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 미술사 기출풀이
2004 : 서양중세미술(비잔틴, 로마네스크, 고딕)의 전개과정과 특성을 시대적 배경과 관련하여 논의하시오.
중세는 서양의 4세기부터 14세기까지를 일컫는 말 그대로의 중간시대라는 뜻이다. 천년 이상의 기간에 걸쳐있는 중세를 흔히 암흑기라고 부른 것은 인간 중심적인 사고를 중시한 르네상스 인들이 ‘신 중심적인 시대’를 비하한 표현이었다. 그러나 실제 중세는 지중해 중심의 라틴족과 유럽 북방의 게르만족이 융합하여 근대의 유럽국가의 원형을 형성하고 그 문화를 낳은 역동적인 역사의 연속이었다.
중세는 초기 500년 동안은 전쟁과 약탈, 혼란한 정치가 계속되는 일종의 암흑 시기였다. 그리고 예술은 신 중심의 인간관 아래 기독교 교리 전달의 보조 수단이라는 인식이 지배하였으므로 예술에 있어서도 ‘암흑시기’라 할 수 있겠다. 즉, 미술은 종교의 시녀에 불과했던 것이다. 초기에는 신을 형상화하는 것조차 금지되었지만 그레고리우스(?)가 문맹자들에게 교리를 설파하는 일종의 그림책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말함으로써 비로소 미술이 종교의 교리 전달 수단으로써 사용될 수 있었다. 즉, 영원하고 비가시적인 것을 가시적이고 감각적인 표현을 통해 신자들에게 교리를 설파하는 용도로써 사용된 것이다.
따라서 중세의 미술은 사물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일에는 관심이 없었다. 화가의 자율적 창의성 보다 하나님에 대한 찬미가 궁극적인 목표였기 때문이다. ‘그림 성서’ 혹은 ‘문맹자를 위한 교리서’라고 일컬어질 만큼 성경의 내용과 가르침을 그대로 전달하고자 하였다. 중세 예술의 대부분은 ‘무명의 예술가’들의 작품이며, 때로는 집단적인 협동 작품이었다.
초기 500~1000년경 동안에는 어떤 분명하고 통일적인 양식이 생겨나지 않았으며 오히려 수많은 서로 다른 양식들이 갈등을 일으켜 혼돈된 상태였다. 그러나 이 500년 동안에도 특히 수도원에서는 계속해서 학문과 예술을 사랑하는 이들이 고대의 미술을 부활시키려 여러 번 시도하였다. 북쪽의 침략자들에 의해 번번이 실패로 끝나기는 했지만 말이다. 이 침략자들은 그들에게는 야만인이라고 느껴졌겠지만 이들 또한 고유의 미술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 중에는 정교한 금속 세공을 하는 장인이나, 탁월한 목공예가들도 있었다.
켈트 족의 아일랜드와 색슨 족의 잉글랜드에서 수도사와 선교사들은 이러한 북방민족 장인들의 전통을 기독교 미술에 응용하려 노력했다. 그들은 그 지방의 장인들의 전통을 기독교 미술에 응용하려 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이룩한 가장 성공적인 업전은 7~8세기에 잉글랜드와 아일랜드에서 만들어진 필사본들이었다. 디자인과 색채의 복잡한 조화를 이루고 있으면서도 번잡하지 않는 필사본을 그들은 제작해냈던 것이다. 이는 당시 미술가들이 결코 솜씨와 테크닉이 뒤떨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증명해준다. 그들은 전통으로부터 훈련 받은 눈과 손으로 필사본 위에 아름다운 문양을 그릴 수 있었으며 이로써 서유럽 미술에 새로운 요소를 가미시킬 수 있었다. 즉, 고전적인 전통과 토착 미술가들의 취향이 서로 충돌하여 전혀 새로운 미술이 서유럽에서 자라나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 이전의 고전 미술에 대한 지식이 완전히 잊혀졌던 것은 아니다. 샤를마뉴 대제는 800년경에 그의 궁정에 아헨 대성당을 세웠는데 이는 약 300년 전 라벤나에 세워진 유명한 교회의 충실한 복사판 같은 것이었다. 그의 궁정에서 제작된 필사본 성경의 복음서를 쓰고 있는 성 마태오의 모습 도한 고전적인 방식으로 그려졌다.
이처럼 중세의 미술 작품은 그럴 듯하게 닮게 그리거나 아름다운 것을 만들어내려고 한 것이 아니라 신자들에게 성경의 내용과 가르침을 전달하고자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따금 봉건 영주들과 귀족들에 고용된 미술가들은 비종교적인 작품들을 제작하긴 하였으나 교회에 비해 그들의 성은 파괴당할 때가 많았기 때문에 보존된 것이 종교적인 것보다 별로 남아있지 않다. 이 중에는 태피스트리가 남아있는데 전쟁과 승전을 담고 있다. 서투르긴 하나 간결한 수단으로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사건들을 중점적으로 묘사함으로써 한 편의 서사시를 그렸다고 할 수 있다.
비잔틴(330~1453)
한 편 330년 동로마는 콘스탄티누스 1세가 비잔틴에 수도를 건설하고 ‘콘스탄티노플’이라고 불렀는데 여기서 그리스 정교회에 바탕을 둔 기독교 문화가 꽃을 피웠다. 비잔틴 미술은 서양 중세기의 기독교 회화의 주류를 형성한 미술로서 고대 오리엔트 미술의 장려함이나 엄숙함을 살려내어 기독교 문화를 찬양하는데 이용되었다. 이 미술은 동서 문화를 절충한 기독교 미술로 동방 미술과 서양 헬레니즘 미술을 혼합시킨 것이다. 비잔틴 미술은 동서를 융합하려는 의욕으로 헬레니즘의 전통에서 벗어나 평면적이고 추상적인 동방양식으로 전환하였다. 이탈리아인들에게 조각을 회화로부터 분리시키는 장벽을 뛰어 넘게 만든 것이 바로 비잔틴 미술이었다. 선명한 색채와 금색 바탕을 사용한 것이 특징이며 기독교적 주제와 양식화된 표현을 일관성 있게 유지하였다. 대표 건축물로는 라벤나의 산 비탈레 성당, 하기야 소피아 대성당 등이 있다.
하기야 소피아 성당은 로마 건물의 거대한 스케일과 동방의 신비스러운 분위기를 융합시킨 건물이다. 로마의 직사각형 바실리카 위에 거대한 돔을 올려놓은 형태이다. 비잔틴 건축공학의 승리인 삼각 궁륭에 의해 이와 같은 위업이 가능하였는데 이처럼 4개의 아치가 정사각형 모양을 형성하여 돔을 지탱하는 구조는 처음 시도된 것이다.
비잔틴 미술의 특징은 차분한 우아함, 감정의 절제, 얼어붙은 듯한 권위에 찬 경건함 등에 뿌리를 두고 있는데, 성경말씀이 하나의 생생한 현실로 적용됨에 따라 단순히 진리를 전하는데 머물지 않고 하나님의 뜻이 작용하는 바를 보여주길 원했고 일종의 예술적인 생략법으로 메시지를 강하게 전달하고자 했다. 교회당 벽화는 처음에는 초기 기독교적인 주제가 그려졌지만, 성상파괴운동 이후에는 교의(dogma)의 유형화된 묘사만 장식되어 도상학으로 통일된 상이 나왔다. 고대로부터의 탈피는 점진적으로 진행되었다.
비잔틴 미술의 주역은 모자이크였다. 로마의 모자이크는 돌 조각으로 제작되어 마루바닥이나 벽면 장식에 사용되었다. 비잔틴 미술이 모자이크를 회화의 위치로 끌어올렸다고도 할 수 있을 정도로 화려한 색채와 장식을 띠었다. 색유리를 불에 구워 만들었는데 거대한 채색 효과를 내어 멀리서 볼 수록 효과적이다. 이는 빛을 반사하여 당시 사람들의 환상을 가중시켰다. 이러한 신비적인 분위기는 서유럽 크리스트 미술(로마네스크)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모자이크는 값비싼 예술이었기 때문에 나중에는 프레스코에게 자리를 양보해야 했다.
그리스도나 성모를 판자 위에 예배의 대상으로 그린 이콘화, 즉 성상화도 그려졌는데 템페라나 납화법으로 나무에 그려진 호화로운 이콘들은 작은 모자이크 타일로 대체되면서 더욱 화려해졌다. 이것은 예술의 창의성보다 장인적 기능에 더 의존하였다. 비잔틴 미술에서 필사본 성서의 “세밀화 장식”은 건축과 함께 두드러지는 예술적 업적으로 본다. 암흑시대 수도사들은 성직자면서 동시에 교사, 예술가였는데 초기 채색사본들은 대개 이들에 의해서 제작되었다. 작품의 주된 목적은 성서의 내용과 그 의미와 느낌을 감동적으로 전달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비잔틴 교회는 미술가들에게 고대의 모델을 지키라고 요구했으며 옷 주름이나 얼굴 및 몸짓의 묘사도 그리스 미술의 관념과 업적을 그대로 보존했다. 그리고 그리스도나 성모를 표현하는 데 있어 어떤 허용된 범위를 지켜야 한다는 것 때문에 비잔틴 미술가들이 그들의 개인적인 자질을 개발하기는 어려웠다. 비잔틴 미술은 약간의 시대적 변화와 어떤 종류의 일관성을 갖고 10세기 동안이나 계속되었다. 이처럼 비잔틴 미술은 고대 이집트 미술과 함께 생명력이 있는 미술로 평가되고 있다.
비잔틴 미술이 동방적인 성격의 기독교 미술인데 비해 로마네스크 미술은 서방 의 기독교미술로서 프랑크왕국의 카롤링 왕조 미술을 계승한 오토왕조 미술로 본격적인 서방 기독교미술의 양식인 것이다. 11세기 후반에 유럽전역에서 일어난 로마네스크 미술은 ‘교회의 승리’를 대표한다고 할 수 있다. 유럽 전역이 그리스 도교로 개종하였으며 정치, 경제, 사회의 일반이 교회의 지배하에 들어 가게 되었다. 고대 로마의 건축양식과 흡사한 교회가 많이 건축되었으며, 단단하고 육중한 모습의 석조건물로서 악으로부터 보호하는 “전투적 교회”의 모습을 하고 있다. 로마시대의 머리가 둥근 아치나 원통형 아치가 구사되었으며 로마네스크 에서 네스크는 로마풍의 중후한 취향을 지녀 로마풍이라는 뜻으로 사용. 장방 십자형의 형태, 블라인드 아치(blind arch), 블라인드 아케이드(blind arcade), 장 엄한 벽체와 반원 아치, 원통 아치(vault)와 원통 교차 아치 사용. 대체로 950 ~ 1200년경에 이탈리아와 프랑스에서 일어나 유럽 여러 곳으로 전파되었다. 프랑 스는 오베르뉴 양식·랑그독 양식 등이 있고, 영국은 특히 노르만 양식이라고 한 다. 로마네스크라는 명칭은 고대의 ‘로마적인 양식’임을 뜻하며, 로마네스크 미술은 위압적, 교화적인 내용으로 매우 대담한 창작에 의한 종교적 감성의 표현을 의도한 것이다. 11세기는 교회의 힘이 강대해져 십자군 운동을 벌이고 황제를 파문 시키면서 전투적, 권위주의적으로 된다. 이 시기에 교회건축은 미술의 주도적인 위치를 차지하는데, 이는 교회가 하나님이 거처하시는 지상의 천국이라고 여겨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교회 건축이 중심이 되어 조각이나 회화는 교회 건물의 종속적 장식물로서 발달하였다.
대표적 건축물로는 피사 사원, 생 새르냉 대성당 등이 있다. 이 시기의 건축적 특징은 목조였던 천장을 석조 궁륭으로 바꾸었으며 벽면은 크고 창문이 작고, 천장이 낮아 중후하지만 실내가 어두워 무거운 느낌을 준다. 외관은 일반적으로 단순, 소박하다. 단단하고 육중한 모습의 석조건물로서 악으로부터 보호하는 ‘전투적 교회’의 모습을 취하고 있다.
로마네스크 회화는 고유의 도상을 발전시켰다. 형식적으로는 육체적인 미의 이미지를 추구하지 않고 정신적이고 영원한 미를 추구하였다. 이는 단순 명쾌하고 대담하여 둔중한 건축과 잘 조화되어 차원 높은 장중성이 표출되었고, 기독교의 관념을 직관적으로 묘사하였다. 벽화로써는 과거 비싼 모자이크에서 저렴한 프레스코화, 템페라화 등이 발달하였는데 힘찬 터치와 대담한 채색법은 현대 미술에도 영향을 주었다. 또한 조각이나 회화는 모두 인물의 모습이 초현실적으로 표현되어 있어서, 이 시기의 양식이 특징이 되고 있다. 이들 조각은 기독교 미술로서의 초월성과 동방적 장식성과의 결합 위에서 고전적인 추상상태, 묵시록적인 환상의 세계를 낳았다. 기하학적 문양구성, 신비적인 초자연적 세계가 로마네스크 조각의 주조이다.
이 시기에는 원근법과 명암법 등 사물을 묘사하기 위한 양식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그 덕택에 중세 미술가들은 형태뿐 아니라 색체에서도 자유로웠다. 그들은 자연의 모방적 색채가 아닌 자신이 원하는 색채를 마음대로 칠했다. 자연 세계를 모방할 필요가 없었던 중세의 미술가들은 눈이 아닌 마음으로 보는 법을 통하여 작품을 제작하였던 것이다.
‘고딕’ 양식은 12C 말 프랑스 북부에서 발생한 미술양식이다. 고트족에서 따 붙인 말로 그리스, 로마적인 조화가 없고 야만적이라고 비하한 것에서 시작되었다. 19세기 이후 서유럽 중세미술의 한 양식을 가리키는 미술사상의 용어로 등장하였고, 오늘날에는 이러한 경멸조와는 상관 없이 독자적인 하나의 양식으로 불려지며 르네상스 이전의 예술 활동을 총괄하게 되었다.
건축적 특징으로는 첨탑과 색유리창, 지골궁륭, 첨두아치, 공중부벽등으로 인해 벽이 점점 얇아졌고, 창을 더 많이 낼 수 있음으로 스테인드글라스가 발달하였다. 로마네스크의 투박함에서 벗어나 고도로 발달된 건축술에 힘입어 두꺼운 벽에 의존하지 않고도 건축물의 구조를 수직으로 높이 세울 수 이있게 된 것이다. 또한 성모마리아에게 바쳐진 미술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성모에게 바쳐진 대성당이 연이어 건축되었다. 고딕 미술은 새로운 도시와 함께 생긴 시민계급의 예술이었으며, 기독교가 여전히 지배적이었지만 그 해석은 인간적이고 감정적인 요소가 강하게 나타났다. 그리고 고딕시대에서 볼 수 있는 우아한 조각과 필사본, 세공작품 안에 등장하는 섬세한 인물표현은 인간이 좀 더 신에 가까워지려는 노력을 나타내며, 인간적 감정 표현이 다시 살아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회화에서는 스테인드글라스와 더불어 “성전의 삽화”등이 성행하였고 염색, 칠보, 세공 등 기타 금속공예가 함께 발달하였다.
수직적인 고딕 건축이 보여주는 신앙심과 정신성과 반대로 미술가들은 인간과 자연에 대한 관심을 보이기 시작. 내면의 감동적 표현에 중점을 두는 방향에 중점. 환상적 세계에서 일상의 세계로 눈을 돌린 것이다. 대표적인 건축물로는 생 드니 성당과 노트르담 성당 그리고 샤르트르 성당이 있다.
고딕조각은 매우 사실적인 힘으로 우리에게 호소하고 있으며 인간의 감성에 호소하는 이 사실적인 힘이 바로 고딕 “사실주의”의 핵심이었다. 신 또한 두려움의 대상이기보다는 사랑의 대상이 되기를 바라는 인간화된 신으로 표현되었다. 그 결과 고딕의 조각과 회화는 더욱 자연적인 성격을 지닐 수 있게 되었다.
특히 이탈리아의 고딕회화는 다른 유럽 회화 양식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 중 피렌체화파의 지오토는 회화에서 주제와 양식의 문제를 방법론으로 전환시킴으로써 르네상스 회화 탄생에 큰 역할을 하였으며, 그 당시의 화풍이라고 믿기 어려운 혁신을 보여주어 ‘서구 사실주의의 창시자’로 불린다.
2001 : 15세기 이태리 르네상스 회화에 대하여 역사적 배경(정치, 경제, 사상)과 함께 조형적 특성을 설명하고 그것이 이후 서양회화사에 끼친 영향에 대하여 논하시오. (50점)
르네상스는 14~16세기 사이에 있었던 문예부흥운동으로 프랑스어로 ‘재생’, ‘부활’을 의미한다. 중세시대의 신 중심의 세계관에서 인간중심 세계관으로 바뀌면서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문화를 부활시키고자 시작되었다. 르네상스가 이탈리아 피렌체, 시에나, 베네치아 등에서 시작된 배경은 다음과 같다.
