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24시 순댓국밥집에서

너는 약속에 늦었는데 약속에 늦은 사람은 너뿐이 아니었고 결국엔 네가 날 기다렸고 오는 길에 배터리가 다 닳았다고 내가 말했다

추억이 기억을 삼킬 수는 없다고 내가 말했는데 너는 오래전 일을 꺼냈고 그건 우리의 대화를 한정 지으려는 너의 계략이었다

음식을 나누어 먹겠냐고 네가 나에게 물었을 때 그제야 나도 기억이 되살아났고 되살아난 기억은 네가 말한 것과는 다른 성질의 것이어서 오랫동안 네가 생각해왔던 건 네가 지금 기억하는 것은 어디서 비롯된 걸까 나는 거기에까지 생각이 미치자

배가 고팠고 너는 주문을 하고 있었다

사이다와 콜라 중에 무엇을 마시겠냐는 질문은 네가 나에게 가장 많이 했던 질문 중 하나였고 나는 그때마다 다른 대답을 했다 오늘의 너와 어제의 너는 분명 다른 사람이니까 오늘이 콜라면 내일은 사이다니까

네가 국물을 먼저 맛보았고 새우젓을 넣고 국물을 휘저으며 경우는 달라도 마음은 같아야 한다고 말했다 그게 무슨 뜻일까 한참을 생각하다가 깍두기를 깨물었다

늦은 밤이었고 손님은 우리밖에 없었다


02. 2인분의 풍경

영화는 이미 시작되었다 우리가 놓친 B 상영관의 문은 닫혀 있고 앞을 지키는 직원은 이미 가고 없었지만 우리는 몰래 들어가지 않기로 했다 같은 영화가 1시간 20분 뒤에 G 상영관에서 상영될 예정이었지만 우리는 김빠진 콜라처럼 금세 내려간 엘리베이터를 다시 잡았다 밝았다, 너무 밝아 영화를 보고 나온 것도 아닌데 바깥은 눈을 뜨기 어려울 만큼 밝았고 배가 고팠다

우리는 건너편에 있는 샤브샤브 집으로 향했고 2인분을 주문했다 나는 2인분의 만두가 왜 5개인지 영영 모를 일이라고 생각하고 맛있다, 맛있어 네가 음식을 씹지도 않고 말했다 나는 네가 약속에 늦은 것을 미안해하느라 분위기를 띄우려는 줄 알았는데 음식은 생각보다 맛있었고 나는 아직도 너를 모르겠다 모르겠어, 나의 생각과 너의 말이 겹치고 마지막으로 제가 부를 곡은…… 라디오 진행자와 게스트의 목소리가 구별되지 않았고 어디서 들어 본 듯한 노래가 흘러나왔다 내가 티브이에 한눈을 판 사이 너는 계산대로 향했는데 그것이 네가 계산을 하겠다는 의도는 아니었고 다만 조금 급하게 밖으로 빠져나오고 싶었던 것 같았다

밖을 나오니 눈이 쌓여 있었다 밝다, 너무 밝아, 밝고 춥다 방금 수영장에서 나온 사람처럼 너는 몸을 벌벌 떨었고 물에 불은 손가락처럼 쪼그라든 마음이 조금씩 편편해지고 있었다


03. 치아바타가 맛있는 카페에서

P의 일기장엔 이렇게 적혀 있다. ‘온 세상이 나를 두고 거짓말을 하는 것 같다. 그게 아니라면 오늘의 속임수는 진짜일 리 없다.’

