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 텍사스

빔 벤더스의 파리 텍사스를 3번째로 보았다. 문득 이 영화가 거리에 대한 영화라는 생각이 들었다.

트래비스와 월터의 거리

월터는 4년 만에 자신을 텍사스 한복판으로 불러내고는, 한 마디도 않는 트래비스를 나름의 인내심으로 대한다. 그는 트래비스가 먼저 이야기를 꺼낼 수 있도록 기다리며, 불편한 주제는 꺼내지 않으려 노력한다. 물론 차로 이틀이 꼬박 걸리는 거리를 비행기를 타지 않는다는 그를 보며 결국 폭발하고 말지만,나는 그가 관대한 편이라고 생각한다. 처음에는 뒷좌석에 앉았던 트래비스는 이내 마음을 열더니 조수석에 앉고 나중에는 그 대신 운전을 하기도 한다.

트래비스와 헌터의 거리

  1. 트래비스는 긴 방황을 잠시 중단하고, 동생에게 맡겨두었던 자신의 아들 헌터를 4년 만에 만난다. 그는 아들과 대화를 하고 싶다는 마음에 하굣길에 함께 걸어서 집으로 돌아오자고 제안한다. 그러나 아들은 ‘요즘 누가 걷느냐’며 불편한 기색을 내비치더니, 학교 앞에서 기다리는 트래비스를 못 본 채하고 친구의 차를 얻어 탄다.
  2. 그날 저녁, 트래비스의 동생 월터는 4년 전에 가족 여행을 떠났던 때에 찍어둔 필름을 함께 보자고 권한다. 어릴 적 트래비스와 손을 잡고 놀던 영상을 본 헌터는, 그가 자신의 아빠임을 실감한다. 복잡한 심정으로 과거를 회상하는 트래비스을 보며 서서히 마음을 열기 시작하고, 헌터는 그에게 ‘잘 자요 아빠’라며 저녁 인사를 건낸다. 영화 30분 내내 아무 말도 않던 트래비스는 그 날 설거지를 하며 노래를 흥얼거린다.
  3. 트래비스는 헌터의 하교길에 다시 나타난다. 이번엔 헌터도 도망치지 않는다. 다만 너무 가깝지는 않게, 반대편 도로에서 나란히 걷는다. 집으로 향하는 높은 언덕을 거의 다 오를 때가 되어서야 둘의 거리는 손을 잡을 듯 말 듯할 정도로 좁혀진다.
  4. 트래비스는 (전)아내 제인을 찾으러 나선다. 헌터는 자신도 엄마를 함께 찾겠다고 말한다. 이 때부터는 트래비스에게 마음의 문을 활짝 열었는지, 그가 운전하기에 불편할 정도로 옆에 기대어 잠을 잔다.

헌터와 제인의 거리

트래비스는 헌터를 월터에게 두고 떠났던 아내 제인에게 헌터를 되돌려 주려고 한다. 관객 입장에서는 아들을 이미 한 번 포기한 그녀에게 왜 다시 헌터를 돌려주려는 것인지 이해가 가질 않는다. 트래비스의 ‘서로에게 서로가 필요하다’는 말은 좀처럼 납득이 가질 않는다. 그러나 헌터가 엄마를 처음 만나는 순간, 고민도 않고 엄마를 와락 끌어 안는다. 영화는 이런 방식으로 둘에게는 애초에 거리가 필요 없는 사이임을, 항상 서로가 서로를 마음 깊이 그리워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굉장히 단기간에 쓰인 각본이라고 들었다. 그래서 트래비스와 제인의 관계를 말하는 부분은 통속적이고, 잘 와닿지 않는다. 빔 벤더스의 연출로 그것을 얼버무리지만 분명히 찝찝한 구석이 남아 있는 영화다.

그의 전작들을 보니, 미국과 자본주의에 대한 내용이 이 영화에도 얼핏 스며들어 있다는 것을 느낀다. 비행기를 타지 않겠다는 트래비스, 육교에서 세상의 종말을 외치는 남성과 뜬금 없이 망원경으로 미국 국기를 쳐다보는 장면 등이 그랬다.


그 누구보다 서로를 사랑했던 제인과 트래비스는 유리벽을 넘지 못한다. 그 누구보다 가까웠지만 다시 함께할 수 없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