역사적 배경
신흥 자본 계층인 부르주아가 출현하였다. 이들은 교역을 통해 부를 축적했다. 대표적으로는 메디치 가문이 있다. 이들에 의해 중세의 봉건주의적 장원 경제가 붕괴되고 근대 자본주의가 생성되었다. 이에 따라 신흥 도시가 생겨나고 근대 시민 사회가 성립되었으며 그들의 인문주의 의식으로 인해 개인이 삶의 주체가 되는 자유 의식이 자라나게 된 것이다. 특히 이탈리아에서 세계와 종교에 대해 이전과 다른 방식으로 생각하게 되면서 가장 먼저 변화가 시작되었다.
조형적 특성
- 원근법: 과학적, 객관적인 방법으로서의 미술
- 미술을 과학으로 까지 여기게 됨
이러한 조건들을 통해 경험과 실험을 토대로 자연을 관찰하는 새로운 학풍이 불기 시작하였다. 예술적으로 르네상스는 문화적 미술적 부흥을 의미했으며, 특히 고대 그리스 로마 문화를 부활시키려는 의식적인 운동이었다. 고전주의의 부활, 인문주의, 자연의 재발견, 개인의 창조성 등을 특징으로 하는 르네상스 정신이 미술에서 두드러졌다. 당시의 미술은 과학의 차원으로까지 간주되었으며, 자연을 탐구하는 수단인 동시에 발견의 기록이었다. 따라서 미술은 가시적인 세계에 대한 관찰에 바탕을 두고 ‘원근법’ 등의 수학적 원칙에 따라 실행되었다. 이와 같은 계기는 브루넬레스키와 도나텔로가 로마에서 고대 로마식 건축과 조각에 관한 연구에 몰두하면서 시작되었다. 이들이 피렌체로 돌아와 자신들의 고전지식을 이용한 작품 활동을 시작함에 따라 고대 세계의 미술이 다시 빛을 보게 되었던 것이다. 특히 투시원근법과 명암법의 발명은 르네상스 시대의 세계에 대한 ‘객관적 대상화’를 잘 보여준다. 마사초 이후 1435년 피렌체의 화가 레온 바티스타 알베르티는 그의 저작 <회화론>에서 ‘원근법’의 규칙을 정식화했고, 이는 명암법과 함께 근대에 이르기까지 서구 회화의 중심 원리가 되었다.회화론>
원근법은 사람의 눈에 보이는 3차원 공간의 물체나 공간을 2차원의 평면 위에 거리감과 깊이감을 주어 입체적으로 표현하는 방법을 말한다. BC 5세기 그리스 화가인 폴리그노토스가 원근법을 사용했듯이 완전히 새로운 것은 아니고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미술가들에 의해 시작되었다. 고대부터 사용한 원근법은 조형성과 장식성을 중시한 중세에는 거의 사용되지 않다가 르네상스 시대에 체계화되었다. 1417년 무렵 건축가 브루넬레스키가 최초의 실험적 시도로써 투시 원근법과 소실점에 대한 과학적 접근을 완성했으며, 이후 알베르티가 <회화론>에 원근법의 개념을 체계화하면서 회화에서 마사초의 <성삼위일체>에서 최초로 실현되었다. 성삼위일체>회화론>
서양 회화사에 끼친 영향
르네상스 시대에서의 미술에 대한 일련의 과학적인 접근은 미술의 지위를 격상시킴과 동시에 확고히 했다. 특히 원근법을 비롯해 르네상스 시대에 갖추어진 문법들은 반세기 가까이 불문율처럼 여겨져 그 영향력은 실로 지대하다. 이는 19세기 마네가 나오기 전까지 지속되었다.
원근법이 발견된 이래로, 화가들은 화면에 자신이 원하는 만큼의 깊이감과 공간을 자유자재로 표현할 수 있게 되었다. 원근법은 2차원의 평면에 3차원적인 공간을 재현하는 가장 기본적이고 효과적인 수단이다. 바꾸어 말하면 원근법은 전통적인 회화가 3차원적 재현이 실제로는 2차원 평면 임을 숨기는 방법이었다. 그런데 푸코에 의하면 돌연 19세기의 마네는 그 속임수에 호응하는 순진함을 중지한 것이다. <뛸레리 공원의="" 음악회="">(1862)와 <오페라에서의 가면무도회=""> (1873-4)에서는 화면의 절반을 수많은 인물들로 가득 채워 밀집된 인물들 이 마치 벽처럼 느껴지도록 만들었다. <막시밀리안의 처형="">(1868)에서는 화면 중간에 실제로 넓은 벽을 그려 넣어 깊이감을 제거함으로써 그림이란 하나의 평면 위에 그려진 사물이라는 사실을 암시한다. 이러한 사물로 서의 그림이라는 의미는 결국 ‘캔버스의 물질성’에 대한 자각을 말하는 것이다. 마네가 이루려 한 전통 회화의 전복은 현대 미술의 신호탄이 되었다. 막시밀리안의>오페라에서의>뛸레리>
2002 : 15세기에서 17세기까지의 서양 미술의 특징을 시대 상황과 함께 간략히 설명하고, 이러한 근세미술의 반작용으로서의 현대미술에 관해 모더니즘 개념을 중심으로 논하시오. (50점)
- 15세기 초기 르네상스
- 16세기 전성기 르네상스
- 16세기 중반 마니에리즘
- 17세기 바로크
신흥 자본 계층인 부르주아가 출현하고, 그들에 의해 중세의 봉건주의적 장원 경제가 붕괴됨과 동시에 근대 자본주의가 생성되었다. 이에 따라 신흥 도시가 생겨나고 그들의 마음 속에는 인문주의 의식이 다시 싹을 트기 시작했다. 르네상스가 시작된 것이다.
예술적으로 르네상스는 문화적 미술적 부흥을 의미했으며, 특히 고대 그리스 로마 문화를 부활시키려는 의식적인 운동이었다. 고전주의의 부활, 인문주의, 자연의 재발견, 개인의 창조성 등을 특징으로 하는 르네상스 정신이 미술에서 두드러졌다. 당시의 미술은 과학의 차원으로까지 간주되었으며, 자연을 탐구하는 수단인 동시에 발견의 기록이었다. 따라서 미술은 가시적인 세계에 대한 관찰에 바탕을 두고 ‘원근법’ 등의 수학적 원칙에 따라 실행되었다. 이와 같은 계기는 브루넬레스키와 도나텔로가 로마에서 고대 로마식 건축과 조각에 관한 연구에 몰두하면서 시작되었다. 이들이 피렌체로 돌아와 자신들의 고전지식을 이용한 작품 활동을 시작함에 따라 고대 세계의 미술이 다시 빛을 보게 되었던 것이다. 특히 투시원근법과 명암법의 발명은 르네상스 시대의 세계에 대한 ‘객관적 대상화’를 잘 보여준다. 마사초 이후 1435년 피렌체의 화가 레온 바티스타 알베르티는 그의 저작 <회화론>에서 ‘원근법’의 규칙을 정식화했고, 이는 명암법과 함께 근대에 이르기까지 서구 회화의 중심 원리가 되었다.회화론>
원근법은 사람의 눈에 보이는 3차원 공간의 물체나 공간을 2차원의 평면 위에 거리감과 깊이감을 주어 입체적으로 표현하는 방법을 말한다. BC 5세기 그리스 화가인 폴리그노토스가 원근법을 사용했듯이 완전히 새로운 것은 아니고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미술가들에 의해 시작되었다. 고대부터 사용한 원근법은 조형성과 장식성을 중시한 중세에는 거의 사용되지 않다가 르네상스 시대에 체계화되었다. 1417년 무렵 건축가 브루넬레스키가 최초의 실험적 시도로써 투시 원근법과 소실점에 대한 과학적 접근을 완성했으며, 이후 알베르티가 <회화론>에 원근법의 개념을 체계화하면서 회화에서 마사초의 <성삼위일체>에서 최초로 실현되었다. 성삼위일체>회화론>
15세기 초기 르네상스에는 현실적, 객관적 정확성에 치중하였다. 그러나 그림 전체의 조화로운 구성에는 아직 소홀하였다. 화면 속 대상 개체의 사실적인 묘사에만 주력하였고, 개체는 날카롭고 명확한 윤곽선으로 도려지게 되었다. 마사초의 <성삼위 일체="">,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등이 이러한 예이다.비너스의>성삼위>
르네상스가 전성기를 맞은 16세기에는 이성적 규칙을 통한 객관적인 정확성과 조화와 균형이라는 미의 이념이 잘 구현된 황금기라고 할 수 있다. 다른 어떤 세기보다 많은 천재들이 나타나 르네상스의 이상을 실현하였다. 레오나르드 다 빈치,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등이 그 예이다.
북유럽에 전파된 르네상스는 북유럽 특유의 정서와 조화되어 이탈리아의 그것과는 다른 경향이 드러났다. 이들은 종교 사회개혁 문제에 관심을 가졌으며 성경과 초기 교회의 정신으로 복귀하는 데에 그 목표가 있었다. 이러한 이유로 북유럽 르네상스는 자연스레 종교개혁으로 이어지게 된다. 대표적인 작가로는 얀 반 아이크, 알프레더 뒤러 등을 들 수 있다.
후기 르네상스는 16세기 중엽부터 말까지 나타나는데, 전성기 르네상스 이후에 인위적이고 기교적인 성격이 강하고 형식적인 면이 많이 부각된 경향을 뜻한다. 마니에리즘 이라고도 불리는 이 시기는 흔히 평가절하되기도 했는데, 예술적 기교에 치우친 타성적 예술이라는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최근 마이에리즘이 보여주는 긴장과 과장을 이 시대가 르네상스 시대와 같이 하나의 이상에 의해 지배되던 시대가 아니라, 여러 경향들이 교차하며 갈등을 일으키던 위기의 시대였던 데서 오는 일반적인 불안감이라 해석하고 있다. 또한 이들의 기형적인 자세나 불안정한 구도, 모호함 등은 20세기 초의 현실주의의 한 특성을 예고한다고 보여진다. 이는 막스 드보르작이 정신사로사의 미술사를 주창하며 매너리즘에 대한 시대적 반영을 통한 결과물이라 볼 수 있다.
이러한 격동의 분위기에는 종교개혁 또한 큰 부분을 차지했다. 구교와 신교의 대립이라는 새로운 사회적 분위기와 신항로 개척 등의 세계관의 변화를 주는 여러 요소로 인해 바로크가 태어난 것이다.
바로크 미술은 16세기 르네상스의 조화와 균형, 완결성에 대하여 빛, 양감, 역동성에 호소하였으며 과격한 운동감과 극적인 효과를 사용하였다.
바로크 회화는 대각선 구도와 원근법, 격렬한 명암 대비, 단축법, 눈속임 기법의 사용 등을 특징으로 한다. 17세기 초 이탈리아의 카라바조가 바로크 회화의 창시자로 불리며 그의 영향력은 북유럽과 스페인까지 퍼져 많은 추종자들을 낳았다. 특히 루벤스와 램브란트를 배출한 플랑드르와 네덜란드는 바로크의 중심지가 되었으며, 이 밖에도 스페인에서는 벨라스케스가, 프랑스에서는 푸생이 활동하였다. 특히 카라바조는 실제 눈에 보이는 것과 같은 사실주의를 탄생시켰고, 이는 바로크 시대의 한 축이었던 연극성과도 맞닿아 있다.
이렇게 서양 회화가 나름의 발전을 이어가고 있을 때 회화의 전복을 일으키고자 하였던 화가가 있는데, 바로 그가 마네이다. 그는 최초의 모더니스트라 불리울 만큼 전통적인 르네상스 회화를 거부하고 현대 미술의 개진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인물이다. 그는 특히 보는 것과 보여지는 것의 차이에 대한 논의를 불러 일으켜 회화란 무엇인가 라는 물음에 답할 수 밖에 없게끔 만들었던 인물이다.
<풀밭 위의="" 식사="">를 살펴보자. 풀밭>
이후 마네의 작품을 통한 원근법, 연극성에 대한 부정 이야기.
마네 이후의 회화의 전개 과정을 간략히 쓰기.
2013 : 17세기 바로크 시대의 회화, 조각, 건축적 특징을 램브란트, 카라바조, 벨라스케스 중 2명의 작가와 작품, 특징과 함께 이것이 미술에 끼친 영향을서술하시오. (50점)
- 1600~1750 이탈리아를 비롯한 유럽의 여러 카톨릭 국가에서 발전한 미술 양식
‘불규칙한’ 혹은 ‘변덕스러운’, ‘현란한’이라는 의미로 통용되기도 하는데 이는 ‘비뚤어진 진주’라는 뜻의 포르투갈어 ‘barroco’에서 유래. 르네상스 미술의 단정하고 우아한 고전 양식에 비해 장식이 지나치고 과장된 건축과 조각에 대한 경멸의 뜻으로 사용되었다. 부르크하르트와 뵐플린에 의해 미술사 및 비평용어로 사용되면서 전문적인 용어로 격상되었다. 이후 바로크 미술은 르네상스 미술에 대립하는 개념으로 상정되었다. 17세기 유럽의 시대정신과 부합하는 외형적이고 격동적인 경향의 미술이다.
바로크 미술은 전체에 종속되는 부분들의 조화를 통한 균형을 강조하였다. 이는 각각으로도 완벽한 부분들이 모여 이루는 전성기 르네상스의 전체적인 균형에 비할 수는 없지만, 매너리즘의 의도적인 부조화나 로코코의 단편성보다는 르네상스의 균형에 더 가깝다. 바로크가 추구하는 화합은 형식적이고 자기만족적인 차원을 넘어선 것이다. 따라서 여러 가지 수단(연극성)을 동원해서 보는 이로 하여금 신체적인 참여를 하게 함으로써 정신적인 참여를 유발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바로크 미술은 16세기 르네상스의 조화와 균형, 완결성에 대하여 빛, 양감, 역동성에 호소하였으며 과격한 운동감과 극적인 효과를 특징으로 한다.
바로크 회화는 대각선 구도와 원근법, 격렬한 명암 대비, 단축법, 눈속임 기법의 사용 등을 특징으로 한다. 17세기 초 이탈리아의 카라바조가 바로크 회화의 창시자로 불리며 그의 영향력은 북유럽과 스페인까지 퍼져 많은 추종자들을 낳았다. 특히 루벤스와 램브란트를 배출한 플랑드르와 네덜란드는 바로크의 중심지가 되었으며, 이 밖에도 스페인에서는 벨라스케스가, 프랑스에서는 푸생이 활동하였다.
- 카톨릭 국가와 신교 국가의 미술의 차이
바로크는 16세기 유럽 문명사의 한 축을 형성하는 종교개혁과 그에 따른 종교전쟁이 몰고온 종교적 위기와 깊은 관련이 있다. 이에 따라 카톨릭 국가와 신교 국가간의 미술도 차이를 보이는데, 이탈리아와 같은 카톨릭 국가에서는 반종교개혁으로 인해 종교 미술이 전성기를 맞았고, 반대로 영국과 네덜란드와 같은 북유럽의 신교국에서는 종교적인 그림을 그리는 것이 금지되었다. 따라서 미술의 소재가 정물화, 초상화, 풍경화, 풍속화 등 일상 생활로 확대되었다. 이러한 이유로 바로크 양식은 이탈리아의 사실주의에서 프랑스의 불꽃 양식까지 다양했지만, 공통적으로는 감동적인 효과를 극대화하고 있으며, 고도의 감수성을 보여주고 있다.
- 카톨릭- 카라바조
카톨릭 국가의 대표적인 작가는 카라바조를 들 수 있다. 카라바조는 16세기에서 17세기의 전환기에 로마를 중심으로 이탈리아에서 활약한 바로크 회화의 개척자이다. 그는 대담하고 개성적인 구성, 자연주의적 인물 묘사, 연극적인 강렬한 명암 대조를 주요 특징으로 하는 고유의 양식을 확립하였다. 17세기 초 전 유럽에서 수많은 추종자를 낳은 그의 양식은 르네상스의 고전주의와 구별되는 새로운 조형 언어였고, 그가 만든 바로크 미술의 어휘와 문법은 이후 등장하게 될 바로크 미술의 거장인 루벤스, 램브란트, 벨라스케스 등의 회화 세계를 구축하는 기반이 되었다.