덜컹거리는 문을 열면 흘러드는 찬바람 너는 이곳의 풍경과 옆얼굴이 맞닿는 자리에 앉았고 손님이 많지 않았는데 음식은 생각보다 늦게 나왔다 우리는 각자 시킨 음식을 나누어 먹고

근처 카페를 찾으려다 익숙하지 않은 골목에서 헤맸다 신호가 잘 잡히지 않았다 누군가 우리 옆으로 바짝 붙어 지나갔는데 하마터면 쏟아질 듯 쏟아지지 않는 비 너는 담배를 피울 때 항상 주변을 둘러보았고 나는 그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했다

터질 듯한 네 가방에는 무엇이 들었을까 비밀을 감추면 비밀을 말하고 싶은 얼굴이 되지 네 가방만큼이나 참을 수 없겠다는 표정을 짓더니, 풍선을 본지도 불어본 지도 오래된 것 같다 다음번 내 생일에 케이크 대신 풍선을 준비해줄래? 너무 작지도 크지도 않아서 네가 불기에 적당히 힘들 정도로 네 볼이 적당히 발개질 정도로 지금처럼, 너는 그것들을 하나씩 바늘로 터뜨리고 싶은 거겠지 너는 무표정한 얼굴로 담뱃불을 끄고

우리는 문이 여럿인 카페를 발견하고 어디로 들어가지 어디로 들어가도 매한가지일 텐데 사람들은 왜 질서정연하지 못한 걸까 네 뒤에 바싹 붙어 줄을 섰다 음료를 들고 뒤를 도는 사람과 거의 부딪힐 뻔하고 아무렇지 않게 각자 갈 길을 가고 우리에게는 우리의 자리가 있겠지 너의 가방을 둘 자리도 필요할 텐데

계단을 오르면 계단을 오르고 문을 열면……

P의 일기장은 5칸의 공백을 두고 여기서 끝이 났다. (끝이 났다는 건 잠자리에 들었거나 더는 쓸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는 뜻) P는 내가 볼 수 있게끔 일기장을 책상 모서리에 올려둔 것이 분명하다.


04. 진료

의사가 이야기한다 줄지어 선 모습이 보이면 그 때는 안심해도 되는 겁니다 나는 더 묻지 않고 진료실을 나선다 로비에 도착하면 나를 위한 처방전이 준비되어 있을 것이다 버스를 놓칠지도 모른다 모르는 일이다 그건 간호사의 손놀림에 달려 있다 차례를 기다리는 사람들 맨 뒤에 서서 아무렇지 않은 척 팔짱을 끼고 있다가 문득 의사의 말이 생각난다 무엇이든 오래 하는 일을 조심하십시오 그건 당신의 의식을 흐리게 만들 겁니다 무엇보다 평소 자세가 중요합니다 끊임없이 자신에게 질문하세요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인가 나는 팔짱을 풀고 내 차례의 처방전을 기다린다 몹시 초조해진다 그러다 문득 버스를 빨리 타야 하는 이유에 대해 생각하고 생각나지 않는다 여기서 집까지 거리는 약 8.6km 아무리 시간이 많아도 걸어갈 수는 없다 오늘은 더더욱 조심해야 할 것이다 버스를 타고 지하철을 타야 하는데 내 처방전은 언제 나오는 걸까엄마의 손을 잡은 아이가 나를 뚫어지게 쳐다본다 의식적으로 아이를 쳐다보지 않는다 흥미를 금방 잃을 것이다 엄마의 손을 놓지 않을 것이다 아무 알람도 울리지 않은 핸드폰을 꺼내 아침에 읽은 뉴스를 다시 읽는다 읽는척한다 아무래도 이 건물의 가장 불행한 사람은 나일 것이다 들키지 않기 위해 조심한다 들것에 누군가가 실려 가고 수술실 앞에서 환자의 보호자를 불러도 아무런 대답이 없을 때 나는 이곳을 빠져나간 뒤일 것이다


05. 달콤 쌉싸름한 초콜릿

나차는 생각했다 그녀가 아직도 이곳에 익숙해지지 않는 것은 순전히 음식 때문이라고 내일은 식료품점에 들러야지 달콤한 초콜릿 두 봉지와 진한 커피와 어울리는 비스킷을 사야지 그렇게 다짐하고 침대에 누웠다

