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chiko Kanenobu(金延幸子)
Albums
table without id
file.link as Album,
artist as Artist,
genre as Genre,
rating as Rating
where
contains(category,<span title='There is no note that matches this link.' class='invalid-link'> <span class='invalid-link-brackets'>[[</span> Albums <span class='invalid-link-brackets'>]]</span></span>) and
contains(artist,this.file.link)
sort rating desc
카네노부 사치코: 일본 여성 싱어송라이터의 선구자
일본 포크 음악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카네노부 사치코(金延幸子)는 1948년 오사카에서 태어나 일본 최초의 여성 싱어송라이터로 인정받는 아티스트이다. 그녀의 대표작 『미소라(み空)』(1972)는 일본 음악사의 랜드마크로 여겨지며, 5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새로운 세대들에게 지속적으로 재발견되고 있다12. 영국 포크와 미국 포크록의 영향을 받은 그녀의 음악은 서정적이면서도 내성적인 특징을 보이며, 최근에는 빔 벤더스 감독의 영화 『퍼펙트 데이즈』에 수록곡이 사용되면서 국제적인 재조명을 받고 있다34.
초기 생애와 음악적 배경
카네노부 사치코는 1948년 5월 31일 오사카에서 태어났으며, 음악을 사랑하는 대가족에서 자라났다56. 흥미롭게도 그녀의 언니는 보성 가극단의 스타였던 요도 가호루(淀かほる)로, 이는 그녀가 어린 시절부터 음악적 환경에 노출되었음을 보여준다7. 어릴 때부터 클래식과 샹송에 친숙했던 그녀는 초등학생 시절 다이나 쇼어와 빙 크로스비의 레코드를 즐겨 들었으며, 1960년대 초반 『샤본다마 홀리데이』를 통해 사카모토 큐, 에리 치에미, 유키무라 이즈미 등을 접하며 팝 음악에도 관심을 갖게 되었다7.
1960년대 중반 비틀즈의 등장을 계기로 롤링 스톤즈, 킹크스 등 영국 비트 밴드를 듣기 시작했고, 고등학생 시절에는 애니멀즈나 피터 앤 고든, 허먼즈 허미츠의 내한 공연을 관람할 정도로 열정적인 록 팬이었다7. 이 시기 그녀는 훗날 관서 포크의 중요한 인물이 되고 URC 레코드를 설립하게 되는 하타 마사아키와 만나게 된다7. 고등학교 말기에 포크송에 관심을 갖고 기타를 배우기 시작한 그녀는 관서대학 포크 클럽에 참여하면서 본격적인 음악 활동을 시작했다7.
그룹 활동과 음악적 성장
1968년 카네노부 사치코는 하타 마사아키의 권유로 관서 포크 캠프에 참가하면서 본격적인 음악 활동을 시작했다57. 이곳에서 형성된 포크 캠퍼스의 일원으로 활동하며 다양한 뮤지션들과 교류했다. 1969년에는 니시오카 다카시, 나카가와 이사토, 세오 이치조, 마쓰다 고이치와 함께 ‘비밀결사 ○○교단’을 결성했고, 니시오카가 탈퇴한 후에는 ‘우(愚)’라는 이름으로 활동했다57. 이 시기 그녀는 진자키 요시히로와 메디테이션이라는 밴드도 결성했지만 오래 지속되지는 못했다7.
‘우’는 전설적인 그룹으로 여겨지며, 1970년 URC 레코드에서 발매한 유일한 싱글 「불이 꺼지면(あかりが消えたら)」는 이른바 애시드 포크적인 연주를 들을 수 있는 작품이다7. 남아있는 라이브 녹음을 들으면 재즈적인 테이스트도 있으며, 멤버들은 펜탱글을 의식했다고 한다7. 그러나 학생 신분의 멤버들이 상경하여 본격적인 활동을 하기는 어려웠고, 그룹은 아쉽게도 여기서 활동을 종료하게 된다7.