<병든 바쿠스, 1593>
병든 바쿠스라는 제목은 이 그림속 인물의 안색이 황달에 걸린 듯 누렇고 푸르스름하기 때문에 붙여졌다. 모델은 화가 자신이었으며, 그가 이즈음 흑사병 때문에 병원에서 6개월간 있었던 자신의 모습을 담았다는 설이 있다. 당시의 로마 미술계에서 인기가 있었던 매너리즘 회화의 복잡한 구성이나 난해한 상징과 비교해 볼 때, 그의 그림은 조형 요소가 단순하고 메시지가 직접적인 면이 있다. 그러나 그의 작품에는 항상 명쾌하게 해석되지 않는 부분이 존재해 해석이 쉽지는 않다. 이 작품에서는 풍요와 쾌락의 상징인 바쿠스가 가난하고 병든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노출된 어깨와 시선은 관람자를 유혹하는 듯하다. 카라바조는 전형적인 화가의 자화상을 그린 것이 없지만 대신 자신의 그림 속의 한 인물로 분장을 하고 자주 등장했다. 이는 20세기 말 미술계에서 유행한 작가들의 분장한 자화상과 맥이 닿는 것으로 특히 신디 셔먼은 바로 이 작품의 바쿠스로 분장하여 그에게 받은 영감을 표시하기도 했다. 카라바조의 모든 작품에서 찾아볼 수 있는 자연주의적 세부 묘사도 두드러진다. 예를 들어 술잔을 든 바쿠스 손톱의 낀 때나, 팔과 가슴에 비해 햇빛에 많이 그을린 얼굴과 손의 색깔이 그 예이다. 또한 <점쟁이>에서 당대 인물의 개성이 생생하게 살아있는 용모와 표정, 옷차림과 함께 아름답고 조화로운 색채가 눈에 띈다. 그는 그의 고향 롬바르디야 특유의 깊은 붉은 색과 황토색, 흰색과 검정색을 즐겨 사용했다. 이러한 색조와 인물에게 초점이 맞춰진 구성으로 그의 그림 속 세계는 관람자의 손에 만져질 듯이 사실적인 대상이 되었다. 점쟁이>
그는 당대의 길거리에서 만날 수 있는 인물을 화폭에 그대로 담았을 뿐 아니라 당시의 연극의 영향을 받은 일상적이고 통속적인 장면을 만들어냈다. 인물의 얼굴에는 눈동자의 표정이 살아있고, 분위기에는 유머가 넘친다. 그러면서도 북유럽 장르화처럼 소란스럽고 번잡하다거나 노골적으로 도덕적 메시지를 부각시키는 대신 차분하고 고요한 격조를 유지한다.
<카라바조의 자연주의적="" 성격="" 종교적="" 작품과="" 연관지어="" 설명하기=""> <성 마태의 소명, 1599~1600> 그의 자연주의적 묘사는 종교적인 주제의 그림에도 나타나 있다. 그는 종교적인 주제들을 마치 당시에 일어난 사건처럼 보여주었다. 성경의 테마를 당시 일상생활 묘사 속에서 나타냄으로써 신화적 성격을 완전히 벗어 던지고 전적으로 인간적인 의미를 강하게 부각시킨다. <성 마태의="" 소명="">은 그가 종교화가로서 명성을 확립하는 계기가 되었다. 세금 걷는 사람, 마태가 예수의 부름을 받는 순간을 묘사한 이 그림은 이후 그의 종교화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그의 양식의 두 요소, 즉 ‘사실적인 인물 묘사’와 ‘대담한 명암법’이 잘 드러나 있다. 사실적인 인물들의 일상 장면 같은 그림에 종교화로서의 신비감과 성스러움을 부여하는 것은 화면 오른쪽 위에서 들어오는 ‘빛’이다. 전체적으로 어두운 배경에 중간 단계 없이 강한 빛을 병치시키는 이러한 ‘조명법’은, 13세기 이래 이탈리아 회화가 화면에 입체감을 주기 위해 개발해온 명암법인 ‘키아로스쿠로’에 새로운 장을 여는 것이어서 이에는 ‘어두운 방식’이라는 뜻의 ‘테네브리즘’이라는 이름이 따로 붙었다. 연극의 인공조명처럼 다소 부자연스러워 보이는 키아로스쿠로라고 할 수 있는 테네브리즘은 당대부터 많은 사람들을 매료시켜 로마에 와 있던 화가들을 통해 전 유럽에 퍼졌고 특히 네덜란드, 프랑스, 스페인에서 수많은 모방자를 낳았다. <십자가에 못="" 박힌="" 성="" 베드로="">와 <성 바울의="" 회심="">은 이전의 종교화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간 양식을 보여주는 그의 최고 걸작들이다. 그 중 <성 바울의="" 회심="">은 성서의 이야기를 문자대로 화폭에 옮겨 그리지 않고, 성서에 나와있는 초월적인 경험을, 그것을 체험한 개인의 감정을 단순하고 적나라한 연극의 절정 장면처럼 제시하여 관람자가 이를 생생하게 목격하고 강렬하게 느낄 수 있게 하였다. 이것은 신도들의 눈과 감정에 호소하는 대중적인 예술로 신도들을 교육함으로써 프로테스탄트에 맞서 카톨릭 신앙을 지키려 했던 반종교개혁의 새로운 에너지를 보여주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그의 종교화는 주제와 양식의 조화를 문제 삼는 주문자에게 거부당할 정도로 ‘기존 질서와 맞지 않고 당대인들에게 이해 받지 못한, 시대를 앞서간 예술가’이미지를 갖게 되었다. 그의 그림이 가진 장점은 그 시대의 정서 특히 카톨릭의 주된 관심에 부합하는 측면도 있었다. 그는 종교를 미화하지 않으면서도 가톨릭이 요구했던 반종교개혁의 시대 정신을 담아낸 것이다. 그러나 그의 냉철한 관찰과 묘사에 바탕을 둔 대담하고 가식 없는 ‘자연주의’가 그의 주문자였던 고위성직자들의 취향을 충족시켜주지는 못했던 것 같다. 그들은 카라바조가 ‘위대성’과 ‘고귀함’을 결여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 사례로 교회로부터 주문을 받아 그렸던 <성 마태의="" 영감="">가 거부되어 제작자의 요구에 맞추어 다시 제작해야 했던 것을 들 수 있다. 신교- 루벤스, 램브란트 ( 신교 국가에는 피터 파울 루벤스가 있었다. 그는 고급 관리의 아들이었고, 어린 나이에 이미 최상의 교육을 받은 사람이었다. 그는 20대 초반에 로마, 제노바, 만토바 등에서 고전주의의 명작들을 연구했지만 기질적으로 플랑드르 사람이었다. 즉, 다채로운 사물의 표현에 대한 관심을 보였으며 화가의 임무는 자기 주위의 세계를 그리는 것이며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그림으로써 보는 사람들에게 사물의 다양한 아름다움을 생생하게 느끼도록 만드는 데 있다고 생각했다. 그의 작품의 특징인 밝고 풍만한 육체, 풍부한 색채와 장대한 구성의 조화, 생동감 있는 표정, 현실감과 고대의 정취는 그를 당대 최고의 작가로 부상시켜 놓은 근거이기도 했다. 그는 인물화 뿐 아니라 종교화, 신화화, 초상, 역사, 풍속, 풍경의 표현에 능하였으며, 프랑스 왕정과 결혼한 메디치 집안의 카테리나를 위해 제작한 연작은 그의 대표작으로 손꼽힌다. ) 네덜란드에서 태어난 램브란트 또한 신교 국가의 대표적인 화가이다. 초상화가로 명성을 얻은 그는 정물화를 제외한 모든 소재의 표현에 탁월하였으며, 특히 빛을 표현한 강한 명암 대비로 극적인 분위기를 고조시키는 독자적 구성과 독특한 명암, 깊은 정신미를 통해 독자적 예술 세계를 형성하였다. 물감을 두껍게 발라 그 자체로서 빛나는 화면을 만들어 내는 유화 기법의 새로운 면을 보였으며 에칭에도 뛰어난 재능을 발휘하였다. 램브란트의 경향은 카라바조의 영향을 반영하는 전기와 인간심리의 심층을 비추는 깊이 있는 초상을 추구한 후기로 나뉘어진다. 특히 자신의 모습을 관찰하여 내면에 잠재된 심리상태의 미묘한 변화과정을 추적한 많은 자화상을 남겼다.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야간순찰>은 램브란트의 예술적 성과를 바로크로 발전시키고 있음을 증명하는 것으로써 빛의 대조에 의한 원근의 표현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그러나 이 작품이 너무도 개성적이고 파격적인 것이었고, 주문자의 기대와도 많이 달랐기 때문에 이후 초상화 주문이 감소했을 뿐 아니라, 이 그림은 시청에 걸기 위해 일부가 잘려지는 불운을 당하기도 했다. 램브란트는 화가로서 뿐만 아니라 에칭에서도 명암대비의 극적 효과를 통해 자신의 예술성을 발휘하였으나, 50대로 접어들자마자 파산선고를 받아야 했던 그는 비극적인 말년을 보내었던 대표적인 작가이기도 하다. 그가 일생을 거쳐 그렸던 자화상은 아직도 많은 사람들에게 깊은 영감을 주는 작품이다. (마지막으로 베르메르 또한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17세기 후반에 활동했던 네덜란드 화가로서 주로 가정의 조용한 실내에 있는 인물을 그렸다. 당시 풍속을 파악할 수 있는 그의 작품은 일상적 행동의 주인공을 안정된 빛 속에서 마치 정물처럼 표현한 것으로써 그는 빛의 반사를 효과적으로 나타내기 위해 하얀점을 하이라이트로 찍는 독자적인 기법을 창안하였다. ) ## 2003 16세기 매너리즘 미술의 본질과 특성에 대해 간단히 설명하고, 그것을 출발점으로 하여 포스트 모더니즘에 관해 논하시오. (50점) 후기 르네상스, 마니에리즘기는 루터의 종교개혁, 교황 권위의 실추, 지동설 발견 등 불안정한 시대, 무질서와 혼란의 시기를 거쳐 카톨릭내부 반종교개혁이 일어난다. 종교성이 부활된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 근대적 정신성 차원에서 종교로부터 해방된 것으로 믿어지는데, 예컨대 틴토레토는 성경테마를 일상 속에 접목하여 인간적인 미를 부각한 것이다. 16세기 후반 반고전적인 매너리스트 예술의 두드러진 경향은 인공적인 것, 장식성, 양식화, 날카로운 선과 경직된 형식, 부자연스러움, 여백에 공포를 느끼듯 조밀하게 꽉 채워진 화면과 함께 인물표현도 인위적, 기교적 스타일로 인물의 몸체와 한껏 뒤틀려 있거나 육체가 늘어져 있게 묘사되며, 때로 신경질적인 경향 등을 들 수 있다. 파르미지아니노의 <긴 목의="" 마돈나="">, 엘 그레코의 <오르가스 백작의="" 매장="">, 틴토레토의 <성 마르코의="" 유해="" 발견="">, <최후의 만찬="">, 폰토로모의 <이집트의 요셉=""> 등이 이러한 특징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작품이다. 정신사로서의 미술사를 전개한 막스 드보르작에 따르면, 예술에 있어 정신주의적 경향을 강조하는데, 이에 따라 매너리즘의 경향이 재평가되었다. 즉, 마니에리즘의 모방, 변형, 왜곡이 정신성의 결여가 아닌 종교적 체험의 신화와 내면화이며, 따라서 최초의 근대적 예술양식이라는 것이다. 시대적 배경에 따라 다소 몽환적 분위기와 기괴한 배경, 과장된 인체와 비례의 왜곡 등의 표현이 생겨나며 이는 시대정신의 표출인 것이다. 즉, 고전적 예술의 압도적 권위로부터의 독립이며 일종의 아방가르드적 항의의 예술이라는 것이다. 초기 매너리스트들은 고전기 르네상스의 비례와 조화로부터 독립하여 특색적인 것을 필요로 했고, 주제, 비례, 구성, 원근법의 규칙으로부터 도발적인 표현을 시도한 것이다. 이러한 마니에리즘의 특성에 대해 프레드릭 제임스는 포스트모더니즘의 ‘혼성모방’과의 유사성을 지적했다. 즉, 포스트모던의 새로운 예술성의 창조정신도 마니에리즘의 시대정신의 표출, 세계관의 반영에서 그 연원을 찾아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상 살펴본 바와 같이 후기 르네상스 마니에리즘은 전기 르네상스의 쇠퇴나 종말이 아닌 시대정신의 표출, 새로운 세계관의 반영으로 새로운 예술의 개시로 볼 수 있다. 매너리스트들의 목표는 개인적인 예술가들의 표현이었고 그렇게 때문에 더욱 주관적인 예술이 된다. 고전 예술의 비례, 균형, 조화를 벗어나 심리적 요소, 정신적인 의미를 중요시하여 “예술을 위한 예술”을 보여준 것이라 할 수 있겠다. ## 2006 고전주의와 낭만주의의 반복 ## 2016 바로크, 로코코 이후 19세기 미술 양식 중 2개 들어서 특징 설명(30점) - 사실주의와 인상주의 ### 사실주의 19C 이전까지는 자연주의로서 사실주의가 정의되어왔다. 그것은 성실하고 정확한 ‘자연의 모방’에서 나아가 그것의 ‘완벽히 이상화된 재현’으로서의 사실주의였다. 19세기 이르러 사실주의는 새로운 의미를 부여 받는다. 사실주의는 낭만 정신에 전적인 반대 표명과 비판을 가하면서, ‘동시대’에 일어나고 있는 현실을 사회비판적인 관점으로 표현한다. 즉 ‘자신이 속한 시대의 풍속, 관념, 그리고 여러 실상을 본 대로 그린다.’는데 그 독특한 의의가 있다. 쿠르베의 교우였던 프르동은 19세기 중반의 새로운 예술은 과거 18세기 예술의 비합리성, 방탐함, 퇴폐성에 대립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진실된 사상, 악에 대립한 덕, 그리고 분별력으로 이끌어 감으로써 인간 존엄성을 고양시키며, 존재의 완전에 기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과거의 전통 예술은 우리에게 키메라와 같은 망상을 공급하고, 우리를 환상에 취해 있게 하며, 우리를 속여 헛된 이상을 지니게 하였지만, 새로운 예술은 해로운 환상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키고, 그러한 신기루를 고발하게 해준다. 즉 관념을 넘어 실존을 중심으로 하는 사회 비판을 주장하는 미술이어야만 한다고 주장하였다. 다시 말해 사실주의는 낭만주의가 주장했던 영웅이나 신이 주인공인 거창하고 먼 나라의 이야기 대신 ‘이곳’의 ‘현재’, 곧 당대의 일상을 미화나 왜곡 없이 해내고자 한 것이다. 대표적인 작가 쿠르베는 오직 자연의 제자이기를 원했다. 그는 아름다움이 아니라 진실을 원했다. 이점은 바로크의 화카 카라바조와 흡사하다. 그는 당시 주류 사조였던 신고전주의와 낭만주의의 인습에 대한 항거가 되길 원했고, ‘부르주아에게 충격을 주어’ 그들이 자만으로부터 벗어나길 바랐다. 상투적이고 능란한 조작에 대한 반기를 들어 타협하지 않는 예술적 순수함을 선언한 것이다. 쿠르베의 사실주의는 서양 미술사에 있어 예술가가 ‘무엇을, 왜 그려야 하는가?’라는 문제를 사회적 현실로부터 찾으려 했던 최초의 유파였다는 점에서 커다란 의의를 갖는다. 1855년 개최한 그의 개인전과 그 서문에 ‘자기가 속하는 시대의 풍속, 관념, 그리고 여러 실상을 자기가 본대로 그린다.’라고 말한 것에서 짐작하듯이 일반 시민 또는 하층 계급 사람들의 생활이나 노동을 현실로 보고, 추를 불문하고 그 모습을 표현하려 한 것이다. 이러한 동시대성에 대한 요구는 19세기 리얼리스트들의 핵심적인 사고 방식으로 ‘예술가는 그의 시대와 함께 있어야 한다.’ 라고 주장한다. 19세기 사실주의를 대표하는 작가로는 쿠르베와 도미에, 밀레로 집약할 수 있는데, 이들의 공통 관심사는 ‘현실을 보는 눈’이라 할 수 있다. 