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주의
19세기 이전까지는 자연주의로서의 사실주의가 정의되어 왔다. 그것은 성실하고 정확한 ‘자연의 모방’에서 나아가 그것의 ‘완벽히 이상화된 재현’으로서의 사실주의였다. 19세기에 이르러 사실주의는 새로운 의미를 부여받는다. 당대 낭만주의 정신에 대한 전적인 반대 표명과 비판을 가하면서, ‘동시대’에 일어나고 있는 현실을 사회비판적인 관점으로 표현한 것이다. 즉, ‘자신이 속한 시대의 풍속, 관념, 그리고 여러 실상을 본 대로 그린다.’는 데 그 독특한 의의를 갖기 시작했다.
사실주의의 이념적 기반
쿠르베의 교우였던 프르동은 19세기 중반의 새로운 예술은 과거 18세기 예술의 비합리성·방탕함·퇴폐성에 대립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진실된 사상·악에 대립한 덕 그리고 분별력으로 이끌어 감으로써 인간의 존엄성을 고양시키며, 존재의 완전에 기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과거의 전통 예술은 우리에게 키메라와 같은 망상을 공급하고, 우리를 환상에 취해 있게 하며, 우리를 속여 헛된 이상을 지니게 하였지만, 새로운 예술은 해로운 환상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키고, 그러한 신기루를 고발하게 해준다. 즉 관념을 넘어 실존을 중심으로 하는 사회 비판을 주장하는 미술이어야만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다시 말해 사실주의는 낭만주의가 주장했던 영웅이나 신이 주인공인 거창하고 먼 나라의 이야기 대신 ‘이곳’의 ‘현재’, 곧 당대의 일상을 미화나 왜곡 없이 표현하고자 한 것이다. 대표적인 작가 쿠르베는 오직 자연의 제자이기를 원했다. 그는 아름다움이 아니라 진실을 원했으며, 이 점에 있어서는 바로크의 화가 카라바조와 흡사하다. 그는 당시 주류 사조였던 신고전주의와 낭만주의의 인습에 대한 항거가 되길 원했고, ‘부르주아에게 충격을 주어’ 그들이 자만으로부터 벗어나길 바랐다. 상투적이고 능란한 조작에 대한 반기를 들어 타협하지 않는 예술적 순수함을 선언한 것이다.
자연주의와의 구별
사실주의와 자연주의는 종종 혼동되지만 그 성격은 다르다. 자연주의(Naturalism)란 자연 대상을 양식화하거나 그 관념적 표현을 행하지 않고, 보는 그대로를 충실히 재현하려는 예술 제작 태도를 말한다. 자연주의는 현실에 대한 목적론적 설명을 거부하고, 현실을 선입견 없이 실험적으로 관찰하는 방법을 예술에 적용한다. 리얼하게 그리되 역사적인 측면이 아니라 한 부분을 치밀하게 묘사한다. 그래서 ‘작품 자체’는 비판적이지 않고 순응적이며, 때로는 비관적이기도 하다.
반면 사실주의는 미추(美醜)를 불문하고 자연을 표현하되, 리얼하게 그리면서 인과 관계에 따른 역사에 주목한다. 원인을 따져가는 것이므로 사회의 잘못을 따지고자 하면 그 원인을 분석하고, 그 결과 비판적 성격을 띠게 된다. 이러한 사회비판적 관점이 사실주의를 단순한 외양의 재현을 넘어서게 하는 핵심 요소이다.
동시대성의 요구
쿠르베의 사실주의는 서양 미술사에 있어 예술가가 ‘무엇을, 왜 그려야 하는가?’라는 문제를 사회적 현실로부터 찾으려 했던 최초의 유파였다는 점에서 커다란 의의를 갖는다. 1855년 개최한 그의 개인전과 그 서문에서 ‘자기가 속하는 시대의 풍속, 관념, 그리고 여러 실상을 자기가 본 대로 그린다.’라고 말한 것에서 짐작하듯이, 일반 시민 또는 하층 계급 사람들의 생활이나 노동을 현실로 보고, 미추를 불문하고 그 모습을 표현하려 한 것이다.
이러한 동시대성에 대한 요구는 19세기 리얼리스트들의 핵심적인 사고 방식으로, ‘예술가는 그의 시대와 함께 있어야 한다.’라고 주장한다. 보들레르가 말한 ‘근대의 영웅주의’란 바로 이러한 동시대의 삶에서 영웅적인 것을 발견하는 태도를 의미한다.
주요 작가들
쿠르베 (Gustave Courbet, 1819-1877)

쿠르베가 자신의 고향 오르낭을 배경으로 그린 대작 《오르낭의 매장》(1849-50)은 발표 당시부터 너무나 혁신적인 작품으로 많은 논란을 일으켰다. 그는 오르낭의 시골뜨기들을 315×663cm의 큰 화면에 담았다. 또한 일부러 좌우로 죽 늘어놓아 영웅을 중시하는 낭만주의 미술과 다른 구성을 취했다. 그는 이 그림을 통해 ‘인민의 미술’, ‘평등주의’를 반영하고자 했다. 이 그림을 본 파리 부르주아 관객들은 이 그림이 부르주아의 ‘매장’을 암시한다고 여겼다. 이처럼 쿠르베는 파리 부르주아 예술 관객의 엘리트 의식에 정면으로 도전함으로써 기존의 예술에 저항하였다.
