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Brutalist

영화 브루탈리스트는 브루탈리즘이라는 건축 양식이 가지는 의미를 영화적으로 차용하여, 라즐로 토스라는 인물의 삶을 가감없이 보여준다. 영화는 그를 이상화(Idealize)하거나 변명하지 않고 그의 추악함과 나약함까지도 모두 고스란히 드러낸다. 영화는 수직적인 시각적 구성을 반복적으로 활용하는데, 도로를 질주하는 장면을 아래에서 잡아올리는 방식이나, 크레딧을 수직으로 배치하는 연출이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이러한 문법은 영화의 주요 테마인 ‘하강과 상승’을 시각적으로 전달하며, 라즐로의 인생 궤적과도 맞물린다.

그렇다면 이 영화의 주인공은 라즐로인가? 곰곰히 생각해 보면 영화는 조피아로 시작하여 조피아로 끝이 난다. 극 중에서 조피아는 라즐로의 인생에서 반복되는 시작과 끝, 그리고 순환을 의미하는 존재로 기능한다.

라즐로의 친구 고든과 그의 가족 이야기는 라즐로 가족의 이야기와 교차되며, 이민자로서의 삶과 정체성의 문제를 확장하는 역할을 한다. 특히, 라즐로의 코가 다친 장면은 그의 신체적 상처가 단순한 부상이 아니라, 정체성과 역사적 고통의 상징임을 암시한다. 그의 건축이 개인적인 트라우마와 역사적 상처를 반영하듯이, 육체적 상처 또한 그의 정체성을 설명하는 중요한 요소가 된다.

영화는 라즐로와 밴 뷰런의 관계를 통해 건축의 의미를 더욱 깊이 탐색한다. 해리가 아버지를 위해 서재를 설계한 것과 밴 뷰런이 어머니를 위해 건축물을 디자인하는 것은 대조적이면서도 유사한 구조를 가진다. 결국, 밴 뷰런이 사라진 후에야 그가 만든 건축물이 어떻게 존재하는지를 보여주는 방식은, 창조자의 부재가 오히려 창조물의 의미를 더욱 선명하게 드러낸다는 역설을 강조한다.

영화 속에서 자유의 여신상이 뒤틀려 보이는 장면은 이민자의 시선에서 본 미국의 현실을 상징하는 듯하다. 이는 라즐로가 있어야 할 곳이 어디인가에 대한 질문과도 연결된다. 그는 유대인으로서 깊은 차별을 받았고, 건축가로서도 환영받지 못했지만, 자신의 정체성을 건축을 통해 구현하며 살아간다. 결국 영화는 브루탈리즘이라는 양식을 라즐로의 삶과 겹쳐 보이며, 그의 실제 건축물이 그의 인생을 그대로 반영하는 구조를 갖추고 있음을 보여준다.

브루탈리스트는 단순한 건축 영화가 아니다. 건축을 통해 인간의 존재와 상처, 역사와 정체성을 탐구하는 작품이다. 그리고 브루탈리즘이 갖는 ‘그대로 보여주는 방식’을 영화적 기법으로도 충실히 반영하며, 라즐로의 삶과 그의 건축 철학을 일체화한다. 이 영화는 건축과 인간, 과거와 현재가 어떻게 얽혀 있는지를 강렬한 비주얼과 상징을 통해 관객에게 던지는 작품이다.


수직 하강 상승 도로를 달리는 장면을 아래에서 보여주는 거 해리슨이 마지막에 사라진 이유? 이야기가 중구난방이라는 생각도 들었음 그의 실제 건축물과 그의 인생을 겹쳐 보이게 하려는 건가 실제로는 유대인을 깊이 혐오했던 건가


브루탈리즘 - 그대로 보여주는 방식 - 영화 속의 라자로에게도 동일하게 적용

조피아로 시작해서 조피아로 끝난다

의자 - 서재 - 성당 의자 두 개를 합치면 성당의 십자가? 서재의 45도 가림막?

흑인 친구 고든의 이야기 : 아내의 언니가 돌봐주었다 : 라자로 가족과도 겹치는 이야기

코는 왜 다쳤냐? - 정체성과 역사적 상처 고통과 연관

해리가 아버지를 위한 서재 -> 밴 뷰런이 어머니를 위한 건축을 짓는 것과 동일

크레딧을 수직으로 두는 것

그래서 라자로가 있어야 할 곳은 어디?

뒤틀려 보여주었던 자유의 여신상

밴 뷰런이 사라지고 나서야 그 건축물이 어떻게 지어졌는지, 대리석 위에 햇빛이 어떻게 쏟아지는지를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