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잉 업
19세기 낭만주의에서 비롯한 예술인에 대한 환상은 21세기인 지금도 여전히 남아 있다. 아직도 예술가를 떠올릴 때 나인 투 식스의 출퇴근 시간에서 자유롭고, 영감이 떠오를 때마다 작업하는 자유인으로 생각하는 이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물론 그런 예술인도 있겠지만, 그렇지 않은 대부분의 예술인은 예술을 일반 회사원과 다를 것 없이 직업으로 삼아 일하거나 혹은 직업으로 삼을 만큼 돈벌이가 되지 않아 회사원의 신분으로 이중생활을 이어가고 있을테다. ‘쇼잉 업’의 리지는 후자에 해당하는, 주중엔 예술대학에서 사무직으로 일을 하며 밤에는 개인 전시를 준비하는 직장인이자 예술인으로서의 삶을 병행하는 인물이다.
리지는 전시회 앞두고 신경이 곤두서 있다. 예술가가 아님에도 그 모습이 생소하지 않은데, 마감을 앞둔 대학생 혹은 직장인으로서 비슷한 경험이 많았기 때문이리라. 그는 작업에 전념하기 위해 휴가를 내지만, 전날 밤 자신의 고양이가 다치게 한 비둘기를 하는 수없이 돌보게 되는 바람에 시간과 정신을 빼앗기고 만다. 그의 가족들은 이런저런 일로 그를 가만히 놓아주지 않고, 고양이 사료가 떨어진다거나 집주인이자 동료 예술가인 조는 온수를 고쳐줄 생각을 않는 등 전시회 준비 외에도 리지를 신경 쓰이게 하는 일이 한 두 가지가 아니다. 이렇듯 이른바 예술가
인 리지의 일상은 낭만과는 거리가 멀고, 현실과 끈적하게 들러붙어 떼어낼래야 결코 떼어낼 수 없는 일로 가득하다. 영화는 그러한 리지의 일상을 천착하는 방식으로 그가 일상에서 경험하는 미세한 균열과 감정의 파동을 편협하지 않은 시선으로 시종일관 좇는다.
조는 여러모로 리지와 비교되는 인물이다. 차고에서 음악도 틀어놓지 않고 조용히 작업하는 리지와 다르게 조는 시끄러운 음악을 틀고 천장이 높은 작업실에서 비교적 거대한 설치미술을 주로 작업한다. 자신의 집에 사람들을 불러 파티를 즐기기도 하며, 매사에 예민한 리지와는 달리 즉흥적이고 일상에서 크게 스트레스를 받을 것이 없는 사람처럼 보인다. 만약 리지와 같이 예민한 구석이 있는 사람이라면 별 걱정 없이 세상을 순조롭게 살아가는 조와 같은 인물을 보며 부러워하거나 질투의 마음을 가진 적이 있으리라. 괜히 나의 존재를 더욱 초라하게 만드는 그런 사람 말이다.
영화는 112년 동안 운영되다 2019년에 문을 닫은 오리건 예술공예대학의 부지를 다시 꾸민 것이라고 하는데, 극 중에서도 다양한 예술 활동을 영위하는 예술가들의 모습을 꽤 오래도록 담아낸다. 유리 공예, 섬유, 도예, 행위 예술, 미디어 아트 등 특별한 이름도 주어지지 않는 이들의 얼굴과 그들의 작품 활동을 가만히 들여다보며 그것이 영화의 큰 운율을 만들어내는 식이다. 하나의 공동체
로서 같은 공간에 모여 따로 또 함께 작업하는 그들의 모습은 현대의 예술인들에게 커뮤니티와 공간이 주는 의미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덤덤히 그러나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우여곡절 끝에 리지는 결국 무사히 전시회를 열고, 그의 가족과 친구들이 자리를 함께 한다. 그 와중에도 치즈가 적거나 많아서 신경 쓰이고, 한쪽 구석이 타버린 조각에 대해서는 괜히 찔리는 마음으로 먼저 변명을 내놓기도 한다. 전시회 당일이 되어서도 그의 마음은 좀처럼 편하지 못하다. 그러다 정성껏 돌보았던 비둘기가 날아가게 되고 리지와 조는 비둘기를 쫓아 바깥으로 향한다. 다쳐서 날지 못하리라고 생각했던 비둘기는 멀리 날아 그들의 시선으로부터 벗어난다. 왜일까, 그제야 리지는 불안했던 마음을 내려놓고 안심한 것처럼 보인다.
마음처럼 되는 일은 드물고, 충분한 시간과 여유가 주어지지 않아도 결국 그럭저럭해 나가야 하는 것이 비단 예술뿐은 아닐 것이다. 우리는 모두 불완전한 상황 속에서 균형을 잡으며 어찌저찌 살아가는 것이다. 어떨 때는 왼발을 들어 올리고 오른손은 날갯짓하듯 위로 펼치는 우스꽝스러운 포즈를 취하고 있어도, 남들이 보기에는 비틀거리는 것처럼 보여도 우리는 그 순간에 맞는 완벽한 균형을 잡기 위한 최적의 포즈를 취하고 있는 것이다. 리지가 전시해 놓은, 알록달록하고 다양한 포즈를 취하고 있는 조각들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