얼마 지나지 않아 꿈이 그녀의 발목을 잡고 천천히 머리 쪽으로 향했다

나차의 친구와 나차의 옛 연인이 그녀에게 화를 냈다 넌 도대체 약속 시간을 언제쯤 지킬 거니? 손목시계를 보니 시침과 분침이 서로 정반대 방향으로 빠르게 돌고 있었고 그녀의 등줄기에서 식은땀이 멈추지 않고 흘렀다 땀은 곧 강물이 되어 나차는 속수무책으로 휩쓸리듯 떠내려가기 시작했다

이상한 평온함이다 그렇게 느낄 때쯤 꿈은 벽을 타고 열린 창문 틈으로 달아났고 나차는 불도 켜지 않고 화장실로 향했다

방금 꾼 꿈을 떠올리고 억울해하고 억울한 만큼 그리워하다가

잠을 두 시간이나 뒤척였다 뒤척이며 나차는 생각했다

집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비스킷과 커피, 그리고 초콜릿만 구할 수 있다면……

나차는 가까스로 다시 잠에 들었고 동이 트기 직전이었다

*Laura Esquivel, 1989


06. 바캉스

우리는 휴가지에서 점심을 나누어 먹었지 그것도 아주 길게 말이야 나른한 오후와 마주 앉아 한담을 나누고 커피를 마셨지 신발도 벗어두고

엊그제 먹은 게 체한 것 같다던 사람은 나누어 준 샌드위치를 한 입 베어 물더니 나무 뒤에 토를 해버렸지 뭐야 얼마나 정성스럽게 싼 샌드위치인데, 아쉬워서 그 사람이 먹던 걸 베어 문 부분을 잘라내고 먹었어 다행히도 맛은 변함이 없더군

그날은 유독 볕이 잘 들지 않았어 안개라도 낀 건지 사방이 뿌옇고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기에도 눈이 아팠지 이런 게 휴가라면 일을 하겠다는 사람도 있었어 물론 그 사람, 제대로 즐겨 본 적이 없는 사내이긴 하지만

돗자리에 누운 풀 만큼이나 우리는 침울해져서 담배에 불을 붙이고 술을 나누어 마셨지 그러면 조금 나아지거든 안 그런가? 중요한 건 항상 그거야 술을 마시고 담배를 태우는 것 다른 모든 건 예행 과정일 뿐 동의하지 않는 사람도 있었지만 그자도 결국 분위기를 사랑할 수밖에 없었지

낮잠을 조금 자기로 했어 불면증이 있다는 사람이 가장 잘 자더군 그가 안쓰러우면서도 우스워서 이마에 수건을 올려주었어 그래, 토했다던 그 사람 말이야 알고 보니 주식에 빠져 돈을 잃고 난 뒤로 저런다더군 자신을 과신한 대가로 서서히 메말라가는 거지

숲을 빠져나와 산책로를 조금 걸었어 구두를 신고 온 사람이 투덜댔지 아직 이 나라는 개발이 미흡해도 한참 미흡했다나 뭐라나 그가 신은 구두는 대체 어느 나라의 것일까? 그곳으로 당장 보내버리고 싶은 심정이었어! 물론 내가 애국자라는 소리는 아니야 다만 가만히 듣고 있기가 좀 그랬다는 거지

다 지난 일이야 언젠가 누가 꼬투리를 잡겠다고 하면 잡을 수 있겠지만 나는 아는 게 없으니까 그날의 일은 참 안 됐어 누구에게도 탓을 하고 싶지 않아 차를 타고 도시를 빠져나올 때까지 그 사람이 없어진 걸 알았던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는 게

누구의 잘못이겠어


07. 틈

오후의 남서풍을 맞으며 창문은 틈이 있다는 걸 증명하고 싶어 한다

베란다에는 몬스테라가 몬스테라의 여름과 몬스테라의 겨울은 다르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언제든지 보여주고 있다

