다. 물론 그의 작품도 프레임에 씌워진 채로 미술관 벽에 걸릴 것이다. 그 때문에 그는 자신의 작업을 이젤에서 벽화로 이행하는 ‘과도기의 상태’라고 보았다. 화면에서 전후좌우의 구별이 사라지면 화면은 마치 무중력 상태처럼 느껴진다. 그의 작품에서는 동일하거나 유사한 요소들이 ‘눈에 띄는 변화 없이 캔버스의 한쪽 끝에서 다른 끝까지 되풀이’된다. 그리하여 ‘시작도, 중간도, 끝도 없는 종류의 그림.’ 그런 그림을 흔히 ‘전면화’라고 부른다. P.42 폴록은 물감을 찍어 화폭 위로 흘리는 데 사용한다. 때로 그는 염료 깡통에 구멍을 내어 직접 화면에 흘리기도 했다. 이것이 이른바 ‘드리핑’기법이다. 그는 젊은 시절에 접촉한 멕시코 벽화의 거장들에게서 배웠다.  그의 화면에는 우연의 외관 속에 고도의 미적 질서가 존재한다. 외려 ‘자의적인 것으로 연상되는 것과 감지될 정도로 실재하는 미적 질서 사이의 긴장’에 그의 강점이 있다. 그렇다고 해서 이 질서가 의식적 통제의 산물인 것은 물론 아니다. 그것은 차라리 그의 내적 본성에서 흘러나오는 ‘영감, 비전, 직관적 결정’의 산물이다. …… 여기서 회화는 작품이 아니라, 무의식으로부터 발생하는 ‘사건’이 된다.  폴록이 처음 작품 활동을 시작했을 때, 미국의 미술은 유럽으로부터 입체주의와 초현실주의라는 두 개의 유산을 상속 받은 상태였다. 구대륙에서 물려받은 이 두 가지 유산은 1940~50년대 미국 화가들의 창작을 이끌어주는 원리이자, 동시에 그들이 만든 작품을 해석하는 준거이기도 했다. 이를테면, 폴록의 작품은 유럽의 입체주의에서 시작된 ‘추상’의 극한을 보여준다. 거기에는 식별 가능한 대상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유럽의 모더니즘에는 그나마 기하학적 형태라도 남아 있었지만, 폴록의 화면에서는 ‘형태’마저 해체되어 있다.  한편, 폴록의 격렬한 제스처는 초현실주의에서 유래한 ‘표현’의 요소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즉흥적 화법은 앙드레 브르통의 ‘자동기술법’을 연상시킨다. 또 제 그림의 원천이 ‘무의식’에 있다고 말한 데서 알 수 있듯이, 폴록은 자기가 초현실주의의 연장선 위에 있다고 믿었다.   이 두 유산이 모순적으로 결합된 이 새로운 회화를 평론가 로버트 코츠는 ‘추상표현주의’라고 불렀다. 입체주의의 추상과 초현실주의의 표현적 제스처. 하나의 이름 속에 다소 무리하게 결합된 이 두 개의 유산은 당연히 추상표현주의의 성격에 관해서도 대립되는 두 가지 해석을 낳는다. 이 새로운 미국 회화의 본질은 추상인가, 아니면 표현인가? 거기서 중요한 것은 ‘작품’인가, 아니면 ‘과정’인가? P.48 이 두 해석 중에서 그린버그는 전자를 대표한다. ‘추상미술의 역사적 정당성’을 주장한 기념비적 에세이 <더 새로운="" 라오콘을="" 향하여="">(1940)에서 그는 아방가르드 운동의 두 단계를 지적한다. 그 발전의 첫 단계에서 예술을 오염시키는 관념을 추방하고, 둘째 단계에서는 다른 장르에서 온 효과마저 배제함으로써 아방가르드 예술은 스스로 ‘순수’해진다. 여기서 ‘순수’해진다는 것은 예술이 자기 매체의 고유성으로 돌아간다는 뜻으로, 회화에서라면 화면에서 3차원 공간의 환영이 사라지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그 유명한 ‘평면성’원리다. 이 생각은 <모더니즘 회화="">(1960)에서도 변함없이 계속된다. 그는 칸트에 의거하여 모더니티의 요체가 ‘자기비판’에 있다고 말한다. 자연을 탐구하기 전에 이성으로 이성의 한계부터 비판한 칸트처럼, 회화 역시 자연의 묘사에 앞서 자신의 매체부터 탐구해야 한다. 그리하여 모더니즘 회화는 ‘그림 표면의 불가피한 평면성’을 강조하는 가운데 ‘3차원 대상이 담길 수 있는 공간의 재현’을 단념한다는 것이다. 그린버그에 따르면, 새로운 미국의 화가들은 여전히 프랑스 회화, 특히 후기 입체주의의 노선을 이어가고 있다. 그리고 그 연장선 위에서 추상의 새로운 기원을 연 것이 바로 폴록이라는 것이다. 폴록의 작품에서는 선과 면의 구별, 형태와 배경의 대조, 화면 안과 밖의 구획이 무너진다. 형태마저 해체되어 요소들이 화면 전체에 균등히 배분된다. 이 엔트로피의 화면, 그것이 폴록의 ‘올 오버 드립 페인팅’이다. 평론가 해럴드 로젠버그 역시 ‘추상표현주의’라는 명칭을 좋아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린버그와는 정반대의 이유에서였다. 그는 외려 그 명칭에 ‘새로운 미국 회화가 입체주의적 추상의 연장’이라는 뜻이 담겨 있다고 보았다. 그가 보기에 이는 전후 미국 회화의 본질을 심각하게 왜곡하는 것이다. 새로운 미국 회화의 요체는 추상이 아니라 행위에 있으며, 거기서 중요한 것은 ‘작품’이 아니라 ‘과정(행동)’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는 이 새로운 흐름을 ‘액션 페인팅’이라고 부를 것을 제안한다.  폴록의 ‘작품’만 보면 누구나 그린버그의 ‘평면성 원리’에 동의할 것이다. 하지만 폴록의 ‘과정’을 담은 나무스의 사진을 보면 직관적으로 로젠버그의 해석에 끌리게 된다.  이런 해석은 1950년대에 유럽에서 유행하던 실존주의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회화는 화가의 실존이 본질에 도달하려고 재료와 고투를 벌이는 투기장이다. 그 고투를 통해 화가는 진정한 자신을 되찾는다. 회화의 본질이 제작이 아니라 행위에 있다면, 그려진 그림 자체는 중요하지 않다. 물감 덮인 화면은 순전히 ‘개인적 제스처의 유아론적 기록’으로 잔존할 뿐이다.   로젠버그은 이렇게 그린버그의 형식주의적 해석에 자신의 실존주의적 해석을 대립시킨다. 그린버그는 추상표현주의를 시각상의 조건으로 돌아가려는 ‘순수회화’로 보았다. 하지만 로젠버그가 보기에 새로운 미국 회화는 순수하지 않다. 거기에서 대상이 사라진 것은 물론 사실이나, 문제를 ‘대상을 지워버리는 ……동기’다. 그가 보기에 추상표현주의가 대상을 지워버린 것은 전혀 다른 이유에서였다.   결국 폴록은 고전적 의미의 추상이 아니라 애초에 비구상을 추구했다는 얘기다. 게다가 추상표현주의는 순수하지도 않다. 주제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화가의 실존적 고투’ 이것이 새로운 미국 회화의 주제이며, 또한 그것이 순수 형식으로서 예술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1947~1950년의 전성기를 거친 후, 폴록은 갑자기 초기의 흑백 구상으로 돌아간다. …… 폴록의 작업은 처음부터 ‘구상/비구상의 이원적 대립 구도’를 가지고 ‘불특정한 형상을 올 오버 페인팅의 선형적 매트릭스 안에 침투’시키는 데 요체가 있었다는 것이다.  뉴먼의 말대로 ‘주제는 대상이 아니다.’ 지시체가 없다고 주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폴록은 ‘색 대 선, 면 대 윤곽, 비물질 대 물질의 대립 구조’를 통해 작업을 했다. 그때 ‘선이 색이 되고, 윤곽이 면이 되고, 물질이 빛이 되면서 잠정적으로 이루어지는 대립물의 통일’이 나타나는데, 그것이 바로 폴록의 주제라는 것이다. P.58 클라크는 폴록의 작업을 ‘회화를 일종의 글쓰기로 만들어 우리가 전에 읽어보지 못한 문서를 쓰는 것’이라고 본다. 그것의 기호학적 특성을 상징으로 간주하는 셈이다. 반면, 크라우스는 폴록의 작품을 상징이 아니라 지표로 간주한다. 그녀는 지표로서 폴록의 흔적을 ‘수직에 대한 수평의 저항’으로 해석한다. 폴록은 작품에 못이나 꽁초, 버튼, 모래 등 쓰레기를 집어넣곤 했는데, 이 지저분한 재료의 물질성이 ‘형상의 형성에 저항’하면서 그의 작품을 ‘무정형’으로 만들어준다는 것이다.   폴록의 작업에서 그녀는 형상에서 물질로 회귀하려는 죽음의 충동을 읽는다. 문명은 수직을 지향하나, 자연은 수평을 지향한다. 바닥에 깔린 화포 위를 어슬렁거리는 폴록의 모습은 마치 땅에 코를 박고 돌아다니는 짐승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이 해석은 폴록을 은연중에 무정형한 물질의 취향을 가진 혐오예술의 선구로 만들어버린다. …… 하지만 이는 과잉해석으로 보인다. 클라크에 따르면, 폴록은 자신의 작품이 벽에 수직으로 걸린 상태로 감상되기를 원했기 때문에 그것은 결코 폴록의 의도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로써 폴록의 표현적 제스처는 ‘해프닝’이라는 행위예술의 선구가 된다.  앵포르멜 폴록이 미국에서 격렬한 표현적 제스처로 형 자체를 붕괴시키고 있을 때, 유럽에서는 ‘앵포르멜’이라는 흐름이 미국 추상표현주의의 카운터파트 역할을 하고 있었다. 형태에 대한 공격, 물질성에 대한 관심, 즉흥적 화법, 표현적 제스처 등은 전전의 기하학적 추상과는 분명히 구별되는 전후 표현적 추상의 특징을 보여준다.  그린버그는 ‘표면의 평면성’과 화면의 ‘균등성’이라는 면에서 두 화가가 같은 방향을 지향한다고 본다. 하지만 그의 눈에는 뒤비페가 폴록만큼 급진적으로 보이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사실 뒤뷔페는 완전히 구상을 떠나지도 않았고, 여전히 ‘이젤’이라는 가상의 프레임을 고수했기 때문이다.  이는 물론 형식주의적 오독 내지 편견이다. 미국에서는 정치적 관심에서 벗어나 순수추상을 지향하는 것이 곧 정치적 아방가르드였다. 하지만 프랑스의 앵포르멜은 역사적 외상에 대한 일종의 심리적 방어였다. 그린버그의 형식주의적 시각은 앵포르멜 운동이 지닌 이 정치적, 미학적 함의를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다. 장 포트리에 독일군의 점령 기간에 레지스탕스에 가담한 혐의로 게슈타포에 체포되었다가 풀려난 후 파리 외곽의 요양원에 숨어 지내던 중, 밤마다 처형과 고문의 소리를 들음. 전시작들은 그 소리에 병적으로 영감을 받은 일련의 두상과 토르소들로 이루어져 있다. 인간의 신체가 파우더와 같은 물질로 분해되는 모습은 심지어 ‘변태적으로 에로틱한 효과’를 내기도 한다. 여기서 회화는 ‘거친 물질성과 무정형의 미학’으로 나아간다.  볼스 강제수용소에 수용되나, 1940년 탈출하여 마르세유 근처에 숨어 드로잉과 수채화를 그리며 지낸다. 이 시기에 제작된 그의 작품들은 초현실적 분위기 속에서 이미 무정형에 대한 취향을 드러낸다. 1947년 화랑에 전시된 40점의 유화 작품들은 드리핑, 스크래칭 등 전형적인 ‘앵포르멜’의 특징을 본격적으로 드러내기 시작한다. ‘형태’를 허물고 ‘물질’을 드러내는 것이 당시로서는 도발이었던 모양이다. 1946년 뒤비페의 전시회는 1905년 야수주의 스캔들에 버금가는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비평가 앙리 장송은 전시회를 보고 ‘다다이즘은 카카이즘이다’라고 썼다. 화면에 두껍게 발린 물감 층의 물질성이 그에게는 ‘대변’을 연상시킨 모양이다.  세 화가의 공통점은 형태를 해체하고 물질로 돌아가려는 충동이다. 물론 그 충동에는 2차 세계대전, 모던에 대한 환멸, 문명의 위선이라는 배경이 깔려있다. 이러한 반발은 곧 ‘문명의 이전’, ‘이성의 타자’, ‘형태의 이전’에 대한 취향으로 이어진다. 이 무정형의 취향을 바타유는 ‘기저 유물론’으로 해석했다.  뒤비페는 거친 예술이라는 뜻에서 ‘아트 브뤼트’라고 불렀다. 그의 그림이 종종 숙련이나 솜씨가 없는 아마추어의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어린아이나 정신병자처럼 ‘순수하고, 기본적이며, 창작자 자신의 충동에만 이끌리는 예술’을 지향했기 때문이다.  ‘아트 브뤼트’로 규정할 경우, 뒤비페의 작품은 표현주의나 초현실주의의 전통에 귀속될 것이다. 