이러한 ‘저항의지’는 현대에 와서 매우 중요한 예술의 속성이 되었다. 쿠르베 이후로 예술의 역사는 사회의 ‘전위(avant-garde)’로서 나름의 특권적인 영역을 확보해 나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또한 쿠르베의 그림을 살펴보면 물감 자국이 상당히 두텁고 밀도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붓보다는 나이프를 많이 사용하여 물감을 칠한 그의 그림은 회화라는 장르 본연의 ‘물질성’을 크게 강화시킨다. 이러한 점은 쿠르베의 그림이 다른 사실주의 화가의 설명적 작품과 구별되는 차이점이기도 하다.
대표작으로는 《오르낭의 매장》(1849-50), 《돌 깨는 사람들》(1849), 《화가의 아틀리에》(1855) 등이 있다.
도미에 (Honoré Daumier, 1808-1879)

도미에는 석판화가이자 화가로서 당대 사회와 정치를 날카롭게 풍자하였다. 그는 4천 점이 넘는 석판화를 제작하여 신문과 잡지에 기고하였으며, 이를 통해 부르주아의 위선, 법조계의 부패, 정치인들의 무능을 고발하였다. 그의 풍자화는 단순한 희화화를 넘어 사회 비판의 무기로 기능하였다. 《삼등 열차》(1862-64)는 당시 하층민의 삶을 인간적 존엄과 함께 포착한 걸작이다.
밀레 (Jean-François Millet, 1814-1875)
밀레는 바르비종파의 대표 화가로, 농민의 삶과 노동을 주제로 그렸다. 《이삭 줍는 사람들》(1857), 《만종》(1857-59) 등은 농촌의 일상을 경건하고 기념비적으로 표현하였다. 그는 노동하는 인간의 모습에서 종교적 숭고함을 발견하였으며, 이는 낭만주의적 감수성과 사실주의적 관찰이 결합된 독특한 양식이다. 다만 밀레의 작품은 쿠르베처럼 직접적인 사회 비판보다는 농촌 생활의 서정적 측면을 강조하였다는 점에서 ‘순수한’ 사실주의와 구별되기도 한다.
사실주의의 의의와 영향
19세기 사실주의를 대표하는 작가로는 쿠르베, 도미에, 밀레로 집약할 수 있는데, 이들의 공통 관심사는 ‘현실을 보는 눈’이라 할 수 있다. 사실주의는 다음과 같은 점에서 미술사적으로 중요한 의의를 갖는다.
첫째, 예술의 주제를 역사적·신화적 장면에서 동시대의 현실로 전환시켰다. 이는 아카데미의 장르 위계를 뒤흔드는 혁명적 시도였다. 전통적으로 역사화가 가장 고귀한 장르로 여겨졌으나, 사실주의자들은 농민이나 노동자의 일상을 대형 화폭에 담아 역사화와 동등한 격을 부여하였다.
둘째, 예술과 사회의 관계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불러일으켰다. 예술가는 더 이상 아름다움의 창조자나 이상의 재현자가 아니라, 사회적 현실의 증언자이자 비평가로서의 역할을 자임하게 되었다. 이러한 관점은 이후 사회적 사실주의, 팝아트 등 현대 미술의 여러 경향에 영향을 미쳤다.
셋째, 회화의 물질성에 대한 자각을 촉진하였다. 쿠르베의 두터운 마티에르는 회화가 단순히 현실의 투명한 창이 아니라 그 자체로 물질적 실체임을 드러냈다. 이러한 자각은 인상주의를 거쳐 모더니즘 회화의 핵심 원리로 발전하게 된다.
이후 사조와의 관계
사실주의는 인상주의의 등장으로 쇠퇴하였으나, ‘동시대를 그린다’는 원칙은 인상주의자들에게 계승되었다. 마네는 사실주의의 동시대성과 인상주의의 시각적 혁신을 매개한 인물로 평가된다. 그의 《풀밭 위의 점심 식사》(1863)와 《올랭피아》(1863)는 고전적 주제를 동시대의 맥락으로 옮겨놓음으로써 사실주의의 정신을 계승하면서도 새로운 형식적 실험을 시도한 것이다.
20세기에 들어와 사실주의의 사회비판적 정신은 사회적 사실주의와 신사실주의 등의 형태로 부활하였다. 소련의 사회주의 리얼리즘은 사실주의의 명칭을 빌렸으나 이데올로기적 선전 도구로 전락하여 원래의 비판적 정신을 상실하였다. 반면 미국의 애쉬캔 스쿨(Ashcan School)이나 사회적 사실주의는 도시 하층민의 삶을 그리며 쿠르베의 정신을 이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