쿠르베가 자신의 고향 오르낭을 배경으로 그린 대작 <오르낭의 매장="">은 발표 당시부터 너무나 혁신적인 작품으로 많은 논란을 일으켰다. 그는 오르낭의 시골뜨기들을 315x663 cm의 큰 화면에 담았다. 또한 일부러 좌우로 죽 늘어놓아 영웅을 중시하는 낭만주의 미술와 다른 구성을 취했다. 그는 이 그림을 통해 ‘인민의 미술’, ‘평등주의’를 반영하고자 했으며, 보들레르가 말한 ‘근대의 영웅주의’를 표현한 것이다. 이 그림을 본 파리 부르주아 관객들은 이 그림이 부르주아의 ‘매장’을 암시한다고 여겼다. 이처럼 쿠르베는 파리 부르주아 예술 관객의 엘리트 의식에 정면으로 도전함으로써 기존의 예술에 저항하였다. 이러한 ‘저항의지’는 현대에 와 매우 중요한 예술의 속성이 되었다. 쿠르베 이후로 예술의 역사는 사회의 ‘전위’로써 나름으로의 특권적인 영역을 확보해 나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또한 쿠르베의 그림을 살펴보면 물감 자국이 상당히 두텁고 밀도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붓보다는 나이프를 많이 사용하여 물감을 쓴 그의 그림은 회화라는 장르 본연의 ‘물질성’을 크게 강화시킨다. 이러한 점은 쿠르베의 그림이 다른 사실주의 화가의 설명적 작품과의 차이점이기도 하다. ### 인상주의 인상주의는 19세기 후반-20세기 초반에 등장한 프랑스 중심의 근대예술운동으로 르네상스 이후 총체적 미술혁신이다. 전통적 회화기법인 원근법, 명암대조법, 균형구도, 이상적 인물 표현을 거부하고 오로지 빛과 색채를 포착하여 찰나의 시각적 감각을 표현해냈다. 인상주의의 등장 배경과 작가 및 작품들을 살펴보고 후대 미술에 미친 영향에 대해 고찰해보고자 한다. 인상주의가 등장하게 된 배경에는 19세기 증기선, 철도, 전화기, 전기와 같은 과학의 발달의 영향이 컸다. 또한 튜브유화물감의 발명, 사진기의 발명과 일본 우키요에 판화의 영향으로 번영의 시기를 맞았으며, 화가들은 자기 인상에 따라 자기가 본 대로 그리는 형태와 색채를 추구했으며 튜브형 물감과 접히는 이젤로 야외작업이 가능했고, 카메라로 풍경을 찍어와 실내에서 완성하게 된 것이다. 근대 미술의 아버지라 일컬어지는 마네는 조형과 색면 혁명을 일으켰고 주제면에서 전통의 이상적 신화의 허상을 벗겨내고 근대적 방식으로 솔직하게 그려냈다. 때문에 마네를 모더니즘의 시작으로 보기도 한다. 전통적 명암법, 원근법을 부정하고 색채로 평면성을 강조했으며, 빛과 어둠의 강한 대조, 시간의 효과를 위한 화면구성을 시도했다. <올랭피아>에서 보여지는 마네의 근대성은 당대 칭찬과 비난을 동시에 받기도 했다. <폴리-베르제르의 술집="">에서 색채로서 화가의 감관에 지각된 인상을 표현했으며 <피리부는 소년="">에서와 같이 원근감, 깊이감을 배제한 채 입체감을 최소화하고 화면을 평면화했다. 색채의 대조로 회화의 평면성을 추구하여 회화만의 조형적 요소를 강조했던 마네의 시도는 모더니즘적 흐름에 부합한 것이었다. 때문에 바타이유는 마네가 “신기원을 연 화가”라고 했으며, 그린버그는 마네를 “평면회화의 선구자”라 칭했으며, 푸코는 “마네가 없었다면 19세기 인상주의와 20세기 평면회화, 추상화가 없었을 것”이라며, 현대성을 연 위대한 화가라고 칭했다. 모네는 <인상:해돋이>에서처럼 “빛은 곧 색채다”라는 인상주의 사조에 충실한 화가였다. <루앙 대성당="">시리즈에서는 빛과 날씨에 따른 형태와 색채의 변화를 장시간에 걸쳐 담아냈으며, <정원에 있는="" 여인들="">에서는 자연을 재현하는 새로운 방법의 시금석이 되었다. <수련>시리즈에서는 윤곽선을 그리지 않고 형태와 선이 붓자국에 뒤섞여 색채 그 자체를 효과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르누아르는 <목욕하는 여인들="">, <물랭드라 갈레트의="" 춤="">과 같이 삶의 기쁨을 주로 그렸으며, 드가는 경마장, 서커스, 카페 풍경, 여인의 일하는 모습 등 무계획적 광경을 순간적으로 포착하는 데에 뛰어났다. 신인상주의로 분류되기도 하는 쇠라와 시냑은 점묘주의를 창안했는데, 작은 색점을 찍어가며 완성하는 기법으로, 광학이론과 색채학에 따른 과학적 이론에 기초한 색채분할을 구현해냈다. 쇠라의 <그랑자트 섬의="" 일요일="" 오후="">, 시냑의 <트로페즈 항구="">에서 점묘법이 잘 드러나 있다. 이상 살펴본 바와 같이 인상주의는 기술의 발명을 최대한 회화에 활용했으며, 제도권 미술에 반대하고 화가 개인의 스타일을 실험했던 미술사조였다. 물체의 고유색을 부정하고 빛에 반사된 물체의 색을 추구하는 등 과학적 시도를 했다는 점에서 현대 미술의 견인차 역할을 한 것이다. 인상주의 이후 회화는 다른 세상이 되었는데, 화가 자신의 화법을 확장시키고, 서로 반작용하면서 회화사가 더욱 발전하게 된 것이다. <마네와 세잔의="" 근대성=""> 19세기 후반에 나타난 마네와 세잔의 근대성은 무조건 대상을 그럴듯하게 그려야 한다는 전통회화의 편견에서 벗어나 ‘예술이 무엇이고, 예술이 우리 삶에 어떤 의미가 있는가를 생각해 보게 한다. 사회의 근대적 흐름 속에서 이 시기의 화가들은 시시각각 변하는 세상의 모습을 담으려 했고, 대상에 내재된 구조적 원리를 집요하게 추구하기도 했으며, 겉으로 보이는 그림 이상의 이면적 진실을 담아내면서 작품 속에서 시대적 근대성을 표출했다. <후기 인상주의="" 화가들=""> 인상주의 단계를 거치면서 인상주의의 한계를 뛰어넘은 일련의 화가들을 후기인상주의라 일컫는데, 개인적, 주관적 경험에 근거한 미술을 추구했다. 폴 세잔, 폴 고갱, 빈센트 반 고흐가 이들이다. 세 화가와 그들의 작품을 통해 이들이 후대 미술에 끼친 영향에 대해 고찰해보고자 한다. 현대 회화의 아버지라 일컬어지는 세잔은 ‘형태’에 있어서의 새로운 개척자였다. 그는 자연의 본질을 기하학적 구조로 탐구했는데, 자연을 “원통, 원추, 구체형으로 해석하라”는 격언을 남겼다. 외형을 단순화하여 본질에 가까운 추상적 형태로 표현했으며, 색채의 변조, 시점의 분할, 고전적 원근법의 부정으로 회화의 신과 같은 존재였다. <생 빅투아르="" 산="">에서는 30번 넘게 이 산을 그려냈는데, 삼각선의 외양을 색면으로 표현해냈으며, 청색 같은 한색은 뒤로, 붉은색 같은 난색은 전방으로 배치하고, 굴절된 모자이크 색면을 통해 시각적 사실성을 전달하고 있다. <사과와 오렌지가="" 있는="" 정물="">에서처럼 정물화에서도 사물의 형태를 체계적으로 다루고자 했으며, <대수욕도>에서처럼 인체표현에 있어서도 딱딱하면서도 기하학적 형태로 표현해내 입체파의 선조가 되었다. 이처럼 실제와 추상이 독특한 방식으로 혼합된 기법을 보여준 세잔은 후대 화가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는데, 고갱은 최초 세잔 작품의 수집가였고, 고흐는 세잔의 터치를 그의 풍경화에 인용했으며, 상징파 화가들, 특히 모리스 드니는 <세잔에게 경의를="">이란 작품을 남기기도 했다. 마티스는 세잔을 회화의 신이라 했으며 형태와 색채가 똑같이 중요하다는 세잔의 철학을 수용했다. 피카소와 브라크는 세잔을 가장 철저히 탐구했는데, 형태를 분석적으로 접근하면서 전체 화면을 역동적으로 구성해냈다. 마티스의 <파란 누드="">, 피카소의 <아비뇽의 아가씨들="">도 세잔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세잔은 현대미술운동의 혁신자였고, 피카소의 입체주의를 낳았으며, 나아가 추상미술의 발전에 지대한 기여를 했다. 폴 고갱은 35세의 늦은 나이에 화가가 되어 보헤미안의 삶을 살았던 인물이었다. 원근법과 명암법을 거부한 선구적 색채사용법을 추구했으며 단순한 윤곽속에 평평하게 칠하면서 상상력, 관념, 주관적 분위기를 담아냈다. <황색 예수="">에서는 예수의 얼굴을 노란색으로, 나무는 주황색으로 표현했으며 <이아 오라나 마리아(나는 마리아를 경배한다)>에서는 전통적 성모상을 획기적으로 해석해냈다. 전통적 도상을 보존하면서도 단순한 인물형과 강한 윤곽선, 상징적 요소는 원시미술과 일본미술의 영향을 받은 것이기도 한데, 풍부한 색채를 통해 비유럽적 생기발랄함으로 고갱의 이상을 구현해냈다. 화가 내부의 진실을 과감히 표현해낸 그의 기법은 뭉크 같은 표현주의자, 보나르, 뷔야르, 모리스드니 같은 나비파, 르동 같은 상징주의자, 마티스와 같은 야수주의자, 피카소 같은 입체주의자와 추상주의 화가들에게도 큰 영향을 주었다 고갱처럼 뒤늦게 그림을 시작한 빈센트 반 고흐는 네덜란드 출신의 불운한 천재화가로 800점이 넘는 작품을 남겼다. 짧게 끊어지는 화필과 밝은 보색의 색상체계는 인상주의의 영향을 받은 것이나, 고흐는 매우 독창적인 미술세계를 구축했다. <별이 빛나는="" 밤="">에서는 고요한 격정을 곡선과 화필과 굽이치는 운동감, 달과 별의 폭발적 에너지, 역동적인 힘이 보여지는데 한편으론 세심하게 균형 잡힌 작품이다. 또한 40여점의 자화상을 남겼는데, 자화상을 통해 인생의 정수를 포착하고자 했으며 내면세계를 반영해냈다. <밀짚모자를 쓴 자화상(1887)>에서는 인상주의의 영향이 엿보이며 <귀에 붕대를 맨 자화상(1889)>에서는 고통스런 감정을 눈에 집중시키고 있다. <까마귀가 나는="" 보리밭="">은 자살 직전의 작품으로 어둡고 낮은 하늘과 불길한 까마귀떼들로 절망감을 표현해냈다. 고흐는 개인의 감정과 내면세계의 표현에 충실했던 표현주의의 선구자였다. 이상 살펴본 바와 같이 후기 인상주의 화가들은 인상주의에서 한 단계 더 진보한 예술 경지를 이뤄냈는데, 폴 세잔은 자연의 본질을 탐구하여 색면으로 표현해내 야수주의, 입체주의와 추상미술에 큰 영향을 주었으며, 폴 고갱은 선구적 색채사용법으로 야수주의 마티스를 비롯하여 나비파, 상징파, 입체파, 추상주의 화가들에게, 고흐는 표현주의 화가들에게 매우 큰 영향을 주었다. ## 2005 낭만주의와 신고전주의 18세기에 주요한 유럽 국가들은 이성을 인식의 유일한 수단으로 삼은 계몽주의의 지배를 받았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분위기는 ‘양식’에 대한 미술가들의 태도로도 나타났다. 이들은 올바른 양식을 ‘고딕 복고’와 견줄 만한 ‘그리스 복고’에서 찾았다. 엄격하고 단순한 규칙들을 적용하는 이러한 양식은 그 힘과 영향력이 계몽주의 사상을 바탕으로 영향력이 커진 이성주의자들에게 강한 공감을 불러일으키며 이른바 ‘신고전주의’가 큰 영향력을 가지게 된 것이다. 장식적인 로코코와 후기 바로크에 대한 반발심과 고전 및 고대에 대한 새로운 관심과 함께 18세기 말부터 19세기 초에 걸쳐 프랑스를 중심으로 유럽 전역에 나타났다. 고대적인 모티브를 많이 사용하고 고고학적 정확성을 중시하며 합리주의적 미학에 바탕을 둔다. 신고전주의 예술은 이렇듯 질서와 엄숙함을 바탕으로 형식의 정연한 통일과 조화, 표현의 명확성, 형식의 정연한 통일과 조화, 표현의 명확성, 형식과 내용의 균형을 중요하게 여기며, **특히 미술에서는 엄격하고 균형 잡힌 구도와 명확한 윤곽, 입체적인 형태의 완성 등이 우선시 된다.** 주제는 그리스 로마 역사와 신화이며 색채가 아닌 소묘와 선을 중시하여 붓 자국이 전혀 없도록 하였다. 미술의 역할은 도덕성을 고양하고 영감을 주는 것으로 삼았다. 프랑스와 영국 왕립 아카데미의 지도자들은 감성보다는 이성을 중시하는 교훈적인 신고전주의 운동을 강력히 지지했다. 이들은 감성에 호소하는 색채보다 이성에 호소하는 소묘와 선이 보다 우월하다고 믿었다. 대표적인 작가로는 자크-루이 다비드를 들 수 있다. 그는 로코코 화가 와토의 작품에 대해 인공적인 미술이라고 경멸을 표했으며 로마를 여행하면서 고전 미술에 대해 경도하였다. 그의 대표작 <호라티우스 형제의="" 맹세="">는 방탕함 대신 자기 희생을 강조하는 새로운 프랑스 사회의 분위기인 금욕주의를 잘 반영하고 있는 작품이다. 그림의 구성은 견고함을 강조하고 있다. 다비드는 각 인물들을 조각상 같이 배열하여 로마식 아치가 있는 평면적 배경 위에 돌출되어 보이도록 묘사하고 있다. 작품의 내용은 로마 시대의 역사를 다루었으며 엄격하고 균형 잡힌 구도와 명확한 윤곽을 중시하는 신고전주의의 모범과 같은 그림이라고 할 수 있다. 18세기 중엽이 되면서 절대왕정의 이완 및 부르주아지의 발흥과 함께 인간을 있는 그대로 보려는 욕구가 분출하기 시작했다. 계몽주의 그 자체에서도 이성에 의한 비합리적인 면이 드러나자 지금까지 경시되었던 감각 현상들에게서 인간성의 진실을 찾음과 동시에 고전주의가 모범으로 삼은 그리스 로마의 고전고대로부터 자국의 과거로 눈을 돌리고, 거기에서 새로운 문화의 원천을 찾으려는 기운이 일어났다. 계몽주의의 최고의 성과가 이성에 의한 비합리적인 정치체제의 타파였는데, 혁명을 통하여 드러난 인간의 취약한 면을 보고는 절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은 주변이 어지럽게 변하는 데 당혹하였으며, 모든 원리가 붕괴되는 것을 보고 일체에 대한 불신감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한 정신의 폐혀 위에 자신의 심성에 맞는 문화를 이룩하려고 한 것이 바로 낭만주의이다. 자아에 대한 확인과 그 내부로의 침잠이 시작된 것이다. 미술사로서의 낭만주의는 감성적 분위기의 작품들을 발전시켜 나간 형태라 할 수 있다. 현실적인 사건을 주제로 다루기도 하고 이성의 규칙과 속박에서 벗어나 느낌에 따른 재현을 하였기 때문에 낭만주의로 불린다. 낭만주의는 전시대의 미술들이 버리지 못했던 현상이나 사물의 재현이라는 모방론적 입각을, 예술가의 감정이나 정서의 표현이라는 표현론으로 바뀐데 그 의미가 크다. 낭만주의 미술은 합리주의에 반대하여 객관보다는 주관을, 지성보다는 감정을 중요시하고, 또 개성을 존중하여 자아의 해석을 주장하고, 격정적이고 정서적으로 자유를 구하여 상상한 대로 무한한 것에 동경한다는 전반적 특징을 지니고 있다. 낭만주의 예술가들은 아카데미즘, 특히 나폴레옹 제정을 정점으로 프랑스대혁명 전후에 걸친 신고전주의의 딱딱하고 까다로운 규범에 거세게 반발하였다. 그리하여 그리스나 로마적인 고전을 버리고 중세와 민족적 과거, 특히 고딕 양식을 지향하게 되고, 오리엔탈리즘을 단순한 이국취미 이상으로 승화시켰으며, 상상력과 숭고한 비장감, 조국애, 인간과 자연과의 융합감 등의 감정 표현, 즉 들라크루아가 말한 ‘순수한 환상’을 자유분방하게 발휘하고 표출시켜 나갔다. 