한편 뒤비페나 볼스와 비슷한 경향의 작품을 가리키는 데 ‘타시즘’이라는 용어가 사용되기도 한다. ‘타시’는 얼룩을 의미하는 용어로, 두꺼운 물감을 덕지덕지 발라 만든 얼룩과 같은 작품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이 명칭은 대개 전후 프랑스의 추상을 미국의 추상표현주의와 비교하는 맥락에서 사용된다. ‘타시즘’으로 규정될 경우, 그들의 작품은 무엇보다도 일종의 지표로, 말하자면 폴록의 작품처럼 예술가의 손이 지나간 ‘흔적’ 혹은 ‘자국’으로 간주될 것이다. 앵포르멜에는 ‘형을 부정한다’는 뜻이 담겨 있다. 여기서 안료는 ‘시각적 환영’보다는 ‘촉각적 질감’의 효과를 낸다. 이 무정형의 충동이야말로 이들의 작품을 초현실주의는 물론이고, 추상표현주의와도 적절히 구별시켜줄 것이다.  뒤비페가 ‘아트 브뤼트’에 관심을 가졌던 것은 정신병자나 어린아이들의 예술에 문명 이전의 원초성이 남아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리라. ‘금지된 것과 허용된 것’ 혹은 ‘고상한 것과 저급한 것’의 구별. 뒤비페의 작품에는 이 구별 이전으로 돌아가려는 ‘퇴행’충동이 존재한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이 바타유의 ‘기저 유물론’이다. 대부분의 유물론들은, 비록 그것들이 영적 실체를 없애기를 바랐더라도, 종국에는 사물의 질서를 세우고 말았다. 그 질서의 위계적 관계가 그것을 결국 관념론적인 것으로 만들어버린다. 바타유는 이 자의적 구별들을 없애고, 그 구별로 세워진 위계들을 무너뜨리고 원래 하나였던 물질의 상태로 돌아가자고 주장한다. 바타유는 처음부터 물질을 ‘저 자신의 영원한 자율적 존재를 갖는 능동적 원리’로 본다. 즉 물질은 정신으로부터 형태를 빌려 입는 소극적 존재가 아니라, 그 자체가 형태를 산출한 가능성을 내재한 적극적인 힘이다. 앵포르멜의 화면에서 우리는 바로 이 창조적 힘으로서 ‘물질’을 본다.  앵포르멜의 다른 의미는 ‘형태를 집어넣는다’는 뜻이다. 즉, 형태 없는 물질은 그 운동의 ‘종착지’가 아니라 새로운 조형점의 ‘출발점’일 것이다. 뒤비페는 결코 무정형을 목표로 삼지 않았다. 그는 작품의 물질성을 강조하는 순간에도 결코 물질 자체에 주목하라고 말하지 않았다. ……앵포르맬은 형을 해체하기 위해 물질로 돌아간 게 아니다. 그저 창작의 한 국면에서 새로운 조형의 출발점으로 무정형을 기용했을 뿐이다. P.81 색면추상 미국의 추상표현주의 운동은 크게 두 유형 혹은 두 국면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하나는 폴록과 윌렘 드 쿠닝이 주도하는 뜨거운 표현적 추상이었고, 다른 하나는 버넷 뉴먼과 마크 로스코가 이끄는 차가운 색면추상이었다. 1951~52년 사이에 폴록은 갑자기 초기의 구상적 이미지로 돌아간다. 그러자 그린버그는 그동안 무관심 속에 방치했던 뉴먼을, 폴록의 뒤를 이어 모더니즘의 기획을 완성시킬 미국적 추상의 새로운 주자로 부각시키기 시작한다.  그린버그는 ‘이젤 회화의 위기’를 모더니즘의 징후로 꼽았다. 1948년까지만 해도 그는 ‘이젤화의 미래가 대단히 불확실해졌다.’며 ‘폴록 같은 미술가들이 그것을 파괴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여전히 말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로부터 3년 후 폴록은 ‘자신이 이젤회화와 이동식 벽화의 중간쯤에 끼어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는 결국 화면에 구상을 도입함으로써 이젤화로 돌아간다. 그린버그에 따르면, 뉴먼은 폴록이 좌절한 그 지점에서 앞으로 더 나아갔다. 뉴먼의 작품은 기하학적 추상과는 아무 관계도 없다. 그의 작품 속의 색면이나 수직선은 대상의 추상을 통해 얻어진 것이 아니다. 거기서 선은 그저 면을 분할하면서 통합할 뿐이다. 면은 한정된 사각의 ‘형태’가 아니라 사방으로 무한히 뻗어 나가도 무방하다. 거기서 미적 가상의 영역을 조직하는 구조 원리로서 프레임은 사실상 사라진다. 따라서 뉴먼의 작품은 이젤 회화라고 하기 어렵고, 차라리 장이라 불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뉴먼은 폴록보다 더 철저하게 환영의 공간을 파괴했다. 그리하여 그린버그는 거기서 폴록의 것과는 다른 ‘새로운 종류의 평면성, 즉 숨을 쉬고 맥박이 뛰는 평면성’을 본다. 그린버그는 뉴먼과 로스코의 작품에서 3차원 공간의 환영을 완전히 폐기한 형식주의 회화, 즉 아무 내용도 없는 순수한 형식만을 보려 한다. 하지만 이는 뉴먼과 로스코에 대한 일면적 이해해 불과하다. 왜냐하면 이 두 사람은 ‘대상의 초월’, 즉 현실의 추상이 아니라 ‘초월적 체험의 현실’, 어떤 초월의 체험을 실현하는 데 있었기 때문이다.  뉴먼과 로스코에게 중요한 것은 형식이 아니라 ‘원시나 태고의 예술과 영적 혈연관계’를 맺고 있는 ‘비극적이고 영원한’ 주제였다. 그렇다면 ‘무슨 주제인가?’ 뉴먼은 ‘장소’를 창조했다. 자신의 작품 앞에서 느낀 이 미묘한 감정, 거의 종교적 열광에 가까운 이 신성한 감정을, 당연히 관객들도 느껴야 할 것이다. 바로 이것이 그가 작품을 통해 전달하려는 ‘주제’였다. 장소에서 느끼는 고양된 느낌을 그는 ‘숭고’라고 불렀다.   <하나임1>을 제작한 그해 뉴먼은 <숭고는 지금="">이라는 에세이를 쓴다. 이 에세이에서 뉴먼은 서구의 미술사를 ‘미와 숭고의 대립’으로 요약한다. 뉴먼에 따르면, 유럽인들은 오랫동안 미와 숭고를 혼동해왔다. 그 결과 유럽의 미술에서는 숭고에 대한 열망이 미의 감옥 속에 갇혀버렸다. 오랫동안 유럽 미술의 전범이 된 그리스의 신상들은 숭고하기보다는 차라리 아름답다. 그리스 신들의 신성은 이렇게 아름다움 속에 갇혀 있다.  아름다움은 ‘형태’에서 온다. 형태는 윤곽이고, 윤곽을 유한하다. 하지만 신성의 본질은 무한함에 있기에 아름다움에 갇힌 것은 온전한 신성일 수 없다. 유대의 신이 제 형상을 만드는 것을 금한 것은 그 때문이다. 하지만 유럽 미술은 “감각의 현실 내에 머물면서 순수한 조형성의 프레임 안에서 미술을 구축하려는 맹목적 욕망 떄문”에 숭고에 도달하는 데 실패했다. 뉴먼은 오직 “유럽 문화의 질곡에서 자유로운” 미국의 화가들만이 오늘날 숭고를 표현할 수 있다고 본다. 그런 의미에서 그의 것은 철저한 미국형 회화라고 할 수 있다.   문제는 역시 “숭고하다고 불릴 만한 전설이나 신화가 사라진 시대에 …… 어떻게 숭고한 예술을 만들어낼 수 있는가.”하는 것이었다. 이 새로운 유형의 숭고를 뉴먼은 이렇게 특징짓는다.  우리는 고양된 것_,_ 즉 절대적 감정에 대한 우리의 관계에 관심을 갖고자 하는 인간의 자연스런 열망을 다시 확증하고 있다_. ……_ 예수_,_ 인간_,_ 삶으로부터 성전을 짓는 대신에 우리는 우리 자신으로부터_,_ 우리 자신의 느낌으로부터 성전을 짓고 있다_._   뉴먼은 숭고한 ‘제재’를 이용하지 않는다. 그의 숭고는 정체성의 효과를 통해 얻어진다. 숭고에 도달하려면 전통적인 아름다움의 전략을 파괴해야 한다. 이를테면, 고전 회화에는 풍경, 인물, 정물의 아름다움, 추상회화에는 형태와 형태 사이에, 형태와 배경 사이에 적절한 미적 관계가 존재한다. 이를 ‘관계주의’라고 부른다. 반면 뉴먼의 것은 어떤가? 그것은 부분과 부분, 부분과 전체의 ‘관계’ 없이 하나의 전체적 효과로 다가온다. 이제 ‘하나임’이라는 제목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가 갈 것이다.   뉴먼의 작품은 대부분 규모가 거대하여 관객을 그대로 덮쳐버린다. 관객은 미를 보는 데에는 익숙해도 숭고를 보는 데는 익숙하지 않다. 그리하여 큰 그림을 보면 무의식중에 뒷걸음을 쳐 작품에서 떨어지려 한다. 물론 이는 뉴먼이 원하는 것이 아니다. 이를 막기 위해 그는 관객에게 제 작품을 바로 앞에서 보라고 명한다.   예술로 숭고를 표현하는 것 자체가 이미 모순이다. 매체는 유한하나, 숭고는 무한하기 때문이다. 철학자 리오타르는 뉴먼의 방식을 **‘**숭고의 부정적 묘사**’**라고 부른다. 즉 뭔가를 묘사하기를 포기함으로써 뭔가 묘사할 수 없는 것이 있음을 드러내는 방식이라는 거다. 이를테면, 어떤 이가 자신이 겪은 일을 차마 말로 표현하지 못할 때, 우리는 그가 정말로 엄청난 일을 겪었음을 알 수 있듯이.  로스코도 뉴먼과 같은 해인 1948년에 그전까지의 초현실주의적 화풍에서 벗어나 자기 고유의 스타일을 확립한다. 뉴먼의 것과 달리 로스코의 작품에는 뭔가 규정되지 않은 배경 위에 덩그라니 색 덩어리가 떠돈다. 그의 화면에는 ‘색채 간의 화음이라는 한결 같은 창의성’과 ‘형상과 배경 간의 관게에 대한 수수께끼’가 존재한다. 당시에 몇몇 비평가들은 그를 색채주의자로 간주했다. 로스코 스스로도 자신의 회화의 색채 효과에 대해 언급하기도 했지만, 그에게 중요한 것은 저 색 덩어리들의 미적 효과가 아니었다. 어느 인터뷰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추상주의자가 아니다_._ 나는 색채와 형태_,_ 혹은 그 밖의 어떤 것과의 관계 따위에는 관심이 없다_._ 내가 관심을 가진 것은 오직 비극_,_ 엑스터시_,_ 운명 등 기본적인 인간의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다_. ……_그러므로 당신이 내 작품의 색채 관계에만 감동을 받는다면_,_ 그것은 요점이 빗나간 것이다_._   그에게 색채는 그저 ‘분위기의 날카로움’을 위한 도구였을 뿐이다. 하지만 당시의 비평가들은 뉴먼과 로스코의 작품을 오해하고 있었다. …… 로스코는 오해에 지친 나머지 1950년 이후에는 아예 제 작품에 대한 설명을 포기해버린다. 그는 ‘침묵이야말로 정확하다.’며, 말은 그저 관객의 정신을 ‘마비’시킬 뿐이라고 덧붙였다. 숭고는 차라리 침묵을 통해 더 전달되는 법이다**.**  뉴먼처럼 로스코 역시 자신의 작품을 보는 이상적 거리는 45센티미터라고 잘라 말했다. 작품의 바로 앞에 서면 색채들의 관계는 사라지고, 경계가 무너진 채 하나로 뭉개진 색 덩어리가 관객을 엄습하며, 관객은 그 전체적 효과 속으로 빨려 들어갈 것이다.   그는 결코 색채주의자가 아니다. 그의 작품은 그림이 아니라, 차라리 하나의 물건이다. 그것은 미적 지각의 ‘대상(object)’이 아니라, 차라리 관객의 감정을 발동시키는 ‘행동주(agent)’다. “내 예술은 추상적이지 않다. 그것은 살아서 숨쉰다.”  1940년대의 잭슨 폴록을 이어 뉴먼과 로스코의 회화는 1950년대의 추상표현주의 운동을 주도했다. 그들의 작품은 훗날 그린버그가 ‘탈화적 추상’이라고 부르게 될 1960년대의 추상에 영향을 끼친다. 1962년부터 그린버그는 그들이 ‘추상표현주의로부터 약간 떨어져 있다.’고 평가하기 시작한다. 결국 그들의 추상표현주의의 거친 화면으로부터 탈회화적 추상의 매끈한 화면으로 넘어가는 과도기의 역할을 했다는 얘기다.  주목해야 할 것은 뉴먼과 로스코가 자신들의 작품을 미적으로 지각해야 할 ‘그림’이라기보다는 정서적으로 작동하는 **‘**사물**’**로 간주했다는 점이다. 이는 물론 미니멀리즘 운동에 중요한 단서를 제공해주었다**.**   뉴먼과 로스코는 자신들의 작품 앞에서 관객이 숭고를 체험하기를 원했다. 자기들이 작품을 제작할 때 느꼈던 거의 종교적 체험에 가까운 그 열광의 감정을, 관객들도 갖기를 기대한 것이다. 믿기 어렵겠지만, 많은 사람들이 로스코의 작품 앞에서 실제로 감정에 북받쳐 울음을 터뜨렸다고 한다.  탈회화적 추상 1960년대 초 추상표현주의가 이미 관학적 예술언어로 전락했을 때 예술에 새로운 기운을 불어넣은 것은 외려 ‘팝아트’라는 이름의 구상회화였다. 여기에 맞서려면 폴록과 뉴먼, 로스코의 뒤를 이을 작가들이 필요했다. 1964년 그린버그는 일군의 작가들을 모아 ‘탈회화적 추상’이라는 전시회를 조직한다. ‘회화성’을 잃은 미국의 미술은 폴록의 뜨거운 추상에서 차가운 기하학적 추상으로 돌아간다. 폴록은 이 새로운 작가들의 ‘평면성’을 강조했지만, 평면성을 향한 그들의 작업은 이미 그린버그가 용인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서고 있었다. 스텔라의 셰이프트 캔버스를 통해 회화는 사물의 상태에 근접한다.  