솔로 데뷔와 『미소라』의 탄생
1971년 카네노부 사치코는 단신으로 도쿄로 활동 무대를 옮겨 솔로 가수로 재출발했다7. 그러나 남성 싱어나 그룹이 대부분인 URC 레코드에서 여성은 소수파였고, 레코드를 제작할 기회가 좀처럼 돌아오지 않았다7. 당시 URC는 반전이나 사회적 메시지가 담긴 노래에 집중했는데, 이는 주로 남성들의 음악이었다18. 그녀는 후에 인터뷰에서 “일본은 여전히 남성의 세계였다. URC는 큰 메시지가 담긴 노래에 집중했다. 반전, 사회적 성명… 음악은 대부분 남성들에 의한 것이었다. 하지만 여성들은 뒤로 밀려났다. 나는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고 회상했다18.
레이블 동료인 해피엔드와 교류하게 된 카네노부는 오타키 에이이치의 후원을 받아 빅터의 SF 레이블에서 ‘카네노부 사치코’ 명의로 싱글 「때에 맡겨서(時にまかせて)」를 1971년에 발표했다7. 백 밴드는 오타키(베이스), 호소노 하루오미(피아노), 마쓰모토 다카시(드럼)가 맡았고, 편곡과 프로듀스도 오타키가 담당했다7. 그러나 라이브에서 부르는 포키한 방향으로 가고 싶었던 카네노부와 템포를 올려 팝하게 맛을 내고 싶었던 오타키 사이에는 간극이 생겼다7.
1972년 드디어 그녀의 첫 번째 앨범 『미소라』가 발매되었다12. 이 앨범은 호소노 하루오미가 프로듀서를 맡았으며, 7일 만에 녹음되었고 대부분의 곡이 한 번에 녹음되었다16. 앨범에는 오타키 에이이치, 스즈키 시게루, 하야시 다쓰오, 나카가와 이사토 등 호화 멤버들이 제작에 참여했다9. 『미소라』는 어쿠스틱 기타를 중심으로 한 포크송 색채가 짙은 자작곡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도노반과 펜탱글 등 영국 포크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162.
미국 이주와 음악 활동 중단
『미소라』의 제작을 마친 후, 카네노부는 앨범 발매 전에 미국인 록 평론가 폴 윌리엄스와 결혼하여 미국으로 이주했다185. 폴 윌리엄스는 『크롤대디』 매거진을 창간한 인물로, 일본을 방문했을 때 카네노부와 만나 사랑에 빠졌다8. 그녀는 당시를 회상하며 “나는 미쳤다! 그것은 조금 바보 같았다! 누가 그런 일을 하겠는가? 나는 오랫동안 내 앨범을 꿈꿔왔다. 그 훌륭한 남성 포크 싱어들에 의해 오랫동안 밀려났다. 그러고 나서 첫 앨범을 만들 기회를 얻었는데 떠났다. 미친 소리처럼 들리지만, 나는 내 아기를 선택했다”고 말했다8.
결과적으로 『미소라』는 아티스트가 홍보할 수 없는 상황에서 발매되어 곧 사라져버렸다10. 그녀는 거의 10년 동안 다시 녹음하지 않았고, 1992년까지 또 다른 앨범을 발매하지 않았다10. 대신 그녀는 윌리엄스와 함께 캘리포니아의 작은 마을에 정착하여 두 아들을 키웠다10.
흥미롭게도 윌리엄스 가족의 친구였던 세계적으로 유명한 SF 작가 필립 K. 딕이 『미소라』를 듣고 감명을 받아 카네노부에게 다시 음악을 시작하도록 격려했다102. 딕은 1981년 카네노부의 첫 미국 싱글 “Fork in The Road / Tokyo Song”의 프로듀서를 맡았지만, 아쉽게도 카네노부의 컴백 앨범을 프로듀스하려던 꿈을 실현하기 전에 세상을 떠났다10.
음악적 재발견과 컴백
1990년대 초반 『미소라』가 일본 팬들에 의해 재발견되면서 카네노부는 다시 주목받기 시작했다10. 1989년 키티 레코드에서 최초의 재발매 CD가 발매되자 점차 재평가가 이루어지며 인기가 재연되었다9. 1993년 그녀는 SACHIKO & CULTURE SHOCK 명의로 『SEIZE FIRE』를 발표하며 복귀를 알렸다59. 이 두 번째 앨범과 다음 작품인 『It’s Up To You』(1995)는 모두 샌프란시스코의 뮤지션들과 함께 제작되었으며, 밴드 사운드가 부각된 영어 가사 위주의 작품들이다9.