이렇게 해서 그들, 특히 프랑스의 낭만파들은 이념보다는 현실에 밀착해서 시사적인 문제나 역사적인 사건, 또는 셰익스피어나 바이런 등의 문학에서 얻은 제재에 정열을 기울여 서사적, 서정적인 파토스적 세계를 즐겨 그려내게 되었다. 이와 같이 하나의 시대정신이며, 그 운동인 낭만주의는 미술상에서는 고전주의에 대립하는 것이지만, 명백히 독자적인 양식을 만들어낸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미술사에서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낭만주의 회화에서도 본질적인 것은 그려지는 것, 곧 주제보다는 그리는 방법, 즉 주체적 방법 또는 주관적 표현에 잇다. 부드럽고 생생한 표현양식은 고전주의와는 전혀 대조적으로 유동적이고 약동적이며, 극적인 움직임과 안에서 우러나오는 힘의 인상을 만들어 낸다. “형식보다는 표현”이 선행되고, 딱딱한 선이나 단정한 형태보다는 있는 그대로의 생생한 것으로서의 산뜻하고 강렬한 색채를 우선시킨다. 심지어는 아름다운 것만이 아니라 추한 것까지도 그려내기도 한 이들은 후에 미술사에도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낭만주의의 대표적 화가 중 한명인 들라크루아의 그림을 보면 이들과 신고전주의와의 차이를 뚜렷이 알 수 있다. 들라크루아는 1824년, 살롱에 출품한 <키오스섬의 학살="">로 명성을 얻게 된다. 이때 고전주의의 완성자 앵그르의 <루이 13세의 성모에의 맹세>와 함께 출품되었다. 들라크루아의 작품을 보고 보수주의자들은 회화의 학살이라고 비난했으나, 다른 많은 사람들은 이것을 열광적으로 환영함으로써 명성을 얻게 되었다. 1831년 살롱에 출품된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으로 들라크루아는 혁명의 영광을 선양했고, 위고나 보들레르와의 친교를 통해서 낭만주의 문화혁명 속에서 낭만주의 문화혁명 속에서 문학이나 연극과 긴밀히 교류하였다. 들라크루아의 회화는 붓 터치는 물론이고 물감의 농담도 즐겨 사용하였으며 뚜렷한 윤곽선보다는 보색을 이용한 선명한 색의 대비를 드러냈다. 또한 불안정한 대각선 구도를 사용했으며 정해진 원근법 구도를 따르지 않았다. 또한 상상력을 중요시하여 그림의 주제를 재구성하여 그렸다. 이는 신고전주의의 선과 형태묘사에 치중한 설명적 측면의 그림, 사진과 같이 매끄럽고 뚜렷한 윤곽선을 가진 그림과는 정반대에 가깝다고도 할 수 있는 것이다. 19세기 프랑스에서는 계몽주의와 낭만주의 두 철학이 서로 대립하고 있었다. 프랑스 혁명 이후 새로운 변화를 원하는 시대적 바람 속에 두 철학이 혼재되어 나타난 것이다. 인간의 이성을 중시한 계몽주의 철학과 인간의 감성을 중시한 낭만주의 철학의 병존이 이렇듯 동시대에 성격이 전혀 다른 두 개의 회화를 만들어냈다는 점은 서로 다른 철학이 회화에 영향을 미쳤을 때 나타나는 결과를 여실히 드러내준다. ## 2000 인상주의 회화(繪畫)의 태동과 전개과정에 대하여 설명하고 그것이 현대 서양추상회화에 끼친 영향에 대하여 논의하시오. 인상주의는 19세기 후반-20세기 초반에 등장한 프랑스 중심의 근대예술운동으로 르네상스 이후 총체적 미술혁신이다. 전통적 회화기법인 원근법, 명암대조법, 균형구도, 이상적 인물 표현을 거부하고 오로지 빛과 색채를 포착하여 찰나의 시각적 감각을 표현해냈다. 인상주의의 등장 배경과 작가 및 작품들을 살펴보고 후대 미술에 미친 영향에 대해 고찰해보고자 한다. 인상주의가 등장하게 된 배경에는 19세기 증기선, 철도, 전화기, 전기와 같은 과학의 발달의 영향이 컸다. 또한 튜브유화물감의 발명, 사진기의 발명과 일본 우키요에 판화의 영향으로 번영의 시기를 맞았으며, 화가들은 자기 인상에 따라 자기가 본 대로 그리는 형태와 색채를 추구했으며 튜브형 물감과 접히는 이젤로 야외작업이 가능했고, 카메라로 풍경을 찍어와 실내에서 완성하게 된 것이다. 근대 미술의 아버지라 일컬어지는 마네는 조형과 색면 혁명을 일으켰고 주제면에서 전통의 이상적 신화의 허상을 벗겨내고 근대적 방식으로 솔직하게 그려냈다. 때문에 마네를 모더니즘의 시작으로 보기도 한다. 전통적 명암법, 원근법을 부정하고 색채로 평면성을 강조했으며, 빛과 어둠의 강한 대조, 시간의 효과를 위한 화면구성을 시도했다. <올랭피아>에서 보여지는 마네의 근대성은 당대 칭찬과 비난을 동시에 받기도 했다. <폴리-베르제르의 술집="">에서 색채로서 화가의 감관에 지각된 인상을 표현했으며 <피리부는 소년="">에서와 같이 원근감, 깊이감을 배제한 채 입체감을 최소화하고 화면을 평면화했다. 색채의 대조로 회화의 평면성을 추구하여 회화만의 조형적 요소를 강조했던 마네의 시도는 모더니즘적 흐름에 부합한 것이었다. 때문에 바타이유는 마네가 “신기원을 연 화가”라고 했으며, 그린버그는 마네를 “평면회화의 선구자”라 칭했으며, 푸코는 “마네가 없었다면 19세기 인상주의와 20세기 평면회화, 추상화가 없었을 것”이라며, 현대성을 연 위대한 화가라고 칭했다. 모네는 <인상:해돋이>에서처럼 “빛은 곧 색채다”라는 인상주의 사조에 충실한 화가였다. <루앙 대성당="">시리즈에서는 빛과 날씨에 따른 형태와 색채의 변화를 장시간에 걸쳐 담아냈으며, <정원에 있는="" 여인들="">에서는 자연을 재현하는 새로운 방법의 시금석이 되었다. <수련>시리즈에서는 윤곽선을 그리지 않고 형태와 선이 붓자국에 뒤섞여 색채 그 자체를 효과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르누아르는 <목욕하는 여인들="">, <물랭드라 갈레트의="" 춤="">과 같이 삶의 기쁨을 주로 그렸으며, 드가는 경마장, 서커스, 카페 풍경, 여인의 일하는 모습 등 무계획적 광경을 순간적으로 포착하는 데에 뛰어났다. 신인상주의로 분류되기도 하는 쇠라와 시냑은 점묘주의를 창안했는데, 작은 색점을 찍어가며 완성하는 기법으로, 광학이론과 색채학에 따른 과학적 이론에 기초한 색채분할을 구현해냈다. 쇠라의 <그랑자트 섬의="" 일요일="" 오후="">, 시냑의 <트로페즈 항구="">에서 점묘법이 잘 드러나 있다. 이상 살펴본 바와 같이 인상주의는 기술의 발명을 최대한 회화에 활용했으며, 제도권 미술에 반대하고 화가 개인의 스타일을 실험했던 미술사조였다. 물체의 고유색을 부정하고 빛에 반사된 물체의 색을 추구하는 등 과학적 시도를 했다는 점에서 현대 미술의 견인차 역할을 한 것이다. 인상주의 이후 회화는 다른 세상이 되었는데, 화가 자신의 화법을 확장시키고, 서로 반작용하면서 회화사가 더욱 발전하게 된 것이다. <마네와 세잔의="" 근대성=""> 19세기 후반에 나타난 마네와 세잔의 근대성은 무조건 대상을 그럴듯하게 그려야 한다는 전통회화의 편견에서 벗어나 ‘예술이 무엇이고, 예술이 우리 삶에 어떤 의미가 있는가를 생각해 보게 한다. 사회의 근대적 흐름 속에서 이 시기의 화가들은 시시각각 변하는 세상의 모습을 담으려 했고, 대상에 내재된 구조적 원리를 집요하게 추구하기도 했으며, 겉으로 보이는 그림 이상의 이면적 진실을 담아내면서 작품 속에서 시대적 근대성을 표출했다. <후기 인상주의="" 화가들=""> 인상주의 단계를 거치면서 인상주의의 한계를 뛰어넘은 일련의 화가들을 후기인상주의라 일컫는데, 개인적, 주관적 경험에 근거한 미술을 추구했다. 폴 세잔, 폴 고갱, 빈센트 반 고흐가 이들이다. 세 화가와 그들의 작품을 통해 이들이 후대 미술에 끼친 영향에 대해 고찰해보고자 한다. 현대 회화의 아버지라 일컬어지는 세잔은 ‘형태’에 있어서의 새로운 개척자였다. 그는 자연의 본질을 기하학적 구조로 탐구했는데, 자연을 “원통, 원추, 구체형으로 해석하라”는 격언을 남겼다. 외형을 단순화하여 본질에 가까운 추상적 형태로 표현했으며, 색채의 변조, 시점의 분할, 고전적 원근법의 부정으로 회화의 신과 같은 존재였다. <생 빅투아르="" 산="">에서는 30번 넘게 이 산을 그려냈는데, 삼각선의 외양을 색면으로 표현해냈으며, 청색 같은 한색은 뒤로, 붉은색 같은 난색은 전방으로 배치하고, 굴절된 모자이크 색면을 통해 시각적 사실성을 전달하고 있다. <사과와 오렌지가="" 있는="" 정물="">에서처럼 정물화에서도 사물의 형태를 체계적으로 다루고자 했으며, <대수욕도>에서처럼 인체표현에 있어서도 딱딱하면서도 기하학적 형태로 표현해내 입체파의 선조가 되었다. 이처럼 실제와 추상이 독특한 방식으로 혼합된 기법을 보여준 세잔은 후대 화가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는데, 고갱은 최초 세잔 작품의 수집가였고, 고흐는 세잔의 터치를 그의 풍경화에 인용했으며, 상징파 화가들, 특히 모리스 드니는 <세잔에게 경의를="">이란 작품을 남기기도 했다. 마티스는 세잔을 회화의 신이라 했으며 형태와 색채가 똑같이 중요하다는 세잔의 철학을 수용했다. 피카소와 브라크는 세잔을 가장 철저히 탐구했는데, 형태를 분석적으로 접근하면서 전체 화면을 역동적으로 구성해냈다. 마티스의 <파란 누드="">, 피카소의 <아비뇽의 아가씨들="">도 세잔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세잔은 현대미술운동의 혁신자였고, 피카소의 입체주의를 낳았으며, 나아가 추상미술의 발전에 지대한 기여를 했다. 폴 고갱은 35세의 늦은 나이에 화가가 되어 보헤미안의 삶을 살았던 인물이었다. 원근법과 명암법을 거부한 선구적 색채사용법을 추구했으며 단순한 윤곽속에 평평하게 칠하면서 상상력, 관념, 주관적 분위기를 담아냈다. <황색 예수="">에서는 예수의 얼굴을 노란색으로, 나무는 주황색으로 표현했으며 <이아 오라나 마리아(나는 마리아를 경배한다)>에서는 전통적 성모상을 획기적으로 해석해냈다. 전통적 도상을 보존하면서도 단순한 인물형과 강한 윤곽선, 상징적 요소는 원시미술과 일본미술의 영향을 받은 것이기도 한데, 풍부한 색채를 통해 비유럽적 생기발랄함으로 고갱의 이상을 구현해냈다. 화가 내부의 진실을 과감히 표현해낸 그의 기법은 뭉크 같은 표현주의자, 보나르, 뷔야르, 모리스드니 같은 나비파, 르동 같은 상징주의자, 마티스와 같은 야수주의자, 피카소 같은 입체주의자와 추상주의 화가들에게도 큰 영향을 주었다 고갱처럼 뒤늦게 그림을 시작한 빈센트 반 고흐는 네덜란드 출신의 불운한 천재화가로 800점이 넘는 작품을 남겼다. 짧게 끊어지는 화필과 밝은 보색의 색상체계는 인상주의의 영향을 받은 것이나, 고흐는 매우 독창적인 미술세계를 구축했다. <별이 빛나는="" 밤="">에서는 고요한 격정을 곡선과 화필과 굽이치는 운동감, 달과 별의 폭발적 에너지, 역동적인 힘이 보여지는데 한편으론 세심하게 균형 잡힌 작품이다. 또한 40여점의 자화상을 남겼는데, 자화상을 통해 인생의 정수를 포착하고자 했으며 내면세계를 반영해냈다. <밀짚모자를 쓴 자화상(1887)>에서는 인상주의의 영향이 엿보이며 <귀에 붕대를 맨 자화상(1889)>에서는 고통스런 감정을 눈에 집중시키고 있다. <까마귀가 나는="" 보리밭="">은 자살 직전의 작품으로 어둡고 낮은 하늘과 불길한 까마귀떼들로 절망감을 표현해냈다. 고흐는 개인의 감정과 내면세계의 표현에 충실했던 표현주의의 선구자였다. 이상 살펴본 바와 같이 후기 인상주의 화가들은 인상주의에서 한 단계 더 진보한 예술 경지를 이뤄냈는데, 폴 세잔은 자연의 본질을 탐구하여 색면으로 표현해내 야수주의, 입체주의와 추상미술에 큰 영향을 주었으며, 폴 고갱은 선구적 색채사용법으로 야수주의 마티스를 비롯하여 나비파, 상징파, 입체파, 추상주의 화가들에게, 고흐는 표현주의 화가들에게 매우 큰 영향을 주었다. ## 2007 후기인상주의가 20세기미술에 끼친 영향(25점)을 논하시오. 인상주의 단계를 거치면서 인상주의의 한계를 뛰어넘은 일련의 화가들을 후기인상주의라 일컫는데, 개인적, 주관적 경험에 근거한 미술을 추구했다. 폴 세잔, 폴 고갱, 빈센트 반 고흐가 이들이다. 세 화가와 그들의 작품을 통해 이들이 후대 미술에 끼친 영향에 대해 고찰해보고자 한다. 현대 회화의 아버지라 일컬어지는 세잔은 ‘형태’에 있어서의 새로운 개척자였다. 그는 자연의 본질을 기하학적 구조로 탐구했는데, 자연을 “원통, 원추, 구체형으로 해석하라”는 격언을 남겼다. 외형을 단순화하여 본질에 가까운 추상적 형태로 표현했으며, 색채의 변조, 시점의 분할, 고전적 원근법의 부정으로 회화의 신과 같은 존재였다. <생 빅투아르="" 산="">에서는 30번 넘게 이 산을 그려냈는데, 삼각선의 외양을 색면으로 표현해냈으며, 청색 같은 한색은 뒤로, 붉은색 같은 난색은 전방으로 배치하고, 굴절된 모자이크 색면을 통해 시각적 사실성을 전달하고 있다. <사과와 오렌지가="" 있는="" 정물="">에서처럼 정물화에서도 사물의 형태를 체계적으로 다루고자 했으며, <대수욕도>에서처럼 인체표현에 있어서도 딱딱하면서도 기하학적 형태로 표현해내 입체파의 선조가 되었다. 이처럼 실제와 추상이 독특한 방식으로 혼합된 기법을 보여준 세잔은 후대 화가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는데, 고갱은 최초 세잔 작품의 수집가였고, 고흐는 세잔의 터치를 그의 풍경화에 인용했으며, 상징파 화가들, 특히 모리스 드니는 <세잔에게 경의를="">이란 작품을 남기기도 했다. 마티스는 세잔을 회화의 신이라 했으며 형태와 색채가 똑같이 중요하다는 세잔의 철학을 수용했다. 피카소와 브라크는 세잔을 가장 철저히 탐구했는데, 형태를 분석적으로 접근하면서 전체 화면을 역동적으로 구성해냈다. 마티스의 <파란 누드="">, 피카소의 <아비뇽의 아가씨들="">도 세잔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세잔은 현대미술운동의 혁신자였고, 피카소의 입체주의를 낳았으며, 나아가 추상미술의 발전에 지대한 기여를 했다. 폴 고갱은 35세의 늦은 나이에 화가가 되어 보헤미안의 삶을 살았던 인물이었다. 원근법과 명암법을 거부한 선구적 색채사용법을 추구했으며 단순한 윤곽속에 평평하게 칠하면서 상상력, 관념, 주관적 분위기를 담아냈다. <황색 예수="">에서는 예수의 얼굴을 노란색으로, 나무는 주황색으로 표현했으며 <이아 오라나 마리아(나는 마리아를 경배한다)>에서는 전통적 성모상을 획기적으로 해석해냈다. 전통적 도상을 보존하면서도 단순한 인물형과 강한 윤곽선, 상징적 요소는 원시미술과 일본미술의 영향을 받은 것이기도 한데, 풍부한 색채를 통해 비유럽적 생기발랄함으로 고갱의 이상을 구현해냈다. 