이미 1950년대 말에 추상표현주의는 초기의 급진성을 잃어버리고 미술대학에서까지 가르치는 화랑가의 유행이 되었다. 이 혁신 없는 모방자들의 기법을 그린버그는 냉소적으로 ‘10번가 양식’이라고 불렀다. 이 매너리즘에서 벗어나려면 박제로 전락한 추상표현주의를 대체할 새로운 예술적 동력이 필요했다.   사실 1960년대 초에는 이미 추상표현주의의 대안이 될 만한 새로운 흐름이 존재했다. 바로 앤디 워홀의 팝아트다. 하지만 팝아트를 바라보는 그린버그의 시선은 곱지 않았다. 그에게 팝아트는 추상표현주의 못지않게 피상적인 ‘또 다른 유행’일 뿐이었다.   그가 팝아트를 못마땅하게 여긴 데에는 당연히 이유가 있다. 모더니즘에 대한 그린버그의 관념에 따르면, 회화에서 ‘현대성’은 회화가 자기 자신의 조건을 반성적으로 탐구하는 것을 통해 도달된다. 하지만 팝아트에서 회화는 자기 자신을 주체화하지 않고 자기 바깥에서 제재를 취한다. 팝아트의 화면에는 먼로가 있고, 엘비스가 있고, 또한 캠벨 수프 깡통과 브릴로 세제 박스가 있다. 모더니스트의 눈에는 이렇게 회화에 구상을 도입하는 것이 당연히 모던의 성취를 뒤엎고 ‘모던 이전’으로 퇴행하는 것으로 비칠 수 밖에 없었다.   그린버그에게는 추상표현주의의 대안 역시 추상예술이어야 했다. 그리하여 1964년 그는 뉴욕에서 ‘탈회화적 추상’이라는 제목의 전시를 기획한다. 이는 강력한 적수로 떠오른 팝아트를 견제하기 위한 모더니즘의 반격이었다. 전시회에는 프랭크 스텔라, 모리스 루이스, 케네스 놀런드 등이 참여했다. 그린버그는 이들의 작품이야말로 팝아트와 달리 ‘진정으로 새로운 것’이라고 보았다.   탈회화적 추상은 추상표현주의와는 ‘급진적으로 다른 감성’을 보여준다. 폴록이나 드 쿠닝의 추상이 열정과 강렬한 감정을 전달한다면, 새로운 추상은 차갑고 냉담한 이성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이 차이를 그린버그는 ‘선적인’ 것과 ‘회화적인’ 것의 대조로 개념화한다. …… ‘회화적’ 그림이 거친 붓질로 인해 혼란스럽다면, ‘선적’ 그림은 윤곽선이 뚜렷하며 색채 또한 명료하다.   폴록의 추상표현주의가 ‘회화적’이라면, 색면 사이의 경계가 뚜렷하고 색채가 명료한 새로운 선적 추상은 ‘탈회화적’이다. 폴록이나 뒤비페는 물질성이 드러날 정도로 두껍게 발라진 임파스토를 사용하지만, 프랑켄탈러는 덧칠이 되지 않은 화포에 직접 묽게 희석한 물감을 칠한다. ‘회화’가 화면에 물감을 칠하는 행위라면, 탈회화적 추상은 화포에 희석한 물감을 들이는 행위에 가깝다. 물론 그렇게 완성된 그림은 화가의 인격이 느껴지는 터치를 통해 감동을 주는 작품이 아니라, 차라리 간판이나 인쇄물 같은 익명적, 비인격적 제작물로 느껴진다.   스테이닝(staining)은 원래 폴록이 작품의 초벌 작업에 사용하던 기법인데, 탈회화적 추상에서는 그것이 하나의 완결된 기법으로 사용된다. 희석된 물감이 화포에 스며들 때 물질적 표면과 암시적 층위의 구별은 사라진다. 그로써 물감의 암시력은 약화되고 표면의 평면성이 강화되어, 그린버그가 지적한 모더니즘의 특징이 극한에 도달한다.  그린버그의 말대로 회화가 아무리 평면성을 지향해도 ‘표면 위에 칠해진 최초의 흔적은 그 표면의 평면성을 실질적으로 파괴’하게 마련이다. …… 스텔라와 놀런드는 이 최소한의 환영마저 지우려고 동일한 모티프를 규칙적으로 반복한다. 이때 화면은 암시의 공간이기를 그치고 문양이나 사물에 가까워진다.  그린버그는 1960년대 탈회화적 추상의 특징으로 ‘선적 명료성’과 ‘물리적 개방성’을 꼽는다. 이 두 특징은 물론 그에 선행한 회화적 추상의 특성과 관련이 있다. …… 결국 그린버그가 탈회화적 추상의 특성으로 꼽은 두 가지는 회화적 추상에 대한 안티테제였던 셈이다.   그린버그는 회화성 자체가 구상과 본질적으로 연결된다고 보는 듯하다. 드 쿠닝은 물론이고, 폴록마저 결국 구상으로 돌아간 것은 회화적 추상의 필연적 결과라는 것이다. …… 프리드의 말대로 재현적이지 않은 회화도 구상적일 수 있다. 그리하여 폴록의 올 오버 속에도 여전히 입체주의적 조밀함의 흔적이 남아 있다. 탈회화적 추상은 그 흔적마저 없애려 한다.  탈회화적 추상 역시 큰 틀에서는 이 평면성을 향한 모더니즘 운동의 연장선 위에 있다. 그것은 추상표현주의보다 더 급진적으로 환영을 제거하며, 화면 자체도 추상표현주의의 그것보다 본질적으로 얕다. 탈회화적 추상은 양식이나 화파로서 회화적 추상 자체에 반대한 것이 아니다. 그저 특정한 태도, 즉 그것을 표준화하는 매너리즘에 반대했을 뿐이다.  탈회화적 추상은 회화적 추상과 단절되면서도 동시에 연속되어 있다. 그린버그에게 필요한 것은 결국 생명력이 다한 추상표현주의를 대신하여 모더니즘을 계속 추동할 대안이었다.   돌이켜보면 세계대전 이전에는 ‘추상’이라고 하면 주로 종합적 입체주의에서 갈려 나온 기하학적 추상을 가리켰다. 깔끔한 드로잉, 부드러운 색칠, 명료한 윤곽, 평면적이고 명확한 색채. 이것이 추상의 일반적 특징이었다. 하지만 폴록과 뒤비페는 임파스토, 드리핑과 거친 브러시워크로 추상을 ‘회화’적 효과와 결합시켰다.  하지만 이것이 전쟁 전 유럽의 기하학적 추상으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탈회화적 추상은 몬드리안, 말레비치, 혹은 바우하우스에서 나온 게 아니다. 탈회화적 추상의 작가들은 대부분 추상표현주의로부터 회화를 배웠기 때문이다. 그린버그에 따르면, 탈회화적 추상은 ‘회화적 추상 자체 내에서, 즉 뉴먼, 로스코, …… 심지어 폴록의 작품 내에서 시작되었다.  특히 뉴먼과 로스코가 회화적 추상과 탈회화적 추상을 잇는 가교 역할을 했을 것이다. 뜨거운 열광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이 두 작가는 아직 추상표현주의의 틀 내에 있으나, 정작 그들의 화면은 기하학적 추상처럼 차갑다. 그린버그가 ‘물리적 개방성’이라고 부른 특성도 이미 폴록의 올 오버에서 시작하여 뉴먼에게서 완성된 것이리라. 뉴먼의 화면은 사방으로 무한히 뻗어 나가도 될 것 같은 느낌을 준다. 탈회화적 추상 역시 어떤 거대한 패턴의 일부를 뭉텅 잘라낸 것처럼 보인다. 여기서도 그림은 프레임 안에서 완결되지 않고 프레임 밖으로 무한히 연장될 것처럼 느껴진다. -탈회화적 추상의 세 가지 경향 1) 하드에지 탈회화적 추상은 추상표현주의의 부드러움에서 딱딱함을 배웠다. 추상표현주의의 화면은 전체가 균등하여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이행이 점진적으로 이루어진다. 반면 케네스 놀런드의 그림은 하나의 색면이 경계선을 사이에 두고 다른 색면들과 거의 면도날처럼 날카로운 색채 대비를 이룬다.  2) 색면추상 하드에지에서는 색면들이 날카롭게 충돌한다면, 프랑켄탈러의 화면에서는 색채가 화포 위로 부드럽게 번져 나간다.  1) ‘미니멀리즘’으로 나아가는 사물화의 경향 마이클 프리드는 그린버그의 환원주의가 결국 회화를 사물로 만드는 경향을 부추긴다고 지적한다**.** 스테이닝 기법은 물감을 칠한다기 보다 차라리 화포를 염색하는 것에 가깝다. 이 경우 화포의 거친 텍스추어가 그대로 드러나 작품이 그림이라기보다는 하나의 사물처럼 느껴지게 된다. 프리드의 지적처럼 회화적 평면에서 환영주의를 완전히 폐기할 경우 작품은 회화가 아니라 사물이 된다**.**   이 맥락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프랭크 스텔라다. 이 ‘범례적인 탈회화적 화가’는 회화를 그림이 아니라 ‘오브제’로 간주한다. 탈회화적 추상의 화가들은 뉴먼과 로스코의 ‘규정하기 힘든 숭고에 대한 시적 강조’에 반대하여, 합리적 축어주의를 주창했다. 글자 그대로, ‘당신이 보는 것은 당신이 보는 것이다.’ 이 스텔라의 구호에서 우리는 노골적인 미니멀리즘의 경향을 본다. 그가 그림을 사물로 간주하는 것은 물론 회화에서 환영주의를 피하기 위해서다. 그림이 그림인 한, 아무리 추상적이어도 거기에는 모종의 공간감이 남는다. 이를 피하려면 그림은 아예 사물이 될 수 밖에 없다.  사실 텅 빈 배경에 달랑 붉은 삼각형과 하얀 동그라미만 그려 넣어도, 우리는 거기서 공간을 느낀다. 이를 피하려면 형태만 남기고 배경을 없애거나, 아니면 배경만 남기고 형태를 없애야 한다. 이 두 가지를 동시에 하는 방법은 바로 형태와 배경을 일치시키는 것이다. 이를 위해 스텔라는 캔버스를 형태와 똑같은 모양으로 잘라낸다. 이를 **‘**셰이퍼트 캔버스**’**라고 부른다.   그린버그는 점점 막강해지는 팝아트의 위력에 탈회화적 추상으로 맞서려 했다. 하지만 탈회화 추상과 팝아트 사이에도 실은 유사성이 존재한다**.** 이를테면, 화가의 제스처를 지우고 생산의 익명성을 지향한다는 점, 인쇄한 것처럼 매끈한 표면을 가졌다는 점, 공간의 깊이를 지우기 위해 평면성을 지향한다는 점, 스텔라의 경우처럼 종종 시리얼한 제작 방식을 채택했다는 점. 이는 탈회화적 추상이 팝아트와 공유하는 특성이다.  비록 추상은 아니지만 어떤 의미에서 팝아트도 탈회화적이었다. 이 시기의 예술은 후에 마이클 프리드가 ‘대상성’이라고 부른 것을 지향하고 있었다. 그것이 구상과 추상을 아우르는 1960년대의 시대정신일 것이다.  미니멀리즘  공간의 환영은 구상회화에만 있는 게 아니다. 아무리 추상적이더라도, 그림이 그림으로 벽에 걸려 있는 한 ‘환영’의 공간으로 지각되게 마련이다. 여기서 미니멀리스트들은 ‘그렇다면 그림이 더 이상 그림이 아니어야 한다.’는 결론을 내리고 자신들의 작품을 아예 ‘사물’로 만들기로 한다. 작품이 사물과 물리적으로 구별이 안 된다면, 혹은 구별하기 힘들다면, 그것을 예술로 만들어주는 것은 관객의 체험일 것이다. 하지만 이는 그린버그가 생각하는 모더니즘의 강령에 배치된다. 작품의 성립에 관객을 요청하는 것은 회화가 아닌 연극의 특성이기 때문이다.  미국형 모더니즘의 가장 큰 문제는, 그림이 그림으로 벽에 걸리는 한 필연적으로 따라다니는 환영주의였다. 모더니즘은 화면에서 원근법적 공간을 몰아냈으나, 그 자리에 새로운 시각적 유형의 환영을 만들어낼 수 밖에 없었다. 추상적인 화면에도 환영의 효과는 끈덕지게 들러붙는다. 추상표현주의의 작품들, 심지어 폴록의 ‘올 오버’조차 여전히 모종의 공간감을 암시한다.   이 최소한의 환영 효과마저 배제하려 한 탈회화적 추상에서는 이미 **‘**사물의 근본적 속성으로서의 모양과 회화의 매체로서의 모양 사이의 충돌이 나타난다**.’** ‘모양’은 사물의 속성인지, 아니면 환영의 속성인지 불분명하다. 이 ‘충돌’에서 과감히 사물성의 영역으로 진입할 때, 미니멀리즘이 탄생한다. 그린버그는 미니멀 아트가 더 이상 **‘**예술**’**이 아닌 **‘**사물**’**의 상태에 근접했다고 지적한다**.**   환영을 쫓아내려는 엑소시즘은 결국 예술을 사물로 만들어버리는 경향이 있다. 프리드가 ‘미니멀 아트’를 ‘축어적 예술’이라고 부르는 것은 이 때문이다. 회화의 환영주의는 관객이 물감을 물감이 아닌 다른 어떤 것으로 지각할 때 탄생한다. 하지만 미니멀 아트에는 그런 환영이 존재하지 않는다. 프리드의 말대로, ‘미니멀’보다는 ‘리터럴’이라는 표현이 더 적절할지도 모르겠다.   이 예술의 트레이드마크로 통하는 ‘미니멀’한 특성은, 사실 회화적 환영을 불러일으키는 관계주의를 추방하는 과정에서 결과적으로 갖게 된 속성에 불과하다. 미니멀 아트는 관계주의적 예술 작품, 즉 ‘부분과 부분을 더하는 방식으로 구성’하는 작품, 즉 ‘전체와 구별되는 특정한 요소들을 결합해 작품 내에서 관계들을 설정하는’ 작품에 반대한다. 부분과 부분, 부분과 전체의 관계를 통해 재료를 구성하는 물질적 요소들은 더 이상 그 물리적 속성으로 환원되지 않는 미적 환영으로 전화하기 때문이다.  화면에서 환영을 쫓아내려면 요소들의 ‘관계’부터 해체해야 한다. 그러려면 작품을 부분이 없는 통짜의 사물로, 즉 도널드 저드가 ‘독특한 대상’이라고 부른 ‘하나의 유일한 사물’로 만드는 수밖에 없다. **‘**전체성**,** 단일성**,** 불가분성’이라는 미니멀의 미학은 여기서 비롯된다. 이른바 ‘심플한’ 디자인은 미니멀 아트의 자기 목적이 아니었다. 