1998년에는 비밀결사 ○○교단부터 『미소라』 이전의 솔로 활동에서의 귀중한 음원을 모은 컴필레이션 『레어 트랙스~때에 맡겨서』를 발매했다9. 같은 해 일본을 방문하여 이즈의 스튜디오에서 녹음한 새 앨범 『Fork in the Road』를 발표했는데, 이 앨범은 오사카 시절의 맹우인 마쓰다 고이치가 프로듀서를 맡았으며, 나카가와 이사토와 세오 이치조도 참여한 ‘우’의 리유니언에 의한 새곡도 수록되어 있다9.
『미소라』의 문화적 영향과 유산
『미소라』는 발매 당시에는 큰 주목을 받지 못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일본 음악사의 중요한 작품으로 인정받게 되었다12. 카네노부 자신도 인터뷰에서 “그것은 기적이다! 사람들이 서로에게 그것에 대해 말했다. 그리고 일본에서는 약 15년마다 젊은이들이 그것을 발견한다. 믿을 수 없다”고 말했다8. 앨범 수록곡 중 하나인 「푸른 물고기(青い魚)」는 1999년 록 밴 GRAPEVINE에 의해 커버되어 새로운 세대의 리스너들에게도 지지를 받았다9.
최근에는 빔 벤더스 감독의 영화 『퍼펙트 데이즈』(2023)에 「푸른 물고기」가 사용되면서 다시 한 번 화제가 되었다934. 이는 카네노부의 작품이 반세기라는 시간을 넘어서도 오랫동안 사랑받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이다9. 시애틀의 독립 레코드 레이블 Light in the Attic이 2019년 6월 『미소라』의 리마스터 버전을 재발매하면서 국제적인 새로운 팬층을 확보하기도 했다16.
현재의 활동과 재평가
현재 76세인 카네노부 사치코는 여전히 전 세계적으로 공연 활동을 하고 있다11. 2018년에는 『미소라』 45주년 기념 라이브가 개최되었고, 2023년에는 『Fork In The Road』가 일본에서 재발매되면서 12월 내한 공연도 진행했다59. 2024년에는 새로운 컴필레이션 앨범 『Toki ni Makasete -Sachiko Kanenobu Rare Tracks+2-』를 발매하기도 했다12.
국제적으로도 인정받아 스티브 건, 요 라 탱고 등의 아티스트들과 협업하거나 무대를 함께 나누기도 했다1314. 2025년에는 영국에서 데뷔 공연을 가질 예정이기도 하다11. 그녀의 음악은 조니 미첼의 작품과 비교되며, “일본의 조니 미첼”이라는 별명으로도 불린다513.
결론
카네노부 사치코는 1970년대 일본에서 여성 싱어송라이터로서 개척자적 역할을 했으며, 그녀의 대표작 『미소라』는 일본 포크 음악사의 중요한 이정표가 되었다. 영국 포크의 영향을 받은 서정적이고 내성적인 그녀의 음악은 5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새로운 세대들에게 지속적으로 재발견되고 있으며, 최근 국제적인 재조명을 받으면서 그 가치가 다시 한 번 확인되고 있다. 여성이 음악계에서 목소리를 내기 어려웠던 시대에 자신만의 독특한 음악 세계를 구축한 그녀의 업적은 일본뿐만 아니라 전 세계 음악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할 수 있다.
-
Sachiko Kanenobu, the First Female Japanese Songwriter … ↩ ↩2 ↩3 ↩4 ↩5 ↩6 ↩7 ↩8 ↩9
-
Artist: Sachiko Kanenobu - Light In The Attic Records ↩ ↩2 ↩3 ↩4
-
【Part1】金延幸子ロングインタビュー - otonano ↩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
An Interview With Japanese Folk Pioneer Sachiko Kanenobu ↩ ↩2 ↩3 ↩4 ↩5 ↩6
-
金延幸子/Sachiko Kanenobu - - SHINKO MUSIC SONG ↩ ↩2 ↩3 ↩4 ↩5 ↩6 ↩7 ↩8 ↩9 ↩10
-
[Sachiko Kanenobu biography Last.fm](https://www.last.fm/music/Sachiko+Kanenobu/+wiki) -
Sachiko Kanenobu with The Encyclopedia Esoterica October 12th ↩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