색칠한 조약돌의 원래 색을 알아내기 위해 얇게 파인 금을 손톱으로 긁어내다 손톱이 긁히고

반짝이는 부스러기를 주우려 손을 갖다 댄 바닥으로부터 쉽게 사라지는 그림자

해변에서 주워 온 소라껍데기를 귀에 대고 눈을 감으면 떠오르는 풍경이 있고

기억은 아무래도 기억에 불과하고 사진으로 알 수 없는 그 날의 분위기가 있어서

앨범은 가장 아래 칸 서랍에 놓여 열어보는 일이 드물고

베란다를 열어 환기를 시킨다 눈에 익은 구름이 산 너머로 사라지면

다가오는 저녁은 꼭 어제 같고 어쩌면 먼 미래 같다


08. 한때 사랑했던 여자에게 보내는 구소련 우주비행사의 마지막 메시지

예상과 다르지 않았다 결국 굴레를 벗어나지 못했고

혼자가 되었다

혼자라서 할 수 있는 일들이 있다 혼자 빨래 널기 혼자 식사하기 혼자 잠들기 혼자 말하고 혼자 듣기…… 또 뭐가 있지?

비디오테이프 속에 옛날의 내가 있고 옛날의 내가 누구보다 낯설다 매미를 손으로 잡고 나무에 다시 살포시 올려놓으려는 작은 손

들리시나요? 그쪽에서 대답이 올 리는 없습니다 말씀하시죠

행성이 폭발하기 5초 전, 메시지가 도착했다

#11. 거기에도 생명체가 살고 있나요?

#34. 나는 당신의 이름과 얼굴을 기억하고 설령 잊게 되더라도 나는 다시 당신을 알게 되는 기쁨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108. 부디 무사히 도착하세요

#311. 어디에서라도 언제라도 신호를 보내주세요

혼자라서 불가능한 일들 작별 인사하기, 약속하기, 당신의 불안을 잠재우는 것 말고도 더

마지막으로 손을 뻗어 닿을 수 있는 거리와 기억이 기억까지 도달할 수 있는 시간을 계산해본다면

나는 이미 돌아가기에 한참 늦었지만

*David Greig


09. 악몽

천장을 오래 바라본다 숨어 있는 문양이 얼굴을 드러내면 잘 시간이 되었다는 뜻

그림자는 배신하지 않지 같은 색 같은 기울기로 낱말퀴즈 풀듯 기억나는 일들을 모조리 적는다

낡은 자동차의 요란한 배기음 빈 주차장을 멍하니 바라보던 아버지의 등 회센터 수조 바닥에 누워 있는 광어의 헤진 지느러미와 경비원 아저씨의 부르튼 입술

아무것도 모른다는 말이 사실이 아닌 것처럼 들릴 때

천장은 문양을 잃어버리고 장판이 식어가고

어둠에 익숙해진 눈이 다른 어둠을 찾아 나선다 보고 들을 수 있다는 것을 하나의 기쁨으로 여기면서

꿈에 누가 나온다는 게 그게 악몽이더라도


10. 낭독 시간

각자 자신 있게 부를 수 있는 노래를 준비해오자 춤을 준비해오는 사람은 없길 그건 반칙이니까 그렇다고 반칙을 하면 안 된다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수업 시간이 끝나고 화장실에서 마주쳤어 1교시가 끝났을 뿐인데 세상의 종말을 기다리는 사람처럼 멍하니 거울을 쳐다보는 거야 의식하지 않는 듯 화장을 마저 고치고 다시 교실로 갔지

5교시 준비물을 가져오지 않은 걸 3교시에 알았을 때, 짝꿍은 난처한 표정을 지었고 선생은 내게 외출증을 끊어줄 수 없다고 했다 바깥에 이상한 사람이 돌아다닌다고, 그리고 너는 조금 더 꼼꼼해질 필요가 있단다 그날따라 선생의 짙은 눈 화장이 마음에 들지 않았고

4교시에는 머리카락이 길어지는 꿈을 꿨다 점점 길어지더니 짝을 휘감고 높이 들어 올려 발표를 시켰다 그 애는 발표를 좋아하고 영어도 참 잘하는데 꿈속에서는 그것이 오히려 놀림감이 되어 아이들이 자꾸만 웃어댔다