그것은 작품을 통짜의 사물에 가깝게 만들기 위해 구조를 최소화하는 과정에서 미니멀 아트가 결과적으로 갖게 된 특성에 불과하다.   또 하나의 방법은 공업용 모듈을 도입하는 것이다. 동일한 요소들이 기계적으로 반복될 때, 대상은 작가의 손을 거친 ‘작품’이 아니라 공업의 ‘산물’처럼 보이게 된다. 1960년대에 처음 등장했을 때만 해도 미니멀 아트는 그 **‘**비인격성**’**때문에 대중으로부터 널리 외면당했다. 대중은 예술에서 서정을 기대한다. 그들은 폴록의 작품에서 여전히 작가의 내면을 읽을 수 있었다. 하지만 미니멀리즘에서 그들이 보는 것은 공장에서 기계로 뽑은 듯이 보이는 물건 뿐이다. 작가의 개입이 배제된 익명성, 기하학적 형태의 반복성, 모듈로 진행되는 연쇄성은 대중에게 지루하고 단조로울 뿐이었다.  도널드 저드는 미니멀리즘의 대표적 작가이자 이론가로, ‘그를 전면에 내세우지 않으면 미니멀리즘에 대한 완전할 수 없을 것이다.’ 저드는 환영주의를 추방하려는 모더니즘의 기획에서 출발했다. 이 점에서 그는 그린버그의 강령에 충실하나 그의 반환영주의는 그린버그의 것보다 더 철저했다. 그는 아예 **‘**회화**’**의 조건 자체를 문제 삼는다**.**   회화에서 주요한 오류는 그것이 평평하게 벽에 걸리는 직사각형의 평면이라는 것이다. 직사각형은 그 자체가 모양이다. 그것은 분명히 전체의 모양이다. 그것이 그 위나 안에 있는 것들의 배열을 결정하고 제어한다.   모더니즘은 공간의 환영을 파괴하여 평면으로 돌아가려 했다. 하지만 사각의 프레임이 존재하는 한, 회화의 표면에 있는 것은 그 어떤 것이든 자기 뒤로 공간을 갖게 마련이다. 저드가 보기에 ‘환영의 공간’을 피하는 유일한 길은 같은 작품이 아예 ‘실제의 공간’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이 환영 효과를 피하려면 조각도 아닌, 당연히 구성 자체, 즉 부분을 조직하는 것 자체를 포기하고 통짜의 사물을 만들어야 한다. ‘전체로서 사물, 전체로서 그것의 특질. 그것이 흥미로운 것이다.’ 이 객체는 ‘분명히 조각을 더 닮았으나’ 실은 ‘회화에 더 가까운 것이다.’ 과거에 우리는 물감에서 풍경을 보고, 돌덩이에서 인체를 보았다. 하지만 미니멀리즘에서 우리가 보는 것은 덩그마니 놓인 하나의 사물 뿐이다. 여기서 모더니즘의 ‘자기 지시성’은 극한에 도달한다. 이 사물의 **‘**현전**(presence)**’이 미니멀리즘의 특성이다.   저드가 회화를 환영주의로부터 구하려 한다면, 로버트 모리스의 관심은 조각을 환영주의에서 해방시키는 데 있었다. ‘유럽의 유물’과 단절하려 했던 저드와 달리, 모리스는 자신의 작업을 유럽의 전통, 특히 러시아 구축주의와 연결시킨다. 그는 타틀린의 카운터 릴리프에서 미니멀리즘의 선구를 본다. 건축도 조각도 아니며, 아무것도 재현하거나 암시하지 않는 순수 조형물이라는 점에서다.   저드의 ‘특정한 객체’가 회화도 아니고 조각도 아니듯이, 모리스의 ‘3차원 작품’은 조각도 아니고 건축도 아닌 어떤 것이다.   모리스는 미니멀 아트에 가장 적합한 형태로 간단한 다면체를 제안한다. 복잡하지 않은 다면체는 부분과 부분의 관계주의적 지각을 넘어, 그것을 하나의 전체로 파악하는 게슈탈트 지각을 가능하게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전체적 지각을 허락하는 간단한 다면체를 모리스는 ‘단일한 형태’라고 부른다. 주목해야 할 것은, ‘단일성, 전체성, 불가분성’이라는 미니멀 아트의 효과가 여기서는 ‘지각’과의 차원에서 언급된다는 점이다. 모리스는 이를 입체주의적 지각에 대립시킨다.   작품의 체험은 필연적으로 시간 속에 있다_._ 그 의도는 하나의 평면 위에서 동시에 여러 개의 관점을 갖는 데 관심을 가진 입체주의에 정면으로 대립된다_._  ‘사물’에 집착했던 저드와 달리 모리스는 ‘지각’을 강조한다. 그가 설치한 L자 모양의 철제 빔들은 정확히 같은 모양을 하고 있지만, 놓인 위치나 자세에 따라 모양이 사뭇 달라 보인다. 이성은 세 개의 빔이 같다고 말하나, 지각은 서로 다르다고 말한다. 근원적인 것은 지각이다. 모리스의 미니멀리즘은 이 원초적 지각의 현전**,** 최초 지각의 직접성을 확보하려 한다**.** 모리스에 따르면 객체가 단순할수록 체험은 외려 복잡해진다**.**  저드가 반관계주의적이고, 모리스가 현상학적이라면, 칼 안드레는 유물론적이다. 안드레는 조각을 수평으로 만든 최초의 작가일 것이다. 그는 조각을 수직으로 선 남근에 비유한다. …… 작품과 관객을 등질의 공간에 넣는 미니멀리즘의 전략은 여기서 극한에 도달한다. 그는 관객들로 하여금 작품을 밟고 지나가게 함으로써 금속이 가진 물성, 그것의 촉감과 무게를 직접 느끼게 만들었다. 물리적 속성에서 비롯되는 감각의 현전을 강조했던 것이다.  안드레는 자신의 작품이 결코 ‘개념적’이지 않으며, 그것이 언제나 실제의 사물, 물질의 현실성에 관한 것이라고 강조한다. 하지만 물질에 대한 그의 관심은 뒤비페와 같은 앵포르멜 작가들이 주장한 **‘**물질의 시학**’**과는 관계가 없다. 그는 물질을 그 자체로서 사용할 뿐, 그것으로써 다른 어떤 것을 환기시키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철저한 미니멀리스트, 아니 리터럴리스트다. 그는 제 작품을 이렇게 특징짓는다.  내 작품은 무신론적이고 유물론적이며 공산주의적이다_._ 초월적 형태도 없고_,_ 그 자신의 재료로 만들어지며_,_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접근 가능하기 때문이다_._  칼 안드레는 누구나 살 수 있는 재료로, 누구나 할 수 있는 형태로 배열된 자신의 작품이 ‘평등주의’를 구현한다고 믿었다.  안드레의 작업이 유물론적이라면, 솔 르윗의 작품은 탈물질적이다. ‘개념적’이기를 거부한 안드레와 달리, 솔 르윗은 **‘**개념**’**을 지향한다**.** ‘벽 드로잉’을 제작할 때, 그는 작업의 공식만 제공하고, 공식에 따라 벽에 드로잉을 하는 작업은 직공들의 손에 맡겼다. 모듈을 수학적으로 반복한다는 점에서 그의 작업은 ‘미니멀’하다. **‘**전체의 통일성**’**이나 **‘**감정적으로 건조한**’** 효과를 강조하는 것 역시 미니멀리즘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는 미니멀 아트의 사물성을 물질성으로 이해하는 것을 거부한다**.**   솔 르윗에 따르면, 예술에서 가장 주요한 것은 아이디어 혹은 개념이다. 이렇게 예술의 개념적 측면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솔 르윗은 작품의 지각적 측면에 집착하는 모리스의 미니멀리즘과도 충돌한다**.** 여기서 그는 미니멀리즘을 넘어 개념예술로 나아간다**.**   미니멀 조각을 대표하는 또 다른 작가는 댄 플래빈이다. 그는 조각을 ‘형태’라기보다는 **‘**공간**’**의 예술로 이해했다. 그의 작품에서는 다양한 색채의 형광등이 주위의 공간을 물들인다. 플래빈은 공간을 변형시키는 빛의 효과 속에서 거의 종교적 영성에 가까운 ‘숭고함’을 본다. 뉴먼이나 로스코의 초월적 숭고와는 다른 세속적 숭고, 이른바 현대의 기술적 숭고를 본다. 플래빈은 이를 **‘**산업적 물신**’**이라 불렀다.   미니멀리즘은 통일된 강령을 가진 운동이 아니었다**.** 그저 ‘회화도, 조각도 아닌 사물을 지향한다’는 목표를 공유할 뿐, 작가들 사이에는 적지 않은 차이가 존재했다. 그럼에도 미니멀리즘의 이 다양한 흐름을 하나로 묶어주는 몇 가지 가족 유사성이 있다면, 그것은 작가의 인격적 개입을 배제하고, 공장에서 제작된 기성의 재료를 사용하며, 작품의 전체성,반복성,상사성을 띠면서 정서적으로 건조하다는 것이다. 이들의 작업에서는 또한 환영보다는 ‘객체’가, 형태보다는 ‘공간’이, 작가보다는 ‘관객’이 중시된다. 이 **‘**객체**-**공간**-**관객**’**의 삼각형이 미니멀리즘의 본질적 특징을 이룬다.  미니멀리스트들은 회화를 회화로 만들어주는 이 최소한의 환영마저 제거함으로써 회화를 회화가 아닌 것으로 만들어버리고 그린버그가 생각하는 모더니즘의 지평을 떠난다**.** 마이클 프리드 역시 미니멀리즘이 모더니즘 회화에 대립적이라고 느낀다.  아무리 회화가 추상적이더라도 그것이 회화이려면 미적 가상으로 남아야 한다. 하지만 미니멀리즘은 바로 그 영역을 떠나려 한다. 회화가 더 이상 회화가 아니라면, 또 조각이 더 이상 조각이 아니라면, 미니멀의 회화와 조각은 대체 어디로 나아가려는 것일까? 마이클 프리드는 바로 **‘**연극**’**이라고 대답한다.  미니멀리즘은 흐르는 시간 속에서 관객과 작품의 관계를 극화한다. 이렇게 미술이 연극을 지향하는 것은 ‘회화는 회화로 돌아가야 한다’는 모더니즘의 계명을 정면으로 위반한 것이다. 프리드는 이를 회화와 연극 사이의 ‘전쟁’으로 규명한다.  미니멀리즘은 필연적으로 관객의 참여를 요청한다. 작품이 사물이 되어버릴 경우, 그 사물을 예술로 만들어주는 것은 관객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미니멀리즘이 ‘연극적’이라는 프리드의 비난은 나름 예리한 구석이 있다. ‘객체-공간-관객’이라는 미니멀리즘의 삼각형은 사실 ‘배우-무대-관객’이라는 연극의 3요소를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그린버그는 미니멀리즘을 ‘일시적 놀라움’으로 규정했으나, 그의 생각과 달리 미니멀리즘은 그저 일시적 유행으로 끝나지 않았다. ‘포스트-미니멀리즘’이라고 불리는 60~70년대 미술의 다양한 흐름은 미니멀리즘의 특정 측면을 계승 혹은 극복하려는 시도에서 발생했다.  이를테면 ‘퍼포먼스’는 미니멀리즘의 연극성을, ‘과정예술’은 그것의 시간성을, ‘신체예술’은 그것의 신체성을 각각 계승한 것이다. 설치, 대지예술, 장소특정예술 역시 사물을 특정한 장소에 집어넣어 맥락을 창조하는 미니멀리즘의 전략에 근원을 두고 있다.  미니멀리즘의 가장 큰 업적은 모더니즘의 협소한 감옥에서 미술을 해방시킨 데  있지 않을까? 미니멀리즘 이후 미술의 영역은 비할 데 없이 넓어졌다. 오늘날 미술은 종종 미술이 아닌 다른 것처럼 보인다. 프리드는 이를 ‘취향의 타락’으로 보았으나, 오늘날 화가가 전시장에서 공연을 한다고 해도 놀라거나 비난할 사람은 더 이상 없을 것이다. 미니멀리즘은 그린버그의 모더니즘을 내부로부터 붕괴시켰다**.** 개념미술 미니멀리스트들은 자신들의 작품이 사물과 똑같아지기를 원했다. 하지만 작품이 사물과 다르지 않다면, 굳이 그것을 만들어낼 필요도 없을 것이다. 여기서 ‘개념미술’이라는 발상이 탄생한다. 개념미술가들은 예술의 본질은 ‘개념’에 있다고 보았다. 즉 예술가의 창조적 발상이 실행(창작)이나 결과(작품)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 경우 미술은 문학에 가까워진다. 개념미술의 논리를 엄격히 적용하면, 작품은 미술관에 전시할 것이 아니라 잡지에 기고하는 게 나을 것이다. 미니멀리스트들은 팔릴 수 없는 작품을 만들기를 원했다. 여기서 그들의 아방가르드 정신을 엿볼 수 있다.   작품을 전시회에 출품하는 게 아니라 잡지에 기고하는 화가들이 있다. ‘개념미술가’라고 불리는 이들이 그들이다. ‘개념미술’이라는 말을 처음 사용한 사람은 헨리 플린트로 알려져 있다. 1961년에 쓴 에세이세서 그는 개념미술을 이렇게 정의한다. _‘_개념미술은 무엇보다도 개념을 재료로 하는 미술이다_._ 음악의 재료가 소리인 것처럼 말이다_._ 개념들은 언어와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으므로_,_ 개념미술은 언어를 재료로 하는 미술 형식이라고 할 수 있다_.’_ 그는 구조예술, 특히 총렬음악에서 개념미술의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플린트의 말은 묘하게도 예술의 종언을 고하던 헤겔을 연상시킨다. 헤겔에 따르면, 예술은 필연적으로 물질성에서 정신성으로 이행한다. 예술의 본질은 “정신적 이념을 감각적 물질로 구현”하는 데 있다. …… 다 자란 정신에게 예술의 물질성은 그저 거추장스런 옷일 뿐이다. 