화가 내부의 진실을 과감히 표현해낸 그의 기법은 뭉크 같은 표현주의자, 보나르, 뷔야르, 모리스드니 같은 나비파, 르동 같은 상징주의자, 마티스와 같은 야수주의자, 피카소 같은 입체주의자와 추상주의 화가들에게도 큰 영향을 주었다 고갱처럼 뒤늦게 그림을 시작한 빈센트 반 고흐는 네덜란드 출신의 불운한 천재화가로 800점이 넘는 작품을 남겼다. 짧게 끊어지는 화필과 밝은 보색의 색상체계는 인상주의의 영향을 받은 것이나, 고흐는 매우 독창적인 미술세계를 구축했다. <별이 빛나는="" 밤="">에서는 고요한 격정을 곡선과 화필과 굽이치는 운동감, 달과 별의 폭발적 에너지, 역동적인 힘이 보여지는데 한편으론 세심하게 균형 잡힌 작품이다. 또한 40여점의 자화상을 남겼는데, 자화상을 통해 인생의 정수를 포착하고자 했으며 내면세계를 반영해냈다. <밀짚모자를 쓴 자화상(1887)>에서는 인상주의의 영향이 엿보이며 <귀에 붕대를 맨 자화상(1889)>에서는 고통스런 감정을 눈에 집중시키고 있다. <까마귀가 나는="" 보리밭="">은 자살 직전의 작품으로 어둡고 낮은 하늘과 불길한 까마귀떼들로 절망감을 표현해냈다. 고흐는 개인의 감정과 내면세계의 표현에 충실했던 표현주의의 선구자였다. 이상 살펴본 바와 같이 후기 인상주의 화가들은 인상주의에서 한 단계 더 진보한 예술 경지를 이뤄냈는데, 폴 세잔은 자연의 본질을 탐구하여 색면으로 표현해내 야수주의, 입체주의와 추상미술에 큰 영향을 주었으며, 폴 고갱은 선구적 색채사용법으로 야수주의 마티스를 비롯하여 나비파, 상징파, 입체파, 추상주의 화가들에게, 고흐는 표현주의 화가들에게 매우 큰 영향을 주었다. ## 2008년 큐비즘 미술에 관해 논하시오. 큐비즘은 세잔의 조형 이념에 따라 자연을 순수하게 조형적인 것으로 포착하고, 각각의 면으로 분해한 후 화면 위에 다시 재구성하는 순서를 밟아 화면을 완성해 가는 것으로, 먼저 ‘분석적 큐비즘’으로 나타난다. 이것은 르네상스 이래 서양화의 전통인 원근법과 명암법, 다채로운 색채를 사용한 인상파와 순간적인 현실 묘사와 야수주의의 주정적 표현을 부정하면서 대상을 철저하게 해체, 분석하여 화면을 재구성한 것이다. 즉 시점을 복수화하고 자연의 여러 형태를 기본적인 기하학적 형상으로 환원해 사물의 존재성을 2차원으로 구축하고 재구성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 결과 화면은 원근법이 사라지고 ‘평면성’이 두드러지며, 형태의 분석에 따른 해체 현상으로 색채는 주로 대비의 기능을 맡게 된다. 그러므로 시점의 복수화에 따른 무수한 직선의 교차와 흑색과 다갈색의 제한된 색채의 사용이 두드러지는 것이 이 시기 작품의 특징이다. 1913년에서 1915년까지 ‘분석적 큐비즘’이 점차 추상적인 이미지로 변해 가는 것을 알게 된 피카소와 브라크는 다시 시각적 이미지와 색채의 중요성을 회복하기 위해 색면 구성을 시도한다. 이에 따라 화면에 현실성을 나타내기 위한 수단으로 신문 조각, 악보, 담배갑, 상표 따위를 부착하는 이른바 ‘파피에 콜레(콜라주)’란 수법을 쓰는데 이것을 ‘종합적 큐비즘’이라 한다. 종합적 큐비즘에서 시도된 파피에 콜레는 어떤 이미지로서 ‘재현’의 역할도 하지만, 동시에 물질 그 자체로서 ‘현존’하는 기능도 갖게 됨으로써 이후 조형의 가능성을 열어 놓았다. 입체주의 화가들은 한 물체를 여러 방향에서 본 대상으로서 한 면 위에 나타내었고 결과적으로 일종의 전개도를 만들어 낸 것이다. 따라서 입체주의는 표현양식상의 것이라기 보다는 인간의 인식세계에 관계된 것이다. 즉, ‘인간 중심’의 세계에서 ‘대상 중심’의 세계로의 이전을 뜻하는 것이다. 이는 어느 일정한 지점에서 세계를 보는 것이 아니라 대상에 접근하여 단거리에서 여러 각도로 본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브라크가 언급한 ‘촉각적 공간’이라는 용어와 맥을 닿고 있다. 즉 보는 것보다도 손에 닿는 것으로서의 대상의 거리를 암시하는 것이다. 이들은 인상파나 야수파가 즐겨 택했던 풍경과 같은 주제를 멀리하였고 대신 직면할 수 있는 인물이나 일상적인 사물을 지배적으로 취급하였다. 이것들은 모두가 촉각적인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한 의의가 있다. 따라서 그런 개개의 대상은 개별성보다는 단순한 사물이라는 개념으로 전환되어 조형적인 의미를 갖게되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나타난 것이 꼴라주이기도 하다. 입체주의의 미학적 전개는 대상의 해체를 추구하는 1908년부터 1911년까지의 분석적 시대에서 분석된 것을 재구성하는 종합적 시대로 연결된다. 분석에서 종합으로의 전환의 특징은 사물(오브제)의 이용이다. 화면상의 실물들은 오브제라는 미술 용어로 불리며, 미술 활동에서 물감이라는 재료가 아닌 새로운 재료가 등장하여 종래의 한계성을 없애버렸다. 대표적인 화가로는 단연 피카소를 뽑을 수 있다. 스페인에서 태어난 피카소는 1900년 초부터 파리에 정착해 90년에 달하는 긴 생애에 걸쳐 끊임없는 혁신과 대담한 실험을 시도하여 20세기 현대미술의 흐름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초기 <청색 시대="">에는 가난한 사람들이나 가족 등을 테마로 청춘의 서정을 어두운 청색조로 표현했고, 이후 <장미 시대="">를 거쳐 1907년 큐비즘의 출발점이라고 할 만한 <아비뇽의 처녀들="">을 탄생시킨다. 이 작품은 흑인 조각과 고대 스페인 미술의 영향에 따른 대담한 형태의 변형과 동시에 세잔에게서 배운 지적인 화면 구성이 하나로 되어 이제까지 없었던 새로운 회화 세계를 실현시켰다. <아비뇽의 처녀들="">은 떼어냈다가 다시 붙인 얼굴과 흡사하다. 다섯 여인이 응시하는 곳은 서로 다르며 그들의 강한 눈빛은 보는 이로 하여금 위협적인 느낌을 준다. 깨진 유리 파편과 같은 효과와 구겨진 휴지조각을 다시 펴놓은 듯한 이 작품은 최초의 진정한 20세기 미술 작품이라 불리었고, 거의 반세기를 내려오는 서구 미술의 원근법의 전통을 마감한 작품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세잔의 <목욕하는 여인들="">에게서 영감을 받았다고 하는 이 작품은 미술에 대한 고정관념들을 산산히 부수고 있다. 피카소는 “나는 보이는 것을 그리지 않고 알고 있는 것을 그린다.”고 말했다. 세잔의 기하학적 패턴에 영향을 받은 피카소는 외형을 다시점으로 분해하여 앞, 뒤, 전방, 후방에서 동시에 분석하고 있다. 또한 이 작품은 1939년 뉴욕 현대 미술관에 전시되어 잭슨 폴록과 드 쿠닝의 작품에도 영향을 주었다. 5) 큐비즘 미술이 1920년까지의 추상미술에 어떤 역할을 했는지 논하시오. 입체주의 미술의 혁신은 재래의 시각상의 거리공간과 상황공간을 없애고 대상 물자체의 기본성을 탐구하였다는 데에 있다. 이러한 초점에서 촉각적 공간이라는 어휘가 나왔고, 직접 손으로 만져볼 수 있는 상태의 대상만 취급하였다. 여기서 순수성이라고 지적되는 것은 대상에 대한 설명적이며 서술적인 면이 전혀 등장하지 않는 점을 의미한다. 대상 물체의 시각적인 형태는 결과적으로 사라지고, 첫 눈에 알아볼 수 없는 상태의 그림이 대치되어 추상적 양상을 내 보이게 된다. 그러므로 입체미술은 추상미술의 발단이라고 볼 수 있다. 이 점이 1910~1920년대 초기 추상 화가들에게 미친 영향이다. ## 2014 20세기 입체파의 ‘오르피즘’에 대하여 쓰시오. - 기욤 아폴리네르가 주장한 오르피즘의 개념과 배경을 쓰세요. (20점) 오르피즘은 20세기 초반에 일어난 회화운동으로 입체파의 한 예술분파에 붙여진 명칭이다. 오르픽큐비즘이라고도 한다. 프랑스의 화가 R.들로네와 쿠프카가 대표적이며 원래는 그리스의 오르페우스교 사상을 일컫는 말이었으나, 뒤에 회화에서 입체파로부터 발전한 한 경향의 명칭으로 쓰이게 되었다. 본래 피카소나 브라크를 중심으로 하는 정통 입체파는 대상의 분석과 화면의 재구성을 중요한 목표로 삼았기 때문에 색채보다는 오히려 형태의 조합에 의한 구성을 중시했다. 그러나 이에 대하여 들로네나 쿠프카는 인상주의의 보색이론을 발전시켜, 스펙트럼에 나타난 모든 색채를 화면을 끌어들여서 음악적인 리듬에 바탕을 둔 다채로운 화면 구성을 추구하였다. 명명가는 시인이자 비평가인 기욤 아폴리네르이다. 입체파의 열성적인 우호자였던 아폴리네르는 1912년, 베를린의 한 화랑에서 열린 로베르 들로네의 개인전에 초대되어 강연을 했는데, 그 강연에서 들로네의 작품이 피카소의 그것과는 또 다른 새로운 양식을 제시하였고, 예술의 시대를 개척하였다고 평가하였다. 아폴리네르는 들로네의 회화와 화면의 구성이 시적, 음악적 원리에 바탕을 둔 것이라 규정하고, 고대 그리스의 음악의 신 오르페우스의 이름을 빌어 ‘오르피즘’이라는 명칭을 제안하였다. 6) 오르피즘의 화가 2명을 쓰고 설명하세요. (20점) 대표적인 작가로는 들로네와 쿠프가가 있으며 뒤샹도 한때 이 경향의 작품활동을 하였다. 그러나 끝까지 이 경향에 충실했던 이는 들로네와 그의 부인인 소니아 들로네 뿐이었으므로 오르피즘은 대체로 1911년에서 1914년 사이에 들로네가 열중했던 화풍을 지칭한다. 추상 회화의 전개에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작가인 로베르 들로네는 신인상주의와 세잔의 영향을 받으며 큐비즘 운동에 참여했는데, 1911년경부터 형태와 색채의 동적인 조직, 단편적인 자연의 재현, 추상적인 색채며 형태 등을 어떤 리듬 속에 구성, 조화시켜 동일한 화면 속에 표현하였다. 그가 생존하고 활동하고 있는 도시의 소음,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 등을 주제로 삼았다. 이러한 경향은 큐비즘과 미래주의의 융합된 모습으로 매우 추상적인 경향을 띤 것이었다. 화면은 직선과 곡선으로 분할하는 면으로 구성되었고, 각 면에는 유채색을 사용하여 표현하였는데, 시간의 흐름에 따라 밝고 선명한 스펙트럼의 원색이 다채롭게 사용되었다. 들로네가 표현하고자 한 주제는 첨단의 사고로 화면의 사선과 디스크형의 원형은 당시에 가장 주목을 받았던 과학 기술의 업적인 에펠탑과 비행기의 프로펠러였다. 프로펠러는 인간이 하늘을 날고자 하는 꿈을 실현시켜 준 비행의 원리를 상징하는 것으로 동시대인의 인상에 강하게 남았던 첨단 과학의 상징이었다. 쿠프카는 특히 음악과 영적 체험을 표현하는 회화에 심취했다. 어렸을 적 영매의 능력이 자신에게 처음으로 나타나는 체험을 한 쿠프카는 자연히 종교와도 같은 신지학에 관심을 쏟게 되었으며 이런 그의 신비주의의 경향은 생애 전반에 걸쳐 계속되어 다수의 작품으로 나타났다. 쿠프카는 유럽에서 최초로 추상적 색채와 형태 속에 내재된 정신적 상징주의를 탐구하고 이를 과감히 작품에 사용한 예술가 가운데 한 사람이며, 음악에서 유추한 시각 예술 작품을 제작하는 데 성공한 작가 중 한 사람이다. 그는 야수주의 화가들이 즐겨 사용하는 무지개색으로 그림을 그렸는데, 들로네보다 먼저 거의 완전한 추상에 도달하였지만 들로네에 비해 명성이 없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들로네를 더 떠올리곤 한다. <첫단계>라는 작품은 정신적 상징주의에 속하는 그림으로, 쿠프카는 회화에 주제가 필요하지 않다는 깨달음에 도달하여 선의 리듬과 색채 구성을 통해 음악과 유사한 효과를 나타낼 수 있는 회화의 창조를 궁극적인 목표로 삼았다. <대각선의 면="">에서는 쿠프카가 실재 세계를 어떻게 지성적으로 추상화했는지를 보여준다. 그는 색과 구조의 조화를 통해 자신이 바라본 세계를 추상으로 표현했다. 다양한 초록색이 있고, 얼룩의 파란색 가장자리에는 노란색이 있으며, 흰색과 검정색은 매우 강렬한 느낌을 준다. 미묘하고 복잡한 색들의 대비에서 음악적 느낌이 발생하는데 실제로 쿠프카는 음악을 시각화하는 데 주력했으며 수직으로 뻗은 기다란 것들은 파이프 오르간을 연상시킨다. 7) 오르피즘이 미친 영향을 쓰세요. (10점) 화려하고 다이나믹한 색채의 표현은 구성주의, 신조형주의와 함께 훗날 추상 회화에 큰 영향을 주었다. 큐비즘의 한 분파였던 오르피즘은 큐비즘의 조형성을 가지면서 미래주의의 다이나믹한 표현을 가미시켜 공간과 시간의 동시 표현을 시도하며 색채에 있어 큐비즘의 냉담한 색조를 피하고 야수주의의 강렬한 이미지를 채용하였다. 그들은 입체파의 견고한 구성을 지니면서도 시간적 개념의 도입과 색채 활용을 중시하여 미래파적인 다이나믹한 발상과 야수파의 강렬한 색감을 화면에서 시도하였다. 그래서 작품은 초기 입체파의 것에 비해 감각적이고 색채적이다. 또한 오르피즘 회화는 아폴리네르에 의해 ‘칼리그람’의 토대가 되었다. 시인은 오르피즘의 원리를 시에 적용하여 시어를 배열하여 일정한 형태를 만들어냈다. 그의 원리에 의하면 서로 무관하거나 대비되는 부분들이 임의적이고 부적절하게 병치되었을 때 구성의 각 요소들은 논리적 혹은 관습적 방식보다는 오히려 충돌과 대비를 통해 상호작용한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오르피즘은 제 1차 세계대전 직전에 문학, 음악, 조형 예술에서 가장 논란이 많았던 개념 중 하나였다. 그것은 다양한 인식의 표현, 여러 장소에서 동시에 일어난 일들에 대한 즉각적인 직관, 혹은 시간 속에서 펼쳐지는 연속된 사건들에 대한 순간적이며 집중된 직관을 의미했다. 그것은 ‘계속되는 현재’라는 심리적인 개념을 미술과 문학에까지 확대시킨 것이다. ## ■2015 8. 야수파와 다리파의 사회적 배경, 탄생과정과 미술사적 특징에 대해 쓰시오. (30점) -야수파 야수파는 프랑스에서 발생하여 1904~8년 간 보여졌던 한 경향을 일컫는다. 충격적인 색채, 형태의 원근법과 왜곡, 거친 화필, 평면적이고 선적인 패턴, 전면 디자인의 일부분으로 노출된 캔버스를 사용한 점을 특징으로 하는 이들은 신인상주의 색채 이론과 고흐의 순수한 감정 표현에 영향을 받아 색채의 독자적 표현력을 목표로 한다. 이들은 색채를 재현적, 사실적인 역할로부터 해방시켜 감각으로 호소하는 표현 수단을 확립하려고 하였다. 대표적인 작가로는 마티스, 브라크, 루오가 있다. 비평가들은 겨자 색의 하늘, 토마토 같이 붉은 나무의 색 등을 보고는 야수주의 작품을 ‘더할 나위 없는 미친 짓’으로 간주했다. 그러나 야수주의 화가들은 미친 것이 아니라 진지하게 어떤 풍경을 대할 때 자신의 감정적 반응을 표현할 수 있는 새로운 방법을 실험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야수주의 화가들이 전통으로부터 이탈하여 급진적인 회화방식을 실험하도록 용기를 북돋은 것은 1901~1906년 사이에 열린 반 고흐, 고갱, 세잔의 회고전의 영향이 컸다. 