다음 페이지에 있는 문장을 읽어볼까요 오늘은 13일이니까 25번? 수줍음이 많은 25번은 문장을 읽는 내내 목소리를 떨었고 화가 났거나 울고 있는 것 같아 창문 밖을 쳐다보던 전학생도 고개를 돌렸지

점심시간엔 온통 노래 이야기뿐이었다 한 아이는 자신이 좋아하는 가수의 노래가 자신이 부르기에는 너무 높다고 한탄했고, 다른 아이는 오빠가 자주 부르던 노래밖에 생각나지 않아 큰일이라고 했다 그 노래를 부르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호들갑을 떨면서

5교시에는 벌을 섰다 벌을 서는 게 어쩌면 다행이라고 여기면서 복도에는 아무도 없었고 옆 반 교실에서 내가 부르려던 노래를 누군가가 부르고 있었다

무릎이 시렸고 무엇보다 심심했다 그날은 만우절이었고 나를 속인 사람은 아무도 없었는데 자꾸만 속는 기분이 들어서

내가 유통기한이 지난 우유를 사물함에 모아둔다는 걸 누군가 발견해주길 바랐다


11. 산책과 수다

공원에 산책을 가자고 했다

커튼을 걷으니 해가 이미 저물어 있었고 낡은 운동화를 구겨 신고 따라나섰다

길 건너 우체국이 보였고 부치지 않은 편지가 생각났는데 왜 부치지 않았는지도 금방 기억났다

사이드미러를 쳐다보듯 서로의 그림자를 살피면서 그림자는 언제 가까워 보이는지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어두운 길을 좋아하는 너는 가로등이 꺼진 곳을 찾아다녔고 갑자기 나타나는 사람을 무서워하지도, 싫어하지도 않았다

담 넘어 누군가 싸우는 소리가 들렸고 우리는 서로를 속였던 일과 속아주었던 일들을 고백하다가

산책로는 곧 끝이 났고 분수가 나오지 않는 분수대를 뛰어다니는 아이들이 보였다

산책과 수다는 닮은 구석이 있어 도중에 한 번쯤 길을 잃는 재미가 있잖아

네가 말했을 때 배가 고팠고 뒤꿈치가 시큰했다


12. 안국역

기울수록 오래 견디는 풍경과 조우하고 시간은 좌우로 겹쳐 정성스레 풀칠한 편지지처럼 쉽게 떨어지지 않는다

오래 길러온 습관이 기분을 좌우할 수 없다고 믿으면서 기억나지 않는 것들을 기억하기 위해 노력한다 오랫동안 손금을 들여다보며

모래성 위에 서 있는 기분을 상상한다 안개보다 무거운 구름이 투명한 유리창을 가까스로 통과할 때

바깥의 풍경이 안을 감싸고 있었으므로 쪼개어지는 작은 조각들을 볼 수 있었다

견딜수록 기우는, 편지에 쓰인 꿈같은 이야기를 잘게 찢어 불을 붙일 때 재가 흩날리고, 비행(飛行)하는 그림자

오래 기르던 개의 이름과 같은 간판을 쳐다보다가 신호를 놓치고, 다음 신호를 기다리다 보면

나는 어느새 이곳에 없는 사람이다


13. 터널

밤새 긴 침묵에 목청은 종유석이 되었다 코가 닳은 신발로 보도블록에 쌓인 습기를 훔치며 터널 아래를 걸었다

세월이 지나도 복덕방은 그 자리 그대로 복권을 사는 사람의 굽은 어깨에 그가 놓친 행운이 뭉쳐 있고

겨울은 싸구려 부적처럼 아무런 대답 없이 춥고 덜 춥고를 반복할 뿐이었다

눈앞에서 멀어져가는 버스를 쳐다보며 신호를 기다렸다

추위에 떠는 사람들이 탭댄스를 추듯 제자리에서 발을 동동 구르고 맞은편에서는 어디서 본 듯한 사람이 반대로 향하는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돌연 그게 누구인지 떠올랐고 그를 떠올리다 버스를 놓칠 뻔했다