이 지점에서 헤겔은 예술의 종언을 선언한다. 절대정신이 ‘물질적’ 매체를 통해 표현되는 시대는 지났다는 것이다. 적어도 예술이 물질을 벗고 정신으로 상승하리라는 그의 지적은 적중한 것으로 보인다.   일전에 뒤샹은 주로 ‘개념’으로 작품을 만들어왔다. 다양한 레디메이드로 그가 창조한 것은 물질적 오브제로서 ‘작품’이 아니라 비물질적인 ‘관념’, 즉 예술의 새로운 ‘정의’였다. 1910년대 말 그는 ‘더이상 그림을 그리지 않겠다.’는 선언을 하며, 아예 그림을 그리지 않는 최초의 화가(?)가 된다. 그로부터 반세기가 지난 1961년 플린트가 ‘개념미술’을 제안했을 때, 그 역시 이를 일종의 네오 다다의 제스처로 이해했다.   개념미술의 근원은 다다에 있겠지만, 운동의 직접적 단초가 된 것은 미니멀리즘이었다. 미니멀리즘과 개념미술의 경계는 뚜렷하지 않다. …… 저드에게 작품은 아직 ‘사물’이었다. 모리스에게 작품은 이미 ‘지각’이었다. 솔 르윗에 이르러 작품은 마침내 ‘개념’이 된다. 그의 <붉은 정사각형="" 하얀="" 글자들=""> 속의 동어반복은 미니멀리즘에서 개념미술에 이르는 도정에서 뒤샹이 요청한 망막적_(retinal)_ 현상에서 정신적_(mental)_ 현상으로의 변보를 시각적으로 보여준다_._   미니멀리즘이 개념미술로 진화하는 것은 논리적 필연일지도 모른다. 사실 미니멀리즘에 속하는 작품들은 ‘사물’과 거의 구별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굳이 _‘_작품_’_을 제작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_?_ 여기서 미니멀리즘은 개념미술로 진화한다. 솔 르윗에 따르면, 개념미술에서는 **‘**생각이나 관념**’**이 작품의 가장 중요한 측면이 된다. 그의 말대로 예술가가 예술에 개념적 형식을 사용한다는 것은 곧 모든 계획과 결정이 미리 만들어지고 실행은 요식행위가 된다는 것을 말한다. 창작과 실연이 분리된다는 점에서 이들의 작업 방식은 음악의 과정과 닮았다**.** 음악에서는 작곡가가 곡을 쓰고, 실연은 연주자들에게 맡겨지기 때문이다.  여기서 더 나아가면 아예 실행 자체를 포기하는 단계에 이르게 된다. 1963년 에드워드 킨홀즈는 제작에 따르는 비용과 시간이 아까워 **‘**개념 타블로**’**를 만들었다. …… 물론 킨홀즈가 물질적 실현 자체를 포기하려 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의 작품은 대부분 실현되지 않은 관념으로 남았다. 헤럴드 로젠버그는 잊지 않고 이를 액션 페인팅의 전통과 연결시킨다.   문서를 통한 예술적 소통은 회화가 물리적 오브제라기보다는 작가의 창조적 과정의 기록으로 간주되어야 한다는 액션 페인팅의 아이디어를 극한으로까지 발전시킨 것이다**_. ……_**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면_,_ 예술 작품은 제작될 필요가 없게 된다_._ 창조적 활동은 작품의 제안만으로 이루어질 수도 있다_._  물론 로젠버그의 해석은 초점이 빗나간 것이다. ‘관념-실행-작품’으로 이어지는 예술적 소통의 도식에서 ‘액션 페인팅’이 두 번째 지절을 강조한다면, 개념미술은 첫 번째 지절에 예술의 본질이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 킨홀즈의 작업은 차라리 다다의 제스처에 가깝다.  본격적인 의미에서 최초의 개념미술가는 멜 보크너였다. 킨홀즈가 실행을 포기한 것이 ‘임시방편’이었다면, 보크너는 물리적 실행을 ‘개념적’으로 포기하기 때문이다. 1966년 그는 동료 작가들의 드로잉과 작업 구상을 담은 종이를 여러 번 복사하여 네 권의 파일노트에 끼워 조각의 받침대 위에 올려놓았다. 거기에는 솔 르윗과 댄 플래빈의 작업 스케치, 저들의 작품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담은 송장, 존 케이지의 악보가 포함되어 있었다. …… 이 전시회를 찾은 관객들은 작품을 ‘보는’ 게 아니라 파일을 넘겨가며 ‘읽어야’ 했다. …… 미술은 문학에 가까워진다. 이제 화가는 작품을 전시회에 출품하는 게 아니라 아예 잡지에 기고하게 된다. 조셉 코수스는 1968년 <예술-언어>라는 잡지에 작품을 기고 하며 ‘예술가로서의 내 역할은 작품의 출판과 더불어 끝난다_.’_  형식은 중요하지 않다고 하지만, 개념미술은 일반적으로 네 가지 형식을 선호한다.  - 첫째는 ‘레디메이드’로, 이를테면 뒤샹의 변기처럼 일상의 사물을 예술로 선언하는 것이다. - 둘째는 ‘개입’으로 오브제나 이미지를 엉뚱한 맥락에 옮겨놓는 것이다. 예를 들어, 다니엘 뷔랑은 모든 곳을 미술관으로 만들기 위해 줄무늬가 그려진 간판을 등에 짊어지고 파리의 거리를 활보했다. - 셋째는 ‘자료화’다. 위에서 언급한 보크너의 작업 스케치 전시가 거기에 속한다. - 개념미술의 가장 보편적 형식은 아마도 **‘**언어**’**를 사용한 것이리라. 독일의 작가 한네 다르보벤은 숫자와 글자, 낙서를 계열적으로 늘어놓음으로써 회화가 글쓰기라는 관념을 표현했다. 일본의 작가 온 카와라는 매일 예닐곱 시간에 걸쳐 캔버스에 그날의 날짜를 그려 넣고, 그 아래에 그날 벌어진 사건을 보도한 신문을 첨부했다. 대중적으로 가장 널리 알려진 예는 제니 홀저의 LED작업일 것이다.  알렉산더 알베로는 ‘개념미술을 낳은 다양한 미술사적 계보학’에 대해 언급한다. 거기에 따르면, 1960년대의 개념미술은 ‘네 가지 궤도’가 하나로 수렴한 결과라고 한다. - 전통적 예술 작품의 구조를 해체한 모더니즘 회화의 자기반성적 경향 - 작품을 시각적 오브제에서 개념적 텍스트로 되돌리는 환원주의적 경향 - 마르셀 뒤샹에게서 유래하는 반미학 혹은 비미학의 경향 - 예술 작품이 전시되고 소통되는 장소를 문제 삼는 경향 위에서 언급한 개념미술의 네 형식은 이 네 가지 궤도가 복잡하게 결합한 결과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1960년대 말은 마침 지식계에서 ‘텍스트로 전환’이 이루어지던 시기였다. 기호학은 사진 이미지에 숨은 이념의 언어를 보여주었고, 비트겐슈타인의 언어철학은 우리의 세계가 언어적 관습으로 구축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_._ 게다가 당시 화가들 사이에는 아직도 제도예술을 거부하는 아방가르드적 제스처가 남아 있어_,_ 예술의 상업화를 거부하기 위해 아예 팔릴 수 없는 작품을 만들자는 발상을 하게 된 것이다. 이 네오 다다의 경향 속에서 특히 주목해야 할 것은 이 시점에 이루어진 뒤샹의 재발견 혹은 재평가이리라**.**   개념미술은 자신을 그린버그의 형식주의에 대한 안티테제로 이해했다. 그린버그에 따르면, 현대 회화는 ‘순수 회화’, 즉 다른 장르에서 온 이질적 요소들을 배제한 ‘회화’ 자체가 되어야 한다. 하지만 개념미술에 이르러 회화는 물감과 화폭을 버리고 다른 매체, 말하자면 행위를 지시하는 악보, 언어를 재료로 하는 문학이 된다. 개념미술가들은 그린버그의 형식주의가 미술의 영역을 너무 좁혀 그것을 그저 _‘_장식_’_에 불과한 형식의 _‘_취향_’_에 가둬놓았다고 느꼈다_._ 특히 코수스는 그를 ‘취향의 비평가’라고 부르며, 그의 형식주의적 비평을 비판한다.   코수스는 현대 예술의 ‘자기 반성’을 무엇보다도 예술의 자기 자신의 ‘본성’과 ‘기능’을 묻는 것으로 이해한다. 이는 미적 현대성에 대한 완전히 다른 인식으로 이어진다. 한마디로 형식주의 비평가와 예술가들은 ‘회화(혹은 조각)의 특수한 본성’을 묻는 데 매몰되어 ‘예술의 일반적 본성’을 묻는 것을 잊었다는 지적이다. 이 맥락에서 코수스는 뒤샹을 부각시킨다.   예술의 기능에 관한 물음을 최초로 제기한 사람은 뒤샹이다_._ 사실 뒤샹이야말로 우리가 예술에 정체성을 부여한 사람으로 인정할 수 있는 인물이다_._   중요한 것이 예술의 본성, 예술의 기능에 관한 물음이라면, 현대미술사는 다시 쓰여야 할 것이다. 그린버그에게 현대미술의 역사는 결국 ‘추상화’의 과정이다. 그것은 피카소의 입체주의에서 출발하여 폴록의 추상표현주의와 그 이후로 이어진다. 반면 코수스에게 현대미술의 역사는 예술을 새로 ‘정의’하고 그것을 ‘확장’하는 과정이다. 그것은 뒤샹에서 출발하여 로젠버그를 거쳐 미니멀리즘, 개념미술, 팝아트와 그 이후로 이어진다. 오늘날 현대 예술에 대해 우리가 가진 관념은 그린버그의 것보다 코수스의 것에 더 가깝다. 그사이 예술의 관념 자체가 바뀐 셈이다.   코수스의 <세 개의="" 의자="">는 미술사에서 개념미술의 아이콘처럼 통한다. 여기서 우리는 실제의 ‘의자’와 의자의 ‘사진’과 의자의 ‘정의’로 이루어진 삼중의 동어반복, 언어학적 삼위일체를 본다. 여기에는 ‘레디메이드’와 의자의 ‘자료형식’과 의자라는 ‘언어’가 존재한다. 게다가 평범한 의자가 미술관에서 작품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전시장에 놓여 있던 뒤샹의 변기처럼 ‘개입’의 요소라고 할 수 있다. 그렇게 보면, 결국 이 하나의 작품 안에 개념미술의 네 형식이 다 들어 있는 셈이다.   전시가 끝난 후 의자는 디자인과에, 의자의 사진은 사진과에, 그리고 ‘의자’라는 낱말의 정의가 담긴 사전의 복사물은 도서관에 보관되어야 했다. 보존을 위해 작품을 해체한 셈이다. 이 일화가 의미하는 바는 크다. 장르의 구별이 매체의 차이를 근거로 이루어진다면, 매체를 포기한 이상 장르의 구별은 무의미해진다. 매체 고유의 순수성을 강조한 그린버그의 모더니즘은 여기서 종언을 고한다**.**  개념미술은 1970년대 말 하나의 유파로서는 자취를 감추기 시작한다. 그것은 개념미술 자체에 내재한 어떤 패러독스의 결과일 것이다. 도널드 저드가 1965년에 ‘누군가 제 작품을 예술이라 부르면, 그것은 예술’이라고 했을 때, 죽은 것은 전통적 의미의 예술만이 아니다. 그와 더불어 개념미술도 죽은 것이다. 세상의 모든 것이 예술가의 선언만으로 예술이 될 수 있다면, 특수한 의미로서 예술은 사라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유파로서 개념미술은 종언을 고했지만, 코수스의 지적대로 어떤 의미에서는 현대미술 전체가 ‘개념미술’이다. 사실 현대미술은 ‘개념미술’ 이전에도 개념적이었고, 이후에도 그렇다. 오늘날의 예술은, 물질을 얼마나 많이 사용하든지 관계없이, 모두 개념적 배경을 갖는다. 개념미술을 통해 창작은 ‘제작’의 의무에서, 작품은 ‘재료’의 감옥에서, 수용은 ‘지각’의 관례에서 해방되었다. 헤겔의 말대로 예술은 죽었다. 아니, 예술의 육신은 죽고 영혼만 남아 비물질성에 도달했다. 물질을 떠난 예술은 우리의 영혼처럼 마침내 파괴될 수 없는 불멸성에 도달했다.  팝아트  모더니즘의 종언을 확실히 보여준 것은 1960년대 초에 등장한 팝아트였다. 추상과 팝아트 사이에서 가교 역할을 한 것은 재스퍼 존스였다. 그가 그린 깃발은 공간 속의 대상이나, 철저히 평면적으로 느껴진다. 묘사 대상 자체가 평면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평면성을 향한 추상의 운동을 역설적으로 구상으로 전환한다. 팝아트를 통해 재현이 복귀하나, 돌아온 구상은 더 이상 자연이 아니라 복제의 모습이었다. 팝아트는 장인성을 포기함으로써 대량생산을 미메시스하며, 복제를 다시 복제함으로써 독창성의 신화를 무너뜨리며, 대중매체의 이미지를 받아들임으로써 대중의 취향을 긍정한다.   그린버그는 1962년 뉴욕에서 30년 동안 미국의 미술계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그 30년 동안 팝아트가 미술계를 주도했다는 점을 생각해 보건대, 그린버그의 모더니즘은 끝내 워홀을 인정할 수 없었던 모양이다. 이것이 또한 워홀이 예술가로 데뷔했을 때 미국 미술계의 분위기이기도 했다. 예술가로서 워홀의 첫 전시는 뉴욕이 아니라 LA에서 열려야 했다. 이 전시에서 워홀은 <캠벨 수프="" 깡통=""> 연작을 슈퍼마켓 진열대에 놓인 상품처럼 늘어놓았다.  