자연을 모방하는 것을 거부한 야수주의는 훗날 현대미술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들은 특히 피카소의 입체주의에 영향을 주었던 아프리카의 가면을 수집한 최초의 수집가들이었다. 또한 그들은 점차적으로 세잔이 강조한 내부 구조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는데, 이러한 경향은 다음 시대 미술의 혁신을 몰고 온 입체주의에 영향을 주었다. 마티스만이 순수한 색채의 가능성에 대한 실험을 계속했으며 그것을 위해 형태는 가장 단순한 것으로 제한시켰다. 그는 색채를 사용하여 전통적인 주제를 강렬하고 독창적인 것으로 변형시켰다. 또한 전방이나 배경, 대상이나 주위를 둘러싼 공간 모두를 평면적인 패턴으로 부각시켰는데, 이와 같이 평면적이고 장신적인 전면적 효과를 달성하기 위해 그는 그림자와 원근법을 포기하기도 하였다. 야수주의 실험은 단명하고 말았지만 매우 큰 영향력을 행사하였는데, 특히 독일 표현주의 미술에 영향을 끼쳤다. 1908년 야수주의 화가들의 작품을 보면 색채의 극한까지 지독하게 실험을 이어간 것을 알 수 있는데, 브라크는 이런 상황에 대하여 “사람이 계속해서 발작상태에만 빠져 있을 수는 없는 법이다.”라고 말하였다. 야수주의는 이렇듯 탈진상태가 오는 것을 피할 수 없었고, 막을 내리게 된다. -다리파 ‘표현주의’란 야수파, 초기 입체파, 인상주의 등 의식적으로 모방을 거부했던 여러 작가들의 작업을 설명하기 위해 독일 베를린의 <폭풍>지의 주간 헤르바르트 바르덴이 보링거의 논문에서 발취해 ‘인상주의 화가들 혹은 반인상주의자’란 의미로서 처음 사용했던 용어이다. 이는 20세기 초, 제 1차 세계대전 이전의 시기와 제 2차 세계대전 사이의 독일을 중심으로 오스트리아, 프랑스, 러시아 등지에서 활발하게 전개된 반인상주의 성격의 예술혁신 운동으로, 예술가들이 주관적 세계관을 바탕으로 삶의 본질에 대한 견해를 강렬한 형식을 통하여 표현하는 미술을 지칭한다. 표현주의의 또 다른 배경으로 20세기 초 독일에서 일어난 특수한 사회적 변화를 들 수 있다. 독일은 과격한 산업혁명 정책으로 19세기 말경에는 산업국가로 급성장하게 된다. 이 외에 지하철의 발명과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 일상생활에서의 전화 사용 등으로 사회는 더 빨리 변화, 이동하고 있었다. 이같이 급속도의 사회 흐름 속에서 사람들은 불안과 혼란스러움을 느꼈다. 산업 혁명으로 인한 자본주의 경제로의 변화는 여러 가지 부작용을 동반하여 빈곤한 도시인구의 증가와 거칠고 삭막한 사회적 분위기를 조성하게 된다. 또한 과학기술의 발전 등 빠르게 진행되는 학문적인 혁신으로 인간의 무능력과 무가치함을 깨닫게 되었고, 세계의 중심에 있다고 생각했던 인간 중심적 사고에 대한 회의와 신뢰의 파괴도 표현주의적 양식을 태동시키는데 한 몫을 하였다. 독일 표현주의에 영향을 미친 대표적인 표현주의의 선구자로서 반 고흐, 폴 고갱, 에드바르드 뭉크를 들 수 있다. 이들은 인상파와 달리 자연을 묘사하는데 그치지 않고 개성적이며 주관적인 독특한 색채 사용으로 새로운 장면의 제시와 감정의 환기를 위한 노력을 시도하였다. 이후 표현주의는 주로 두 종류의 비공식적 예술가 그룹으로 나뉘게 되는데, 1905년에 구성되어 13년에 해체된 <다리파>라는 드레스덴 그룹과, 1912년 전람회를 가졌던 뮌헨 예술가들의 <청기사파>그룹이 그것이다. 다리파는 에른스트 루드비히 키르히너, 칼 슈밋 로틀루프, 프리드리히 밀러, 에밀 놀데 등 20대의 젊은 예술가들을 중심으로 드레스덴에서 창립되었다. 다리는 ‘모든 혁신적이고 격동적인 요소’를 연계시킨 다는 의미로, 8년이라는 짧은 활동기간에도 불구하고 격렬함과 잔인함의 극한까지 표현하며 새로운 양식을 창조했다. 그들은 각자의 개성보다 한 그룹으로서의 공동 작업을 중요시하였다. 안이한 중산층의 도덕의식, 물질문명에 반발하고 새로운 인간의 시대를 지향하는 사회 개혁적 의지를 담고 특히 대중 사회에서 개인의 갈등과 고립 그리고 현대인의 심리적, 사회적 의식을 작품의 주제로 삼았다. 또한 다리파 화가들은 자신들의 강렬한 감정을 표현의 주제로 사용하였으며 그들이 원하는 효과를 얻기 위해 그 주제를 왜곡시키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특히 2차원적 평면과 흑백의 대비 속에서 힌찬 정신의 표현을 추구하여 그것을 독자적인 예술의 범주로 높인 의의는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다리파의 독특한 테마는 풍경 속의 누드였다. 누드 모델은 강요받지 않은 자세로 움직였고 인간과 자연의 일치를 재현하고자 하였다. 다리파 화가 중 키르히너는 가장 원색적이고 표현이 강한 화가이다. 보색의 사용으로 강렬한 원색을 나타냈고, 즉흥적인 매끄러운 선의 처리와 결합하여 모든 우연성을 부인하는 함축적인 그림 공식을 이루었다. 빛나는 보색대비로 칠해진 색들은 그림에 커다란 생명감을 부여하는 따듯함과 차가움 내지 밝음과 어둠의 집중적인 조화를 이루는 것이 특징이다. 에밀 놀데는 독학자로서 색채에 천부적인 재능을 가졌던 화가이다. 그는 모티프를 주로 성경의 소재에서 찾았다. <성령강림절,1909>에서 비좁게 밀집되어 있는 인물들은 자주색과 노란색 톤의 강한 색채를 통해 신비한 효과를 얻으며, 이 효과는 훨훨 타오르는 불꽃형태에서 구원의 테마를 관조적으로 만든다. 그는 특히 상당히 두껍게 바르는 붓질을 통해 인물들을 깎아 만든 것처럼 묘사하여 밀도 높은 화면을 만든다. 색채는 화법이나 이론적 사고에 따르지 않고 완전히 직관적으로, 그가 가진 개인적인 깊은 경험에서 비롯하여 작품을 제작하였다. 근대 이후 이성에서 해방된 인간은 개인 자유의 극대화로 예술 영역에서도 형태와 색채의 재해석을 가져왔다. 20세기 들어 전통의 자연주의, 아카데미즘, 인상주의에의 반동으로의 등장에서 프랑스 야수주의와 독일 표현주의는 닮아 있다. 고흐, 고갱의 영향을 받은 야수주의자들은 눈에 보이는 대로 그리는 것을 부정하고 순수성을 띤 색채 자체의 표현을 추구했다. 반면 표현주의는 야수주의에 영향을 받았으면서도 의도적으로 강렬한 색채와 변형된 형태, 극적인 구성을 추구했는데, 다리파처럼 그로테스크하면서도 왜곡된 인물들로 극단적으로 표현하거나, 청기사파 칸딘스키처럼 새로운 정신성이 가해져 내적, 상징적, 추상적인 경향을 띠었다. 야수주의와 표현주의는 미술이 외부영상을 그리기보다 개인의 감수성을 표현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작가의 내면세계에 초점을 맞추고 주관의 표현, 형식의 해방을 추구했다는 점에서 닮아있다. 야수파가 순수적 표현주의라면 독일 다리파는 심리적 표현주의, 청기사파는 조형적, 추상적 표현주의라 할 수 있겠다. ## 2011 기하학적 추상주의 예술운동을 몬드리안과 말레비치를 중심으로 서술하시오. (50점) 추상 미술은 신조형주의 같은 기하학적 추상미술과 서정적 추상으로 전개된다. 이러한 표현 원리는 ‘요소주의’와 ‘자유추상’으로도 불리는데, 전자는 말레비치의 절대주의와 몬드리안의 신조형주의라고 할 수 있으며, 이들은 최소한의 형태와 색채로 기하학적 형태를 추구하여 ‘차가운 추상’이란 별명을 얻었다. 후에 디자인 분야(바우하우스)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후자인 자유추상은 ‘뜨거운 추상’이라 하는데 직관의 감정에 의한 표현때문에 1차, 2차 양 대전 사이에는 초현실주의의 출현으로 빛을 보지 못했다. 그러나 2차대전 후 미국에서 추상표현주의가 활발한 전개를 보여 유럽에 역수입되어 앵포르멜 운동을 낳게 되었다. 결론적으로 추상은 넓은 의미로 몬드리안을 시조로 하는 ‘기하학적 추상’과 칸딘스키를 시조로 하는 ‘서정적 추상’ 두 가지로 나뉜다. 기하학적 추상은 선과 색채의 엄격한 구성에 의한 조형의 원리를 탐구한다. 이에 반해 서정적 추상은 색채나 형태에 내면적인 심리를 표현한 것으로 ‘뜨거운 추상’이라고도 불린다. 전자는 말레비치의 절대주의와 몬드리안의 신조형주의라고 할 수 있으며, 이들은 최소한의 형태와 색채로 기하학적 형태를 추구하여 ‘차가운 추상’이란 별명을 얻었다. 후에 디자인 분야(바우하우스)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몬드리안은 서로 연결되어 있는 운하와 잘 닦인 도로가 기계적으로 배치되어 인공적으로 조성된 경관이 빼어난 청교도 국가 네덜란드 출신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의 혼란기 동안 그는 “자연이란 불쾌하고 무질서한 것이다.”라는 결론을 내렸다. 몬드리안은 이 지저분한 ‘자연의’ 미술을 버리고 ‘신조형주의’라는 새로운 스타일을 추구해 나가게 되었다. 그 목표는 실제의 자연계에는 결여되어 있는 정확하고 기계적인 질서를 창조하는 것이었다. 몬드리안의 스타일은 선과 직사각형을 기본으로 한다. 자연에는 직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그의 이론에 입각하여 몬드리안은 자연의 재현에서 벗어나고자 하였으며, 전쟁 중에 특히 절실히 요구되는 조화와 질서를 예술 속에서 창조하고자 직선을 사용하기로 결정했다. 데 스틸 운동이 미술사에 기여한 점은 자연 속의 어떠한 대상과도 연관되지 않음으로써 완전한 추상에 도달했다는 점이다. 몬드리안은 “미술이란 자연계와 인간계를 체계적으로 소거해 나가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미술이 될 수 있으면 수학적인 되기를 원했고, 잘 구성된 세계의 청사진 역할을 하기를 바랐다. 몬드리안은 주관적인 감성을 중요시하는 사조들의 반대편에 섰다는 점에서 미술사에 중요한 인물로 기록된다. 네덜란드에 몬드리안이 있다면 러시아에는 절대주의를 추구한 말레비치가 있다. 절대 순수감성을 표현하는 절대주의는 말레비치를 중심으로 1915년 러시아 페트로그라드에서 공식적으로 선언되었다. 말레비치는 하나의 ‘사각형’을 완전한 회화의 형태로 제시하여 예술의 순수성을 추구하고자 하였다. 말레비치는 2차원적 색채의 형상을 지닌 구상들로 순수한 색감들의 절대성을 강조한다. 이것들은 수많은 면들의 율동감을 보여준다. 회화 외의 대상 세계와의 관계를 거부하면서 그는 이 미술을 ‘비객관적’이라 명명하며 절대주의라는 순수한 색감들의 절대성에 대한 시스템 정의를 내린다. 그러므로 절대주의는 절대적으로 순수한 감성을 드러내는 것 그리고 가장 객관적이고 단순한 형태 요소의 개념을 ‘사각형’에서 찾았으며 그 자체가 회화임을 강조했다. 말레비치는 자연 속에서 있는 어떤 것도 취하지 않은 것이 미술에서의 진정한 창조라고 주장하였다. 즉 자연과는 전혀 무관한 형태가 회화의 현존적 가치를 창조하는 것이며 사실주의란 형식과 내용에서 자체적으로 완결된 물체의 창조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여기서 사각형은 모든 것이 배제된 상태의 세계를 뜻하며, 자연에서 찾을 수 없는 형태이고, 어떠한 감정 조차 제거된 최소한의 것을 의미한다. 추상주의와의 차이점은 절대주의가 추상주의라 해도 단순히 현실적 감각 세계를 거부한 것이 아닌 순수한 감성의 극점으로서의 추상, 즉 주관주의적 추상이었다는 점에 특징이 있다. 이러한 그의 태도는 실존의 양면성을 반영하는 정신적 태도로서 ‘자연 그 자체의 실제와 같이 의미 있는’ 새로운 실체를 창조하려는 노력이다. 사각형을 절대 기본요소로 보며, 사각형의 변형으로서 십자형, 장방형을 통해 인간기능을 선언하며 기하학적 형태가 물질을 지배한다는, 즉 정신적 우월성을 드러내려 하였던 것이다. 그는 또한 신지학적 사색에도 영향을 받았다. 그에게 미술이란 무용한 것이며, 미술가는 창조를 위해 정신적 독립을 유지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 ■2010 1) 추상표현주의의 배경과 특징을 서술하시오. 일반적으로 1940~50년대의 미국 화단을 지배하던, 미국 회화사상 가장 중요하고 영향력 있는 회화의 한 양식을 가리킨다. 1929년 미국에서 전시회를 열고 있던 러시아의 바실리 칸딘스키의 초기 작품의 자유 분방한 형상에 대해 미술 평론가 알프레드 바가 ‘형식은 추상적이지만 내용은 표현적’이라고 말한 것에서 유래되었다. 1945년 ‘뉴욕커’지의 로버트 코츠 기자가 당시 맹활약을 보였던 잭슨 폴록과 윌렘 드 쿠닝의 작품에 이 명칭을 부여함으로써 널리 알려지게 된다. 추상표현주의는 자연의 재현이 아닌 작가의 내면 세계를 중시하는 추상형태나 무의식의 상태에서 발생한 우연한 결과를 존중하는 20세기 현대 미술의 변화된 요소들을 바탕으로 예술활동의 중심 무대인 유럽을 떠나 미국을 중심으로 새롭게 출발한 미술이다. 작가 자신의 직관적인 표현의 행위를 예술로서 나타나게 함을 원칙으로 하는 추상표현주의는 무의식성을 강조한 1)**초현실주의의 오토마티즘**에서 강한 영감을 받았으며 2)**전쟁 전에 현대 미술사에 등장한 다양한 경향을 종합시켜 유럽에 종속적으로 이끌려 오던 미국의 현대 미술을 독자적으로 분리시킨다.** 나아가 추상표현주의는 현대미술을 새로운 영역으로 확장시키는 전환점이 된다. 3)**어떤 의도성 있는 계획적인 표현이 아닌, 오직 내적인 직관의 표현으로 예기치 않았던 우연한 이미지**를 화면에 담았다. 20세기 들어와서 미국 미술은 유럽의 새로운 사조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였지만 그 속도는 매우 느렸다. 2차 세계대전 초 미국 화단에서는 사회주의 리얼리즘과 지방주의가 지배적인 형식이었다. 그러나 전쟁의 영향으로 추상적이거나 표현주의적인 경향의 미술이 새로운 계기를 맞이했고, 뒤샹, 몬드리안, 샤갈, 막스 에른스트 등 전쟁을 피해 도피한 유럽의 전위작가들 또한 미국 미술에 큰 자극과 영향을 주었다. 이렇게 추상표현주의는 1940년대에서 50년대 초반까지 ‘뉴욕 10번가’를 중심으로 활발히 활동하였다. 이는 색면추상과 앵포르멜의 비정형 맥락을 같이 하며, 순수 추상과 기하학적 추상에 대립하는 경향으로 발전하였다. 질감과 화가의 신체적 동작에 의한 격렬하고 생명력이 넘치는 긴장의 표출을 특징으로 하며, 드리핑 기법으로 균질 회화를 추구하였다. 