사람들이 내가 어디에서 내리는지 모르듯 나도 그들이 어디에서 내리는지 모른다


14. 풍경화

세수도 하지 않고 화가는 의자에 앉았다

누구도 본 적 없는 풍경을 그리기 위해 화가는 도움이 될 만한 것을 찾는다

노트북을 꺼내 인터넷에 접속한다 이미지 검색을 시작한다

검색이 구체적일수록 그의 목적은 달성하기 힘들어서, 화가는 자음과 모음을 임의로 결합해 검색한다

마땅한 풍경을 찾지 못한다

검색 결과에는 풍경이 아니거나, 이미 보았던 풍경으로 가득했다

그는 곰곰이 생각해보다가, 설령 마땅한 풍경을 찾는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보는 순간 본 적 없는 풍경이 아니게 되어버리므로, 그는 이런 방식으로는 그가 원하는 것을 찾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차라리 눈을 감아보기로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의 상상력이 빈약한 것을 깨달았다 눈을 감으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사람도 있다는데, 막연히 그들이 부러웠다

영원한 무(無)일까, 혹은 찰나의 죽음일까 빈약한 화가의 상상력은 여기서 그쳤고

벌떡 일어섰다 캔버스 뒤로 낡은 벽이 보였다 벽에 틈이 있었고, 벽 뒤의 벽이 보였다 그는 그림을 다 그리면, 그곳에 걸어두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가 그리게 될 풍경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15. 기립성 저혈압

천천히 일어나기 중심을 잃지 않기

오늘은 며칠입니까 봄과 여름 중 어느 쪽에 더 가까운 날씨입니까

대답을 바라지 않는 질문을 질문을 바라지 않는 사람에게 묻고

계단을 한 칸씩 밟기 횡단보도를 급하게 건너지 않기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내가 너무 다르지 않게

어디쯤입니까 조금 늦을 것 같습니다

예보에도 없는 비가 내리는데 태연하게 우산을 꺼내는 사람들

집에 오는 길에 시장에 들러 시금치와 귤을 살 것

항상 그늘의 가장자리로 걷기 (너무 어둡지 않게)


16. 기쁨의 순서

기쁨엔 순서 같은 게 있어서 당신은 조금씩 뒤처졌고 그래도 맨 뒤는 아니어서 순서를 지키기 위해 노력했지

환승역엔 사람이 많고 그래도 기댈 수 있는 벽이 있어서 사람과 사람에게 기대지 않을 수 있어서 월요일을 기다리는 사람과 화요일과 화요일 사이에서 주말을 보내는 사람이 나란히 줄을 서고

만두피처럼 얇게 펴진 당신은 이불을 가지런히 정리하고 사과 껍질을 벗긴다

당신의 허물이 세탁기에서 빠른 속도로 회전하고 있을 때 당신은 맥주를 까고 앉아 어지러움을 느꼈고 TV에서는 웃음을 위한 웃음이 만발했고

사과가 천천히 갈변하는 동안 빨래를 널고 라넌큘러스에게 물을 주었지

순서가 꼭 지켜지리란 법은 없어서 당신은 자주 초조했고 근거 없는 희망을 품기도 했고 음식을 씹지 않고 삼키는 바람에 탈이 자주 났지

당신은 아쉬움을 뒤로 한 채 침대에 누워 잠을 청했다 혹시라도 순서를 지나치게 될까 전전긍긍하면서


17. 혜화(惠化)

P가 말한다 네가 지금 말하려는 게 무엇인지 알아. 숨을 고르고 밥을 먹고 다시 이야기해보지 않을래?

늘 그런 식이다 시간을 버는 데 있어 따라올 사람이 없지. 나의 화가 누그러지도록, 상황을 별거 아닌 것처럼 만드는 것은 P의 장기다. 침묵으로 동의하고 우리는 근처 파스타 집으로 향한다.