그린버그에게 팝아트는 스쳐 지나가는 ‘일시적 놀라움’, 자극적 소재로 관객의 흥미나 끄는 ‘진기함의 예술’일 뿐이었다. 여기에서 형식주의 ‘미학’은 다다의 반미학 혹은 비미학과 충돌한다. 형식주의자들이 작품의 ‘미학적 특질’을 강조한다면, 팝과 미니멀리즘은 ‘쇼크’나 ‘재미’를 내세운다. 그린버그에 따르면, 이는 무능한 창조력을 진기함의 취향으로 덮어버리려는 것에 불과하다. 그는 아방가르드가 ‘충격의 자동화를 위해 예술 재료들을 더 발전시키는 일을 포기’해버렸다고 한탄한다.  그린버그가 팝아트를 무시한 또 다른 이유가 있다. <아방가르드와 키치="">(1939)에서 그는 몰락하는 부르주아 문화에서 유일하게 보존해야 할 것은 아방가르드뿐이며, 문화 산업의 상품인 키치는 진정한 문화를 천박하게 복제함으로써 대중의 감성을 무디게 한다고 주장했다.  ‘팝아트’는 그 명칭과 더불어 1950년대에 영국에서 탄생했다. 1952년에 결성된 ‘인디펜던트 그룹’은 모더니즘의 엘리트주의에 맞서 광고, 만화, 영화, SF 등 대중문화를 예술에 끌어들였다. 이는 종전 후에도 전전의 모더니즘을 반복하려는 영국 예술계에 대해 젊은 예술가들이 대항하는 방식이었다. ‘팝아트’라는 명칭을 처음 사용한 평론가 로렌스 앨러웨이는 순수예술 역시 대중매체처럼 커뮤니케이션의 한 형태라며, 이른바 ‘예술-팝아트 연속체’를 주장했다.   브리티시 팝의 절정은 1956년 런던의 화이트채플 갤러리에서 열린 ‘이것이 내일이다’전이었다. 열두 개의 작은 전시로 이루어진 이 전시회는 인디펜던트 그룹의 다양한 성향을 반영하여 구축주의, 초현실주의, 기룻과 예술의 접목 등 다양한 양상을 보여주었다. 그중에서 팝아트의 경향을 명확히 드러낸 것은 ‘그룹 투’의 전시였다. 특히 ‘자본주의 스펙터클의 유토피아’를 보여준 해밀턴의 작품은 오늘까지도 브리티시 팝의 아이콘으로 통한다.  하지만 대중문화에 대한 인디펜던트 그룹의 태도는 그것을 긍정하는지, 부정하는지 ‘애매한’것이었다. 적어도 그 점에서 미국의 팝아트는 수미일관했다. 미국의 팝은 영국의 그것과는 별 관계없이 독자적으로 발생했다. 미국의 팝아트에는 영국의 팝아트에는 없는 또 하나의 맥락이 존재한다. 당시 미국 미술계를 장악하고 있던 그린버그의 형식주의 비평과 예술이다. 비록 팝을 통해 구상이 회귀하나, 미국의 팝아트는 실은 ‘구상적 전통보다는 추상적 전통을 계승한 것’이다. 그것은 ‘동시대의 사실주의보다는 엘스워스 켈리나 케네스 놀런드로 대표되는 미국의 ‘탈회화적 추상’과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프로토**-**팝아트에 속하는 재스퍼 존스의 <깃발>을 보자. 이 작품에서 우리는 구체적 대상, 말하자면 성조기를 본다. 하지만 거기에는 공간의 ‘깊이’가 존재하지 않는다. 평면적 물체를 평면에 그렸기 때문이다_._ 이 교묘한 트릭을 통해 존스는 중요한 힌트를 던진다. 즉 그린버그가 말한 ‘평면성’의 원리를 충족시키기 위해 회화가 굳이 추상으로 나아갈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회화가 평면성을 위해 추상이 아닌 구상의 길을 택할 때 팝아트가 탄생한다. 실제로 그린버그는 그의 그림이 보여주는 ‘추상과 재현 사이의 애매함’에 당혹스러워했다.   ‘이미지인 동시에 오브제’인 존스의 회화는 ‘폴록의 유산과 뒤샹의 도발 사이의 모순을 중지’시키고, 두 ‘대립하는 패러다임을 모호하게 결합해 독특한 미술로 발전시켰다.’ 그린버그의 눈에는 그것이 여전히 ‘재현’으로 보였겠지만, 그가 생각하는 것과 달리 존스의 회화는 결코 전통적 의미의 ‘재현’이 아니었다.  레오 스타인버그는 재스퍼 존스의 화면을 평판이라고 부른다. 스타인버그의 주장에 따르면, 서구 회화는 르네상스 이래로 직립 자세로 바라본 자연을 수직의 화면에 담아왔다. 이 점에서 르네상스의 회화와 모더니즘 회화 사이에 본질적 차이는 없다. 그런 의미에서 미술사의 진정한 혁명은 평판화면의 도입을 통해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평판화면은 구상으로든 추상으로든 인간이 직립 자세로 관찰한 ‘자연’을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매스 프로덕션과 매스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산출된 ‘정보를 기록하는’ 표면이다. 여기서 예술의 주제는 ‘자연’에서 ‘문화’로 이행한다. 팝아트의 또 다른 시조로 여겨지는 로버트 라우센버그의 ‘콤바인’ 시리즈 중 하나인 <침대>를 생각해보라. 그는 뉴욕 시내를 걷다가 주운 물건들을 화면에 통합시켰다. 물감을 칠한 그의 침대는 수직으로 서 있지만, 그것은 침대이기에 관찰자는 그것을 수평으로 지각한다고 느끼게 된다.  평판화면 위의 이미지 작업은 시각적 체험이 아니라 조작적 과정에 가깝다. 이를테면, 앤디 워홀의 이미지는 육안으로 본 대상을 그린 것이 아니라, 인쇄된 사진을 그린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것은 ‘대상의 이미지’가 아니라 ‘이미지의 이미지’ 즉, 대상의 시각적 재현이 아니라 시각적 정보의 처리에 속한다.   ‘평판’의 개념으로 스타인버그가 공격하는 것은 바로 그린버그의 모더니즘이다. 그린버그에게 회화의 현대성에의 구분은 르네상스의 환영주의와 모더니즘의 순수주의 사이에 존재한다_._ 이 경우 팝아트는 현대성으로부터의 ‘일탈’ 혹은 ‘퇴행’으로 여겨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스타인버그에게 회화사의 가장 중요한 구별은 수직적 화면과 수평적 평판 사이에 존재한다**.** 이 경우 라우센버그와 재스퍼 존스, 그리고 앤디 워홀의 작업은 르네상스에서 모더니즘까지의 회화적 관습에 종지부를 찍는, 회화사의 중요한 ‘사건’이 될 것이다. 스타인 버그는 팝아트를 **‘**포스트모던 회화**’**라고 불렀다.  라우센버그의 ‘콤바인’이나 재스퍼 존스의 <깃발>은 수작업의 흔적, 즉 작가의 개성적 터치가 남아 있어 여전히 ‘회화적’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들은 팝 아티스트라기보다는 아직 네오 다다이스트에 가깝다. ‘평판’은 인쇄에 사용되는 활자판을 의미한다. 완전한 팝아트가 되려면 작가의 인격적 흔적 없이 화면이 인쇄물의 표면처럼 매끈해져야 한다. 기계적 생산의 익명성이야말로 팝아트의 본질적 특성이기 때문이다. 대량생산품의 느낌을 주는 본격적 팝아트는 리히텐슈타인과 더불어 시작된다.  첫눈에 그의 작품은 산업적으로 생산된 레디메이드, 즉 인쇄된 만화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가 이미지를 복제하는 방식은 생각보다 복잡하다. 기계복제-수작업-기계복제-수작업을 오가며 리히텐슈타인은 어디까지 예술가의 수작업이고, 어디까지 공장제 대량생산인지 구별할 수 없는 지점까지 나아간다. 그의 작품은 레디메이드가 아니라, ‘핸드메이드 레디메이드’다. 이 맥락에서 ‘복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재구성하기 위해’ 드로잉을 하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그것은 작품 제작에 화가의 개성이 개입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 그의 작품에는 아직 ‘복제’라는 산업적 생산과 ‘변형’이라는 예술적 창작 사이의 긴장이 존재한다.   리히텐슈타인은 자신이 차용한 이미지에서 상품명을 제거했다**.** 이는 워홀이 ‘캠벨’, ‘브릴로’, ‘코카콜라’ 등 자신이 차용한 이미지의 상품명을 그대로 사용한 것과 대조된다. 또 상업미술과 거리를 두는 데서 알 수 있듯이, 리히텐슈타인은 여전히 창조성, 독자성의 개념을 고수한다. 반면 워홀은 자신을 **‘**상업미술가**’**라고 불렀다**.**  워홀은 ‘독창성의 신화’를 파괴한다. 그는 제 작품이 독창적이거나 개성적으로 보이기를 원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아틀리에를 공장이라고 부르며 스스로 기계가 되길 원했다. 그는 제 작품이 자기가 없는 자리에서 스태프들이 만들어낸 것처럼 얘기하고 다녔다.  이를테면, 마그리트의 작품 속 사물은 일상적 지각으로 보는 것과는 ‘낯설게’ 나타난다. 마그리트의 이미지는 반복을 통해 평범한 사물을 비범해 보이게 해주나, 워홀은 단지 그것들을 지극히 ‘평범하게’ 그리려 할 뿐이다.  벤야민에 따르면, 현대인은 상사에 대한 감각이 너무 발달하여 유일물에서조차 복제를 통해 아우라를 벗겨내고 싶어 한다. 지루하게 반복되는 워홀의 이미지는 이 달라진 지각의 욕망을 보여준다. 벤야민이 발견한 이 현대적 지각의 특성은 1960년대에 이르러 비로소 온전히, 하지만 벤야민의 기대와 달리 자본주의적, 소비주의적 방식으로 실현되었다. ……파괴되는 것은 이미지의 아우라만이 아니다. 작가의 아우라마저 파괴한다.  모더니즘 예술가들은 체제에 맞서 자신의 개인 성벽을 관철시키려는 전복적 특성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워홀은 자신을 대중 문화의 스타로 이해할 정도로 철저하게 자본주의 체제에 ‘순응적’이었다. 주체가 해체되고, 역사는 종언을 고하며, 정치가 사라지는 것이 포스트모던의 조건이다. 워홀은 1980~1990년대에 대중의 태도로 일반화되는 정신적 자세를 준비했다고 할 수 있다. 미국의 미학자 아서 단토는 워홀의 첫 전시회가 열린 1962년을 특별한 해로 기억한다. 그에게 워홀의 등장은 모더니즘의 종언, 그리고 ‘포스트모던’의 개막을 알리는 하나의 사건이었다.   팝아트가 그 세상을 바라본다는 데서 추상회화화 달리 팝아트에 ‘주제’가 있음을 의미한다. 팝아트와 더불어 주제가 복귀하는 것이다. 하지만 몇십 년만 만에 회화로 복귀한 주제는 더 이상 ‘원본’이 아니었다. 그것은 복제로, 정보로 귀환했다. 팝아트 속에 등장하는 이 주제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할 포스터는 두 가지 방식을 제시한다. 하나는 ‘지시적인 것’으로 읽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허상적인 것’으로 읽는 것이다.  후기 구조주의자들은 워홀의 이미지를 ‘허상’으로 읽는다. 바르트에 따르면, ‘팝아트가 원하는 것은 대상을 탈상징화하는 것’이다. 즉 ‘이미지를 심오한 의미로부터 해방시켜 허상적인 표면으로 나아가는 것’이 팝아트의 전략이라는 것이다. 이 해석은 ‘똑같은 것을 보면 볼수록 의미는 점점 더 사라진다.’는 워홀 자신의 언급으로 뒷받침된다. 푸코, 들뢰즈, 보드리야르도 팝의 이미지를 아무것도 지시하지 않는 시뮬라크르의 표면으로 읽는다.  하지만 워홀의 작품 중 어떤 것은 의미 없는 이미지의 표면으로 설명하기에는 너무나 무거운 주제를 갖고 있다. 이를테면, 자동차 사고, 흑인에 대한 린치, 사형 집행용 전기의자 등 초기의 <죽음> 연작은 특히 다양한 해석의 원천이 된다. …… 이는 미디어가 인간의 지각을 둔감하게 만든다는 냉소적인 비판인가? 아니면 순응적 긍정인가?  토머스 크로는 적어도 워홀의 몇몇 이미지는 진지하게 세계를 지시한다고 말한다. …… 크로의 해석에 따르면, 언뜻 냉담해 보이는 워홀은, 적어도 특정한 기간 동안에는, 리얼리스트이자 참여예술가가 된다.   할 포스터는 서로 상반되는 두 해석의 종합을 모색한다. 라캉의 정신분석학을 도입하여 워홀을 독특한 종류의 ‘리얼리스트’로 만드는 것이다. 포스터에 따르면, 1960년대에 일어난 ‘실재의 귀한’은 그저 추상에 밀려 사라졌던 구상이나 환영의 부활을 의미하는 게 아니다. 회귀한 것은 실재가 아니라 라캉이 말하는 실재계라는 것이다.   포스터는 워홀의 팝아트를 ‘외상적 리얼리즘’으로 해석한다. 워홀의 반복은, 포스트구조주의의 해석처럼 순수 기표들의 순환이라는 의미에서 ‘복제’가 아니라, 외상적 실재계를 가리는 스크린의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워홀의 작품이 그저 실재계를 가리는 것으로 끝나는 것은 아니다. <죽음> 연작에서 일차적 충격은 이미지에 가려지지만, 동시에 이 반복이 이차적 외상을 산출한다. 