추상표현주의는 자연의 재현이 아닌 작가의 내면 세계를 중시하는 추상형태나 무의식의 상태에서 발생한 우연한 결과를 존중하는 특징을 보여준다. 바꿔 말해 **무의식성을 강조한 초현실주의의 자동기술법을 적용한 것**으로 구상회화나 전통적인 추상예술이 갖는 기하학적, 비기하학적 형상성을 초월하고자 하였다. 결론적으로 추상표현주의는 서구 근대미술의 복합적인 요소를 모두 포함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야수파, 표현주의, 다다이즘, 미래주의, 초현실주의로 이어지는 한 계보와 인상주의, 입체파, 기하학적 추상의 계보를 모두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이는 60~70년대에 걸쳐 네오다다이즘, 팝아트, 미니멀 아트, 신표현주의 등에 큰 영향을 미쳤다. 대표 작가로는 잭슨 폴록, J.뉴먼, 마크 로스코, 윌렘 드 쿠닝, 프란츠 클라인 등이 있다. 2) 추상표현주의의 작품을 예로 들어 특징을 서술하시오. 추상표현주의자의 대표주자는 잭슨 폴록이라는 한 전위적 작가였다. 그는 미술공부를 위해 고등학교도 졸업하지 않은 채 뉴욕으로 향했다. 한동안 인디언의 토착문명을 상기시키는 그림을 그리던 그는 47년경부터 ‘드리핑 기법’즉 뿌리기 작업을 시작한다. 그는 붓으로 무언가를 그리는 대신 뿌리고, 던지고, 튕기는 방법을 사용하였다. 그림의 크기 또한 어마어마하다. 폴록은 커다란 화폭을 바닥에 놓고 그 주변이나 위를 걸어 다니면서 물감을 뿌려 댔고, 아주 독창적인 화면을 창출하였다. 물감 또한 화가들이 사용하는 것이 아닌, 공업용 에나멜 페인트였다. 그는 어떤 사물을 재현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화면에 물감을 뿌리고, 던지고 튕기는 그의 행위를 보여주었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폴록의 그림은 움직임의 그림이며, 따라서 그의 신체와 아주 밀접하다. 해롤드 로젠버그라는 비평가는 그의 미술을 설명하기 위해 ‘액션 페인팅’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다. 어떠한 계획도, 의도도 없는, 아주 즉흥적인 작업으로 이루어지는 그의 그림에도 불구하고 완성된 그림에서는 어떤 이미지나 느낌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 폴록의 그림의 특징이다. 종종 그의 그림에는 ‘가을 리듬’이라던지 ‘연보랏빛 안개’같은 서정성 짙은 제목이 붙기도 한다. 그의 그림은 자발적이고 즉흥적이라는 점에서 다다이즘과, 더 나아가 초현실주의와 연결된다. 모든 의도를 배제한 자동주의적 기법을 통해 무의식을 형상화하려고 했던 초현실주의적 기획이 그의 미술에서도 엿보이기 때문이다. 폴록 이후의 많은 화가들은 폴록과 같이 거친 방법을 사용하는 모습을 자주 보였다. 물감을 분무기에 넣고 쏘아 터뜨린다든지 하는 행위들은 폴록의 그것과 아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결론적으로 잭슨 폴록은 ‘뿌리기’라는 자발적 표현 행위를 통하여 그의 무의식과 같은 내면 세계를 드러내고자 했고, 이러한 점은 추상표현주의를 그들의 뒤를 잇는 60년대의 추상미술과 구별된다. ## ■2016 20세기 포스트 모더니즘 설명(20점) 포스트모더니즘은 1970년대 중반부터 시작되어 80년대 들어 문화예술전반에 대두된 일종의 문화현상이다. 80년대 이후 미술계는 재료와 형식면에서 다양성의 시대가 도래하는데, 구상과 추상, 장난과 진지, 손과 기계 등이 공존하며, 현실을 거부했던 모더니즘의 방식을 구식이라 칭하고, 현실의 재창조를 선언한다. 포스트모더니즘의 대두 배경과 특징, 다양한 경향의 주요 작가와 작품들을 고찰해보고자 한다. 포스트모더니즘은 20세기 후반 모더니즘의 한계에서부터 출발하는데, 혁신적 사회현상들로 기존 가치체계를 벗어나 새로운 것을 찾으려는 분위기에서 비롯되었다. 즉 19세기 중엽 인상주의로부터 시작되어 야수파,입체파,표현주의,다다이즘,초현실주의,추상표현주의까지 100여년간 지속된 모더니즘의 질서를 깨뜨리고 등장한 것이다. 포스트모더니즘에서는 평면적 회화 공간의 무한한 확장과 형식주의 미학에 맞서 제작의 원본성 개념을 부정하고, 인용, 패러디, 패스티쉬, 알레고리 등 다양한 방법을 사용하면서, 이전 시대에 무시했던 상업미술을 우위로 대접하기도 한다. 모더니즘이 삶과 예술을 분리했다면 포스트모던에서는 삶과 예술의 간격이 허물어지고 예술이 삶에 복귀한다. 포스트모더니즘은 팝 아트, 개념미술, 프로세스아트, 환경미술, 신체미술, 설치미술, 포토리얼리즘, 신표현주의, 대지미술, 차용미술, 그래피티아트 등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고 있는데, 한국에서도 80년대 이후 문민정부의 출현과 함께 포스트모던의 시대를 맞이한다. 탈이념과 여성운동, 제3세계운동, 사회정치현상의 변화 등이 한국사회에도 영향을 미쳐 미술,조각,무용,건축에서도 실험과 저항이 맞물려 일어나는 것이다. 60년대 미국과 유럽의 팝 아트가 가장 대표적인데, 팝 아트의 황제 앤디워홀은 뒤샹의 레디메이드에서 처럼 예술이 소재를 슈퍼마켓 찬장이나 잡지에서 선택하여 수프깡통, 코카콜라병 같은 대량생산의 이미지를 실크스크린 판화를 통해 반복해냈다. <브릴로박스>로 미술이 박물관에서 나와 일상생활속으로 뛰어드는 계기를 만들었으며, <100개의 켐벨수프깡통>처럼 복제의 복제를 통해 끊임없이 재생산되는 예술적 생산방식의 기술화를 보여줬다. 개념미술의 대표자 조셉코수스는 <하나이면서 세="" 개인="" 의자="">를 통해 실물의자, 사진을 찍은 의자, 사전적 정의의 의자를 작품으로 선보이며 ‘무엇이 진짜 의자일까?’라는 의문을 던졌다. 뒤샹의 레디메이드에서 작가의 정신적 선택을 강조했던 것처럼 모든 미술은 본질적으로 개념적이며, 미술은 개념적으로만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해보인 것이다. 리차드 에스티즈와 돈에디,오드리플랙,척클로즈 등은 팝아트에 영향을 받아 사진을 회화로 재생하는 포토리얼리즘을 선보였는데, 리차드 에스티즈<타임스퀘어 오후 3시 53분,겨울>에서처럼 환등기와 사진을 이용해 도시진열장에 반사된 영상을 카메라보다 정교하게 그려냈다. 로버트 롱고<무제,도시남자>와 신디셔면<무제 #228>은 기성의 사진영상, 영화, 사진속 이미지 등을 차용한 차용미술을 보여줬으며, 키스해링은 <빛을 발하는="" 사람=""><짖는개><율동적인비행선>에서처럼 그래피티 아트, 낙서스타일의 직업화가로 유명하다. “비디오가 캔버스를 대신할것이다”라고 했던 백남준의 <람세스왕><누워있는부처><워치독>등의비디오아트이자 설치미술도 빼놓을 수 없는 포스트모던의 한 갈래이며, 리차드롱<페루에 그려진="" 선을="" 따라걷기="">, 스미드슨<나선형방파제>,크리스토<포장된해안> 등 기존회화의 질서를 무너뜨리고 평면적 회화 공간의 무한한 확장을 연 대지미술도 큰 조류를 형성하고 있다. 이상 살펴본 바와 같이 포스트모던 미술에서는 모든 것이 개방된다. 형태,재료,미디어,내용의 한도가 무한대로 확장되어 21세기 미술은 국제적 다양성을 기반으로 “경계없음”이 되었다. 작가들은 무한의 자유를 제공받았고, 관객들은 유행된 예술에서 벗어나 각각의 매니아를 형성하게 된다. 21세기 포스트모더니즘 시대는 진정한 개인의 존엄성이 발현되는 시대라 볼 수 있겠다. ## ■2009 팝아트의 개념과 기원 등에 대하여 설명하시오. 1960년대 초기에 미국에서 발달하여 미국 화단을 지배했던 구상회화의 한 경향 ‘팝pop’이라는 명칭은 ‘popular’에서 유래하였으며, 일상생활에 범람하는 기성 이미지인 대중적 이미지에서 제재를 취했던 미술의 경향을 일컫는다. 팝 아트가 급속히 일반화된 것은 1962년 뉴욕의 제니스 화랑에서 열렸던 <뉴 리얼리스트전=""> 이후의 일이나 영국에서는 이미 10여 년 전부터 그 전조가 된 미술가들의 활동이 있었다. 1956년 화이트 채플 아트갤러리에서 개최된 [이것이 내일이다.]전에서 영국작가 리차드 헤밀턴의 꼴라쥬가 그 전조라 할 것이다. 1950년대 초부터 해밀턴, 파올리치 등의 젊은 작가들이 모여서 대중 사회의 문화, 예술, 매스 미디어와 같은 문제들을 토론하고 전시회를 개최함으로써 팝 아트라는 명칭을 얻게 된 것이다. 이 말을 처음으로 사용한 사람은 영국의 비평가 알로웨이였다. 그러나 그에 따르면 이 명칭은 이미 1950년대 초에 런던의 소그룹 예술가들 사이에서 쓰여왔다는 것이다. 영국의 팝 아트는 초기부터 사회 비판적이었으며, 구태의연한 사회질서에 대한 비판으로서 사회와 예술을 접목시키고자 했던 젊은 예술가들에 의해 전개되었다. 따라서 알로웨이가 영국에 있어서 ‘대중 문화’라고 언급한 것은 미국과는 다른 문화적 계급을 의식한 것이었다. 그러나 미국의 팝 아트는 1950년대 초기의 미국 화단을 휩쓸었던 추상표현주의의 애매하고 환영적인 형태와 주관적인 미학에 대한 반동의 결과로 나타나게 됐다. 미국의 팝 아트는 특히, 지극히 평범한 것조차도 미적, 예술적인 가치가 있다는 전위 작곡가 케이지(John Cage)의 사상에 고무된 바 크다. 또한 제2차 세계대전 때부터 미국 미술에는 유럽으로부터 수용된 입체주의와 초현실주의의 영향이 지속되었는데, 1960년대 이후로 이 영향력은 추상주의와 사실주의라는 양극으로 분리된다. 미국의 팝 아트는 사실주의의 한 지류로서 미국으로 상징되는 현대의 테크놀로지 문명에 대한 낙관주의를 기조로 하고 있다. 미국 팝 아트의 전조 작가로는 라우센버그와 재스퍼 존슨을 들 수 있다. 특히 라우센버그는 일상 생활에서 흔히 발견되는 물체, 이를테면 콜라병, 자동차 타이어, 침대 등을 이용하여 컴바인 페인팅을 창안함으로써 팝 아트의 기틀을 마련했다. 미국의 팝 아트는 흔히 발견되는 일상의 이미지나 물체를 미술 작품으로 전환시켰는데, 이 점은 다다적인 방식이다. 그러나 다다와 근본적으로 다른 것은 팝 아트가 세련된 고도의 기술에 의해 ‘일상’을 미술의 영역으로 또는 사회의 체계 속으로 끌어들였으며, 반(反) 미학적이 아니라는 점에 있다. 또 화면에 나타난 이미지는 구상적이지만 회화 체계 자체는 추상성이 높다. 대표적 작가로는 대중스타의 얼굴이나 대중생산품을 재현한 앤디 워홀(Andy Warhol, 1928~1987)은 인간적인 감성을 제거하는 미술작업으로 인간의 숨결이 제거되었다 하여 화단에서는 예술의 종말이라고 표현하였다. 만화 이미지를 확대한 리히텐슈타인, 일상적인 사물을 3차원으로 옮긴 올덴버그 등이 있다. ## ■2012 20세기 개념미술에 대하여 논하시오. 일반적인 뜻으로는 미술작품의 물질적 측면보다 관념성의 비물질적 측면을 중요시하는 경향을 말한다. 좁게는 기호나 문자 등의 비물질에 의한 표현양식을 말하지만, 넓게는 퍼포먼스나 비디오 아트 같이 회화도 아니고 조각도 아닌 새로운 미술 형태와 대지미술처럼 대부분의 사람들이 드로잉이나 사진으로 볼 수 밖에 없는 미술 형태를 포괄한다. 공식적으로는 1960년대 후반에 미국의 평론가 존 펠로가 점차 지적인 사고 조작을 중요시한 나머지 어떤 극한에 도달한 상태의 현대미술 양식을 설명하기 위해 사용하였다. 이처럼 개념미술은 대부분의 미술작품이 형식(작품)과 내용(개념)으로 성립되는 것에 비해, 일방적으로 개념을 중시하여 작품이 언어적인 의미 내용과 제작 이념에 완전히 종속되어 작가의 사고자체가 전면에 등장하는 경향을 총체적으로 일컫는다. 개념미술은 1960년대에 들어 더욱 상업화 되어 가던 미술계와 특히 동시대 미술이었던 미니멀아트로 대표되는 전후 형식주의 미술에 대한 반대를 기치로 대두하였다. 개념미술이라는 명칭 자체도 1960년대 초에 과격한 반 예술적 이벤트를 시도한 요셉 보이스, 백남준 등의 플럭서스 멤버들에 의해 처음으로 사용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개념미술가들은 그때까지의 미술이 좁은 범위의 개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보고, 그 한계에서 탈피하기 위해 페미니즘, 대중문화, 기호학 등을 이용하여 전통적인 미술작품과 닮은 구석을 거의 찾아볼 수 없는 새로운 작품을 창조해 냈다. 개념미술은 기본적으로 근대적 예술관을 부정하거나 긍정하는 두 경향으로 나뉘는데, 전자는 유럽에서, 후자는 미국에서 많이 보인다. 유럽에서는 제1차 세계대전을 경험한 후 이성적 합리주의에 근거한 근대 미술을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다다가 출현하였고, 이것이 제2차 세계대전 후 재평가되면서 미술에 관념성을 도입한 뒤샹 등의 영향과 어울려 부정적 경향의 기초를 형성했다. 유럽에서 긍정과 부정의 배후에는 형이상학적 혹은 합리론적인 전통이 자리하고 있으며 초경험적인 존재에 관계하는 태도에 따라 그 입장이 결정된다. 특히 경험론의 전통에 근거한 실증주의적인 토양이 형성되어 있은 영국의 경우에는 롱, 디베츠, 길버트와 조지 등과 같이 경험 자체를 중시하는 경향과 논리 실증적인 언어로의 관심을 두는 미술과 언어가 개념미술을 표방하였다. 이는 반논리실증주의자에 의해 유럽 근대 미학이 영국에 뿌리를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미학은 특히 칸트적인 ‘미의 형식성’이 영국을 거쳐 미국으로 건너와 독자적으로 해석됨으로써 추상표현주의 이후 차가운 추상에서부터 미니멀아트에 이르는 일련의 순수한 형식주의가 미국적인 개념미술의 토대가 되었다. 뉴>포장된해안>나선형방파제>페루에>워치독>누워있는부처>람세스왕>율동적인비행선>짖는개>빛을>하나이면서>브릴로박스>청기사파>다리파>폭풍>대각선의>첫단계>목욕하는>아비뇽의>아비뇽의>장미>청색>까마귀가>별이>황색>아비뇽의>파란>세잔에게>대수욕도>사과와>생>까마귀가>별이>황색>아비뇽의>파란>세잔에게>대수욕도>사과와>생>후기>마네와>트로페즈>그랑자트>물랭드라>목욕하는>수련>정원에>루앙>인상:해돋이>피리부는>폴리-베르제르의>올랭피아>민중을>키오스섬의>호라티우스>까마귀가>별이>황색>아비뇽의>파란>세잔에게>대수욕도>사과와>생>후기>마네와>트로페즈>그랑자트>물랭드라>목욕하는>수련>정원에>루앙>인상:해돋이>피리부는>폴리-베르제르의>올랭피아>오르낭의>이집트의>최후의>성>오르가스>긴>야간순찰>성>성>성>십자가에>성>카라바조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