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리기 (형이하학적 성찰 나는 달린다 고로 존재한다)

Quotes

우리에게는 또한 걷기와 달리기 사이에 경계가 존재한다. 한 발이 항상 지면에 놓이는 것은 두 발이 공중에 있는 것과는 다르다. 달리기는 따라서 걷기의 변형이 아니다. 달리기는 걷기에 환원되지 않는 경험이다. 달릴 때 나는 걷는 것보다 좀 더 빨리 걷는 자의 느낌을 갖지 않는다. 나는 신체를 다른 용도로 사용한다.

달리기는 다른 어떤 스포츠도 할 수 없는 방식으로 스포츠를 발가벗긴다. 아베베 비킬라(Abebe Bikila)는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서 1960년 로마 올림픽에서 콘스탄티누스 개선문을 맨발로 달려 지나갔다. 마라톤 주자는 움직이는 신체의 가능성, 지속적인 이동성 이외에 다른 것을 증언하지 않았다. 아베베 비킬라가 죽었을 때, 국장이 거행되어 사람들을 울렸고, “아침에 일어나고 해가 질 때까지 뛸 수 있는 사람”이라고 그를 불렀다. 달리기는 그 자체로 다시 생각되었다. 달리기는 스포츠 이상의 것이며, 삶의 능력이다.

왜 우리가 달리기라고 부르는 이 이상한 사실적 복잡성이 존재할까? 달리는 신체에서 삶은 더 이상 자기 자신에 속하지 않는다. 바닥에서 분리된 두 발이 다시 바닥으로 돌아오는 것은 전적으로 여기도, 전적으로 저기도 아니다. 상승과 추락의 이 운동은 틈새, 단속적으로 도달하는 단편적인 비상의 가능성을 창출하고, 모든 중력으로부터 자유롭게 탈출하고, 다시 중력으로 되돌아온다.

반면 달리기는 결심에 속하는 인간적 행위다. 다시 말해, 걷기를 일시적으로 중단하겠다는 결심, 걷기를 다른 태도로, 다른 삶의 태도로 대체하겠다는 결심이다.

일상의 반복은 일상을 안정시키는 데 기여한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우리가 유지하는 반복이라는 사실 그 자체에 의해 삶의 욕구 가능성의 토대를 세운다. 따라서 하찮음의 반복보다 더 탁월한 실존의 증거는 존재하지 않는다. 카뮈는 『시시포스 신화』의 초반부에서 한 사람이 더 이상 매일 면도하기를 원치 않았기 때문에 자살했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그 동기는 의심할 바 없이 가장 그럴듯한 이유들 중 하나다. 반복을 지속하는 것은 분명 삶을 유지하는 것이다! 반복이 불가능할 때, 삶은 끝장이다. (중략) 반복은 마치 중요한 것처럼 가장 무의미한 제스처를 강요한다. 삶은 이유 없는 제스처의 긍정 속에서만 유지된다. 달리기와 같은 하찮은 행동의 반복은 순수한 우연을 반짝이게 하기 위해 삶이 전적으로 기계적이고 자동적인 제스처의 생성에서 빠져나오늘 것을 가능하게 한다. 삶은 우연을, 아무것도 아닌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로 만들면서 예술 작품이 된다. 이때 하나의 제스처의 전개는 삶의 스타일화와 같다. 하찮음은 고통과 같다. 왜냐하면 모든 삶의 우연의 영역이 폭발하기 때문이다. ~p.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