이때 푼크툼이 스크린을 뚫고 나오면서 실재계가 드러난다. …… 이 경우 우리는 워홀의 초기 이미지를 포스터의 말대로 ‘비판적이면서 동시에 무심한 것으로’ 읽어낼 수 있을 것이다.  상황주의 인터내셔널 팝아트가 소비자본주의에 순응적이었다면, 상황주의자들은 소비자본주의를 ‘물화’와 ‘소외’의 상태로 규정하며, 물질적 욕망이 진정한 삶을 집어삼켜버린 그 거대한 매트릭스의 세계에 저항하려 했다. 변화한 자본주의에 맞서 상황주의자들은 전통적 마르크스주의를 소비자본주의의 현실에 맞추어 갱신하고, 다다이즘과 초현실주의라는 전전의 혁명적 예술운동을 계승하되 동시에 그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예술을 (삶 속에서) 실현함으로써 예술을 폐지하려 했다. 이 목적을 위해 소비자본주의의 산물을 패러디하여 소비자본주의를 공격하는 전환의 전략을 사용했다. 상황주의는 전후의 유일한 혁명적 아방가르드였다.   모더니즘은 예술운동이자 정치운동이었다. 프랑스의 초현실주의, 러시아의 미래주의와 구축주의, 독일의 바우하우스는 사회주의 운동에 동조했다. 하지만 종전 후 모더니즘의 중심이 미국으로 옮겨가면서, 예술은 이 정치적 급진성을 잃는다. 보수적인 미국 사회에 받아들여지려면 현대미술은 자신이 위험한 좌익임을 부정해야 했다. 트로츠키주의자였던 그린버그 역시 전후에는 ‘아방가르드’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게 된다. 그의 ‘모더니즘’은 정치성이 결여된 순수한 형식주의에 가까웠다. 그에게 더 이상 ‘모더니즘은 결코 과거와의 단절 같은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로써 사라진 것은 ‘삶과 예술의 경계를 허물고 삶 속에서 예술을 실현한다.’는 아방가르드의 유토피아 기획이다.  다다와 초현실주의는 그사이에 미술계의 주류로 제도화되었고, 아방가르드가 한때 연대했던 사회주의는 이미 오래전에 환멸의 대상으로 전락해갔다. 그러는 사이에 전후의 자본주의는 새로운 발전 단계에 접어든다. 전후의 마셜 플랜과 더불어 시작된 경제 붐을 통해 유럽 사회도 완전히 ‘소비’자본주의로 모습을 바꾼다.   이 변화를 반영하는 예술이 바로 ‘팝아트’다. 모더니즘 예술과 달리 팝아트는 처음부터 체제에 순응적이었다. …… 하지만 유럽에서 정치적 아방가르드 운동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그 대표적인 예가 1957년에 결성된 ‘상황주의 인터내셔널**’**이다. SI그룹의 업적은 전후의 변화된 환경 속에서 “소비자본주의를 비판할 수 있는 일종의 문화정치학’을 제공해준 데 있다. 그런 의미에서 상황주의 인터내셔널이야말로 팝아트의 진정한 안티테제였다고 할 수 있다_._   상황주의 운동은 정치적으로는 마르크스주의를 갱신하고, 예술적으로는 아방가르드 운동을 부활시켜, 소비자본주의라는 변화한 환경 속에서 양자를 재통합하려 했다. …… 그들의 목표는 ‘상황의 구축, 즉 현재의 생활 환경을 구체적으로 구성하고, 그것들을 더 높은 열정적 특질로 변형시키는 것’에 있었다.  상황주의에 이론적 토대를 제공한 것은 기 드보르로, 그의 저서 <스펙터클의 사회="">는 상황주의 운동의 강령으로 통한다.  이 책은 독일의 철학자 포이어바흐가 기독교를 비판하는 구절을 인용하며 시작한다.  ‘사태보다 영상을_,_ 원본보다 복제를_,_ 현실보다 표상을_,_ 본질보다 가상을 선호하는 이 시대에는_……_ 환영만이 성스럽고_,_ 진리는 속되다_. ……’_  포이어바흐에 따르면, 신이란 인간이 자신의 긍정적 본질을 허공에 투사한 것에 불과하다. 투사를 할수록 신은 성스러워지고, 인간은 비참해진다. …… 포이어바흐가 신이라고 부른 것을, 드보르는 ‘스펙터클’이라고 부른다. 스펙터클은 이미지로 물화된 인간들 사이의 사회적 관계하다. 자신의 삶을 이미지로 투사할수록 허구의 삶은 풍부해지고 진정한 삶은 공허해진다. 후기 자본주의사회의 물화는 인간의 소외를 불러온다. …… 상황주의 인터내셔널은 소비자본주의 하에서 일어나는 이 인간의 자기소외와 인간관계의 물화에 대항하여 진정한 삶, 즉 허구적 욕망의 복제가 아닌 삶의 원본을 복원하려는 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SI의 모태는 두 개의 예술가 조직이었다. 하나는 드보르가 이끄는 ‘문자주의 인터내셔널’이다. 이들은 찰리 채플린의 기자회견을 방해하거나 에펠탑의 폭파를 공언하는 등 부르주아사회에 충격을 주는 일련의 스캔들을 연출했다.   이시도르 이주의 ‘문자주의 그룹’은 주로 텍스트와 이미지를 해체하는 콜라주 작업을 해왔다. 이는 전형적인 다다의 기법이다. 다만, 이들은 그 작업을 정치적 목적에 전유하려 했다는 점이 다르다. 드보르의 ‘일하지 말라’라는 낙서는 훗날 68운동의 슬로건이 된다.   SI의 또 다른 축은 ‘상징주의 바우하우스’다. 이 그룹의 모태는 코펜하겐, 브뤼셀, 암스테르담을 근거로 활동했던 코브라 그룹이다. 이들의 탈구상 회화는 초현실주의에 가까웠으나, 초현실주의의 무의식이 너무 ‘주관적’이라고 거부하고, 집단적-사회적인 공공의 기획을 강조했다. 하지만 미국의 추상회화를 보며 ‘자신들의 미학적 자원이 미국의 경제적,군사적 지배를 암암리에 긍정하는 발판으로 변형될 수 있음을 간파한다. …… 결국 ‘혁명적 창조성의 이상을 표현할 대안적 수단’을 찾지 못한 채 코브라 그룹은 1951년 해체된다.  1953년 막스 빌이 바우하우스의 재건을 위해 코브라 그룹의 아스게르 요른을 찾는다. …… 상상주의 바우하우스의 목표는 “이미 고갈된 회화의 한계를 넘어 건축과 도시 디자인으로 나아가는 것’이었다. 1957년 문자주의 인터내셔널과 상상주의 바우하우스가 통합하여 마침내 상황주의 인터내셔널이 출범한다.   다다는 반미학이라는 ‘순전히 부정적 규정 때문에’ 예술을 공격하다가 스스로 해체되었다. 초현실주의는 예술을 실현했으나 결국 예술계 안에서 하나의 ‘양식’이 되었다. 어느 것도 예술을 삶에서 실현하지 못했다. 이 실패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상황주의는 예술의 변증법적 지양, 말하자면 예술의 ‘실현’이 곧 예술의 ‘폐지’가 되는 상황을 추구해야 한다.  ……  체제를 위협하는 급진적 요소를 길들여 다시 체제 내에 포섭시키는 것을 정치학에서는 ‘회복’이라고 부른다. 사실 드보르가 그룹의 해체를 선언한 것도 이미 그 시점에 ‘회복’이 완성되었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야수주의  세잔이 20세기에 속했다면, 야수주의와 더불어 최초로 20세기의 예술운동이 시작된다. 야수주의 운동의 요체는 회화의 논리를 전통적  ‘인상론’에서 ‘표현론’으로 바꾸어놓은 데 있다. 야수주의 이후 화면 위의 이미지는 ‘밖’에서 ‘안’으로 들어오는 인상이 아니라, ‘안’에서 ‘밖’으로 나가는 표현으로 여겨지기 시작한다. 야수주의의 화면은 모사 대상의 색깔을 닮을 의무에서 벗어나 자율적인 원색의 향연이 된다. 야수주의가 일으킨 이 색채의 해방이야말로 20세기 회화가 르네상스 이후 400년 동안 예술의 공리로 군림해왔던 재현의 의무에서 벗어나는 첫걸음이었다. 1905년 ‘살롱 도톤’ 루이 보셀이라는 비평가가 마티스와 드랭, 블라맹크의 작품이 걸린 전시장을 둘러보다가 전시실에 생뚱맞게 놓인 피렌체 양식의 흉상을 보고 ‘짐승들 사이의 도나텔로’라고 한 데서 비롯. 결국 이 명칭이 색채의 해방을 일으킨 유럽 최초의 아방가르드 운동의 이름이 된다.  야수주의는 인상주의나 입체주의처럼 뚜렷한 원리와 목적을 가진 ‘운동’은 아니었다. 야수주의에서 가장 눈에 띄는 효과는 역시 색채의 강렬함이다. 그들은 사물의 실제 색의 관계없이 원색을 사용했을 뿐 아니라 질서 정연한 구성을 통해 화면의 전체적 효과를 강조했다. 그 결과는 의도와 상관없이 혁명적이었다. 후기 인상주의까지 내려오던 환영주의 전통과 결별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룹을 주도한 사람도 마티스였고, 도중에 일탈하지 않고 운동을 끝까지 밀고 나간 사람 역시 마티스였다. 야수주의는 인상주의와 결별한 최초의 아방가르드 운동이라 하나, 정작 마티스에게는 아방가르드 의식이 없었다. 외려 그는 ‘교육 받은 부르주아만이 선구적 예술에 호응할 수 있다.’며 자신의 작품이 ‘지친 사업가에게 편안함을 주는 안락의자’가 되기를 바랐다. 처음으로 야수주의 경향을 드러낸 작품은 <사치, 고요, 쾌락>이다. 원색의 강렬한 효과에도 불구하고, 기법적으로는 아직 쇠라의 분할주의를 사용하고 있다. 그의 야수주의로의 전환점을 알리는 것은 <삶의 기쁨="">이다. 분할주의적 성격을 완전히 벗어 던지고 두꺼운 윤곽선이 색면을 감싼다. 마티스에게 점묘법을 알려준 시냑은 이 그림을 보고 그에게 크게 실망하였다고 한다. 이는 마티스가 신인상주의와 결별했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하지만 전통과 단절하는 것이 마티스의 의도였던 것 같지는 않다. 그 두꺼운 윤곽선은 실은 또 다른 후기 인상주의자, 고흐와 고갱의 영향을 반영하기 때문이다. ‘살롱 도톤’ 전에서 야수주의에 대한 비난은 마티스의 <모자를 쓴="" 연인에=""> 집중됐는데, 이처럼 한 장의 그림이 스캔들이 된 것은 마네의 <올랭피아> 이후 처음이었다.  마티스의 야수주의 양식은 후기 인상주의의 여러 흐름을 두루 실험하는 가운데 탄생했다. 그는 세잔에게서 ‘총체화하는 장으로서 회화적 표면’의 개념, 쇠라에게서는 분할주의, 즉 점묘법을 배운다. 고흐에게는 선의 두께와 간격을 조정해 선의 효과에 미세한 차이를 주는 법을, 고갱에서는 사물의 객관적 색깔에 관계없이 대담하게 주관적 색채를 구사하는 법을 배운다. 원근법을 없애서 화면을 장식적 단위로 응축시키는 것도 그가 고갱에게서 배운 또 다른 교훈이다.  마티스는 점묘를 포기함으로써 인상주의와 결별할 수 있었지만, 사실 야수주의를 특징짓는 원색의 사용은 점묘의 분할주의에서 비롯된 것이다. 예를 들어 ‘점묘파’라 불리는 신인상주의 화가들은 팔레트 위에서 색을 섞는 대신 화면에 원색의 점들을 병치시킨다. 이 때-고흐나 고갱처럼-색채의 모사 기능을 제쳐두고 원색 자체의 표현성을 강조하면 야수주의 특유의 표현에 돌달하게 되는 것이다.  <붉은 조화="">에서는 창밖의 풍경과 방 안의 장면이 같은 깊이에 놓여 있는 것처럼 보인다. 방 안의 사물들도 이미 깊이를 잃었다. 이처럼 원근법적 깊이를 없애고 화면을 장식적 단위로 바꾸어놓는 것은 물론 고갱의 영향이리라. 이로써 화면은 ‘밖’의 세계를 재현하기보다는 차라리 자기 ‘안’에서 색채의 자율적 유희가 된다. 마티스를 후기 인상주의와 구별시켜주는 결정적 차이가 바로 이 **‘**회화의 자기 충족성에 대한 믿음**’**이다**.**  후에 그는 ‘질서로 회귀’하기도 하였으나 말년의 종이오리기 작품에서는 온전한 추상에 접근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때조차도 그의 작품에는 언제나 한 자락 재현의 뉘앙스가 남아 있다. 그에게 ‘추상의 뿌리는 실재에’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무엇을 그리든, 그는 외부의 ‘재현’보다는 언제나 내면의 ‘표현’을 더 중요하게 여겼다. 그는 조화를 위해 부분을 전체에 종속시키는 ‘유기적’ 예술 작품이라는 전통적 이상을 좇았다. 재현보다 표현 요소들의 배치에 관계를 더 기울일 떄, 회화는 장식적 성격을 띠게 된다. 하지만 회화의 본질을 장식으로 환원시키는 데는 치명적 위험이 따른다. 회화가 사소한 일로 전락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 느슨한 운동에 참여한 다양한 화가들을 하나로 묶어준 것이 있다면, 이처럼 색채를 그림의 테마로 삼아 재현의 한계를 뛰어넘으려 한 시도였다. 