지금 무슨 생각 하고 있어? 이런 질문을 들으면 뭐라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 너는 그런 질문을 잘한다. 사람을 진지하게 만드는 질문. 그래놓고 너는 농담밖에 할 줄 모르지. 상대로 하여금 주먹을 쥐게 하고서 뒷짐을 풀고 꽃을 꺼내는 사람 네가 날 아는 만큼 너도 널 알았으면 좋겠어.

가끔 내가 화를 내면 P는 당황한다. 그리고 누구보다 난처한 표정을 짓는다. 그런 모습을 한 P를 보는 건 마음이 좋지 않다. 누구보다 미안해할 줄 아는 사람. 모든 걸 자신의 잘못으로 돌리려는 사람. 장난 뒤에 진심을 숨기지 않는 사람.

언젠가 P가 내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자신은 자신밖에 이해할 줄 모른다고. 남을 이해하는 건 자신에게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라고. 그 말을 들었을 때 그가 이기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사실 가장 솔직한 사람이었고 P는 내가 그를 이해하는 것보다 나를 더 잘 이해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을 때

P가 주문한 음식은 입에 맞았다 우리는 밥을 먹고 연극을 보기로 했는데 P는 아마 세상에서 가장 지루한 연극일 거라고 했다 그래서 볼 가치가 있다고

연극이 끝날 때까지 주인공은 등장하지 않았고 나는 그것이 마음에 들었다


18. 아이의 노래

문제를 푸는 아이의 손이 느렸다 저녁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고 놀이터에서는 개미들이 낮은 포복으로 불량식품을 찾아다녔다

하굣길에 돌아오는 목소리가 있었고 돌아오지 않는 강아지를 찾는 목소리도 있었다

저녁 시간이 되면 저녁을 먹어야 했다 꼭꼭 씹어야 했다

푸는 시늉만 하던 아이는 배가 고파서 마음속으로 숫자를 세고

아득해서 미칠 지경이었다

최대한 흘려 쓴 글씨를 따라 개미들이 줄을 지어 가고

저녁 시간이 되자 하나둘씩 보이지 않았다

그러니까 우리가 아직 친구였을 때 내가 너의 이름을 부르고 네가 나의 별명을 불렀을 때 배가 고픈 줄도 모르고 강아지를 함께 찾아다녔을 때 우리가 아이였을 때

항상 첫눈을 기다렸는데 지금도 그렇다*

*Song of Childhood, Peter Handke


19. 백패킹

가방에는 더 이상 들어갈 공간이 없습니다 칫솔과 양말 볼펜과 공책 흐를 수 있는 건 최대한 넣지 않았지만 언제든지 젖을 수 있고

예보에 없던 눈이 내리고 눈을 밟은 무게만큼의 적막이 존재하는 창가 쪽 좌석을 사고 싶습니다

신분증은 언제든지 보여줄 수 있고 현금은 얼마 들고 있지 않습니다 언제든지 복덕방에 들러 복권을 살 수 있을 정도의

초행길엔 다소 행운이 필요하다 이곳의 택시비는 기본요금이 얼마입니까 가능하다면 창문을 열어도 되겠습니까

가방은 점점 무거워지고 가방은 가방을 지킬 뿐 안경에 내려앉은 눈이 시야를 흐리면

얼마 남지 않은 배터리로 맛집 찾기 추우면 언제 꺼질지 모르는 작은 국수 가게에 들어가

무료로 무료함을 달랠 수는 없으니까 마지막으로 묻습니다

거기, 당신 자리 맞나요?


20. 식사

빗소리가 저녁을 짓는다 불 꺼진 부엌에서 천천히 사과를 깎는 소리

쌀을 씻은 물로 미역국을 끓인다 마늘을 넣은 숟가락으로 간을 본 뒤 도저히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고

적당한 간격을 두고 노래를 흥얼거리던 네가 한 소절에 멈춰 있다

오렌지색 셔츠에 묻은 얼룩의 냄새를 맡고 당신의 손등에 코를 문질러도 보다가

식전 기도를 올리기 전에 품는 불경한 소원 실외기에 부딪히는 비의 장단에 맞추어

그릇과 수저를 가지런히 놓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