하지만 야수주의는 뚜렷한 강령이 없는 느슨한 모임이었기에, 1906년에 절정에 달한 후 1908년을 기점으로 급속히 해체되기 시작한다. 그들 스스로 색채의 향연이 너무 방만하게 느껴진 모양이다. 그들은 영원한 발작 상태에 머물 수는 없었고, 결국 색채 해방을 위한 끊임없는 탐구는 탈진하고 만 것이다.  마티스만이 끝까지 자기 노선을 고수했을 뿐, 다른 화가들은 야수주의를 각자  창작의 과도기로 여겼다.  야수주의와 표현주의는 강렬한 색채와 즉흥적 터치로 재현보다 표현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서로 통하나, 둘 사이에는 또한 무시할 수 없는 차이가 있다. 야수주의가 회화적 조직의 형식적 측면에 집착한다면, 표현주의는 근원적 순수성이라는 정신적 주제에 주목하기 때문이다. 인상주의에서 나온 야수주의가 망막적이라면, 상징주의에서 나온 표현주의는 영적이다. 둘 다 아프리카 원시미술에 관심을 가졌지만, 야수주의가 거기서 형태와 색채의 강렬한 표현성을 보았다면, 표현주의는 그 표현의 소박함에서 아직 순수했던 인류의 유년기를 그리워할 것이다. 입체주의 색채의 해방은 형태의 해방으로 이어질 수 밖에 없다. 한때 야수주의에 가담했던 브라크는 야수주의를 떠나 피카소와 더불어 입체주의 운동을 시작한다. 입체주의가 분석적 단계에서 색채를 포기하고 모노크롬에 가까워진 것은 이 운동이 처음부터 색보다는 형의 문제에 집중했음을 의미할 것이다. 하지만 입체주의의 목표는 그보다 더 높은 데 있었다. 그것은 르네상스 이후 400년 동안 회화를 지배해왔던 원근법적 공간 자체를 무너뜨리는 것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입체주의는 글자 그대로 회화의 ‘혁명’이었다고 할 수 있다. 야수주의의 영향이 비교적 제한적이었다면, 입체주의는 20세기에 나타난 거의 모든 예술운동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아폴리네르에 따르면, ‘입방체’라는 표현을 처음 사용한 사람은 마티스였다고 한다. 입방체가 있다고 말한 그 그림은 브라크가 에스타크에서 그린 풍경화를 가리킨다. 브라크는 이 작품을 ‘살롱 도톤’에 출품하나, 심사위원이던 마티스에게 거절당한다. 이 이야기를 들은 보셀이 마티스의 표현을 기사에 인용한 것이 우연히 새로운 유파의 이름이 된 것이다.  …… ‘야수주의’와 마찬가지로 ‘입체주의’ 역시 조롱의 표현일 뿐, 이 유파의 양식적 특성을 보여주지는 못한다. ‘입체주의’는 피카소와 브라크의 긴밀한 협력으로 탄생했다. 브라크와 피카소는 세잔의 구축적 질서 속에 ‘균열’이 있다는 것에 주목했고, 그 시점의 균열 속에서 서양 회화 400년의 전통을 파괴할 잠재력을 보았다.  인상주의의 화면에서 대상은 빛이 되어 그 육중함을 잃고 배경 속으로 사라지는 경향이 있다. 세잔은 언젠가 대상을 원추, 원통, 구로 간주하라고 말했다. 이는 대상에 촉각적 성질, 그 육중한 느낌을 되돌려주려는 시도에서 빚어진 형상이다. 세잔은 인상주의자들까지 여전히 유지했던 원근법이 자연을 실제 우리 눈에 보이는 대로 보여주지 못한다고 느꼈다. 그리하여 그는 ‘이것이 내가 보는 것이다.’라는 단언을 ‘이것이 내가 보는 것인가?’라는 물음으로 대체했다. 문제는 ‘자연이 우리를 건드리는 방식을 가시화’하는 것이다. 자신의 묘사가 성공했다는 확신이 들 때까지 그는 같은 대상을 그리고 또 그렸다. 이처럼 자연의 참모습에 번민하며 자신의 묘사에 늘 의심을 갖는 것, 이것이야말로 세잔에게서 영웅적인 것이며, 이 영웅적 태도가 입체주의 이후의 모든 모더니즘 예술의 초석을 이룬다. 피카소의 <아비뇽의 처녀들="">은 아프리카 조각의 영향을 보여준다. 이 그림을 입체주의의 출발이라 하지만, 사실 그리 입체주의적이지 않다. 색깔에 따라 구분하자면, 청색시대(1901~1904)와 장미시대(1904~1906)에 이어지는 흑인시대(1907~1909)에 속한다. 세잔의 <욕녀>를 참조, 결정적 원천은 아프리카 조각.  당시의 화가들은 그동안 서양미술을 지탱해온 인간 형상의 전통이 마침내 고갈됐다고 느끼며, 새로운 생명력의 원천을 아직 때 묻지 않은 원시 문명에서 찾으려 했다. 아프리카조각에 매료된 후 그는 ‘흑인시대’로 들어서게 된다. <처녀들>에서 가장 충격적인 요소 역시 아프리카 마스크를 담은 여인들의 기괴한 얼굴일 것이다. 하지만 원시미술에서 강력한 표현력을 본 야수주의자들과 달리, 피카소는 거기서 형을 만들어내는 원리에 주목했다. 자연주의적 묘사보다 제재에 관한 아이디어를 더 강조할 때, 상징성이 강한 추상적이고 양식화한 형태가 등장하게 된다. 물론 이 역시 입체주의가 성립하는 데 필요 조건이지, 충분한 조건은 아니다. 입체주의에 이르려면 ‘복수의 가변적 시점과 공간의 촉각적 처리’가 필요한데, 그것은 세잔의 화폭에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공간의 해체라는 측면에서 세잔의 중요성을 먼저 인식한 것은 브라크로 보인다. 세잔은 공간을 해체하려는 의도가 없었다. 그는 오히려 복수의 시점을 화면 안에서 ‘봉합’하려 했다. 반면, 브라크는 시점들 사이의 ‘균열’에 주목했다. 그 균열의 극한에서 새로운 유형의 공간이 탄생할 가능성을 보았기 때문이다.  전통적 환각주의를 거부함에도 불구하고 세잔의 작품에는 손으로 만지는 듯한 느낌의 촉각적 사실성이 존재한다. 여러 시점이 공존하는 그의 작품은 마치 안구나 신체를 움직여 지각하는 것 같은 느낌을 주는데, 바로 이것을 촉각적 공간이라고 한다. 여기서 입체주의가 ‘현실’의 개념 자체를 시각적인 것에서 촉각적인 것으로 바꾸어놓으려 했음을 알 수 있다.  브라크의 <에스타크의 집들="">은 세잔의 영향을 여실히 보여준다. 다수의 시점의 공존으로 원근법적 질서에서 풀려나온 집들이 마치 대강 쌓아놓은 입방체처럼 어지럽기만 하다. …… 본격적인 입체주의는 바로 그 지점에서 시작된다.  이 시기의 둘의 그림은 자기들조차 놀랄 정도로 비슷하다. 색은 부피를 묘사하는 데 도움을 주는 역할 뿐이라며 색채 또한 무시되는 경향을 보인다. 화면은 추상으로 치달으면서 둘의 작업은 아예 구별할 수가 없을 정도가 된다. …. 이들은 작품에 사인을 하지 않기로 서로 약속을 한다. 이는 훗날 예술가의 주체성을 부정하는 뒤샹과 워홀의 제스처를 연상시킨다.  그려진 기호가 너무 추상화하여 지표의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게 되자, 둘은 대상을 암시하고 공간을 환기하는데 아예 실물을 끌어들이게 된다. 이를 ‘종합적 큐비즘’이라고 한다. 그들은 종이를 먼저 도입하는데, 이를 ‘파피에 콜레’라고 한다. 화면이 거의 추상에 도달하자, 방향을 바꾸어 거꾸로 추상에서 재현을 향해 나아간 것이다. 그들은 현실로 이어지는 끈을 놓으려 하지 않았다. 피카소는 일전에 ‘인간은 자연의 도구다.’라고 말한 바 있듯이. 아폴리네르는 돌로네와 레제, 피카비아를 ‘오르픽 입체주의’로 분류했다. 그 이름 안에는 이들이 오르페우스의 예쑬, 즉 음악을 닮은 순수회화를 지향한다는 뜻이 담겨 있다. 아폴리네르는 이들을 여전히 ‘입체주의자’라고 불렀지만, 정작 그들은 입체주의를 넘어 순수추상으로까지 밀고 나가려 했다. 이렇게 회화가 순수한 형과 색의 유희로 되는 경향은 분석적 입체주의에서 이미 나타났던 것이다. 그 앞에서 피카소와 브라크는 구상으로 회귀했지만, 그 가능성이 한번 열린 이상 회화가 추상의 극한으로 나아가는 것은 역사적 필연이었다.  마리네티가 <미래주의 선언=""> 1909 양식보다 선언을 먼저 함 자신들의 언어가 미래주의적이지 못함을 깨달음 움베르토 보초니, 카를로 카라는 피카소와 브라크의 작업실을 방문하여 당시 가장 앞선 미술인 입체주의를 배움. 미래주의자들에게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주었고, 그 이후 뒤샹에게서 시간에 대한 새로운 접근법의 암시를 얻었고, 레제에게서 기계문명의 현대적 표현에 대한 감각을 배움. 입체주의와의 경쟁의식 속에서 고유의 미래주의 양식을 발전시켜 나감. 피카소의 <녹슨 기타=""> 는 입체적 구성으로 형성된 ‘열린 구축물’  조각의 개념을 바꾸어 놓았고, 이는 타틀린이 주도한 러시아 구축주의의 시발점이 되었다. 순수추상  색의 해방과 형의 해방, 나아가 원근법적 공간의 해체 속에는 또 다른 회화의 가능성이 내포되어 있다. 아무것도 재현하지 않는 순수회화의 가능성이다. 입체주의가 포기한 것은 ‘원근법적’ 재현일 뿐, 그것이 재현 자체를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피카소와 브라크는 입체주의를 원근법보다 더 참된 재현으로 이해했다. 입체주의의 분석적 단계에서 화면은 거의 순수추상에 근접한다. 피카소와 브라크는 거기서 한 걸음 물러나 다시 재현으로 돌아가고, 그로써 입체주의의 종합적 단계로 이행한다. 하지만 칸딘스키는 거기서 용감하게 걸음을 내디뎌 최초로 순수회화에 도달한다. 일체의 재현을 포기하고 순수한 색과 형의 유희가 됨으로써 회화는 완전한 자율성에 도달한다.  현대미술에서 최초의 추상으로 여겨지는 것은 제목이 없는 칸딘스키의 수채화다. 들로네, 피카비아, 레제, 쿠프카 등 아폴리네르가 ‘오르픽 큐비즘’이라고 불렀던 이들, 그 중에서도 쿠프카가 가장 추상에 앞섰고 칸딘스키와 쿠프카는 자신의 추상을 신지학이라는 신비주의 사상으로 뒷받침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거의 동시에 같은 수준의 추상에 도달하나, 일관되게 그것을 밀고 나간 것은 ‘칸딘스키, 말레비치, 몬드리안’이라고 할 수 있다. 셋 중에서 가장 앞선 이는 물론 칸딘스키였다. 특히 그가 쓴 <예술에서 정신적인="" 것에="" 관하여="">는 당대 수많은 화가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쳐, 현대미술이 순수회화, 즉 색과 형으로만 이루어진 비구상으로 나아가는 데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모네의 <노적거리>: 형을 알아보지 못해 기분이 상했고, 막연하게나마 그 그림에 대상이 없음을 의식 바그너의 오페라 관람: 새로운 음의 관현악에서 색과 선의 공감각을 체험  미술의 추상성에 눈을 뜨게 되는 칸딘스키의 일생일대의 사건 법학자, 30세의 늦은 나이로 화가가 되었음 야수파, 입체파의 화풍을 접하여 현대미술의 이정표로 간주 자신의 그림이 옆으로 뉘인 것을 보고 마침내 비구상을 탐구하게 되었다. 형식주의자 즉, 예술을 위한 예술 추구하지 않음, 예술가의 영혼, 정신적인 것을 전달하고자 했다. 독일: 철학적 전통, 헤겔의 절대정신, 쇼펜하우어가 예술이 인간을 잠시나마 현상을 넘어선다는 것. 신지학의 영향, 묵시론적 주제, 종말론의 분위기를 담고 있음. 보링거의 <추상과 감정이입="">: 추상 충동은 외부 세계의 현상이 인간 내면에 초래한 커다란 내적 불안의 산물. 마치 원시예술처럼, 현대예술이 원시예술로 돌아감. 다른 점은 인식 이전의 현상이 아닌, 인식 이상의 현상 아무것도 재현하지 않는 회화를 정신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실마리: 음악. 현실을 재현하지만 깊은 정서적 울림과 정신적 감동을 줌, 칸딘스키는 음악을 현대회화의 모범으로 제시한다. 비물질적 예술, 회화에서 대위법을 구성하고자 함 괴테의 직관적 색채론 참조, 따듯함과 차가움, 밝음과 어둠. 상징주의에서 유래- 신지학의 용어로 재해석, 이미지와 사유 사이에 모종의 ‘공명’이 존재한다. 이로써 색채와 형태 역시 음악처럼 우리 영혼에 ‘떨림’을 줄 수 있다고 생각. 세 단계: 인상, 내적 자연, 구성 후에 회화의 문법을 수립하는 작업에서 차가운 이성의 작업으로 변모. 추상과>노적거리>예술에서>녹슨>미래주의>에스타크의>처녀들>욕녀>아비뇽의>붉은>올랭피아>모자를>삶의>스펙터클의>죽음>죽음>깃발>침대>깃발>아방가르드와>캠벨>세>예술-언어>붉은>숭고는>하나임1>모더니즘>더>예술의>예술과>모더니즘>아방가르드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