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lieve different things in different places
극장에서 쇼잉 업을 관람한 이후로 켈리 라이카트의 영화를 몰아보았다. 그의 작품은 다른 영화들에 비해 전개가 느슨하고 호흡도 느렸지만, 왜인지 모르게 숨죽여 보게 되는 매력이 있다. 그중에서도 특히 First Cow가 좋았는데, 총싸움이 난무하는 서부극들과는 달리 선한 인상을 가진 두 남자의 우정을 섬세하게 그려낸 작품이다. 영화에서 '나는 다른 곳에서 일어나는 다른 이야기들을 믿는다네'라는 대사가 있는데, 아마 이 영화를 가장 잘 설명해 주는 문장이 아닐까 싶다. 라이카트는 흔히 권력과 싸움과 돈이 전부였다고 흔히 생각되는 19세기 개척 시대에도 선한 사람들의 따뜻한 우정과 선의가 존재했음을 섬세한 시선으로 정성스레 풀어낸다. 나는 차라리 이런 이야기를 듣는 것이 더 좋고, 이런 이야기를 들려줄 사람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게 기쁠 따름이다.
보고 듣고 경험한 모든 것을 더 잘 기록해 보겠다는 욕심으로 옵시디언(Obsidian)을 사용한 지 벌써 2년째. 지금 사용하는 보관소(Vault)는 나름 공을 들이고 공부하여 작년에 새로 만든 것인데, 그래프 뷰가 느슨하고 엉성하기 짝이 없다. 지금부터라도 하나씩 잘 기록해 보아야지. 기록이야말로 제때 하지 않으면 영영 뒤로 미뤄지는 일이니까. 최근에는 Andy Matuschak의 에버그린 노트라는 개념을 배우고 그것을 차근차근 시도해 보는 중이다.
3월 16일. 동아마라톤 추가 접수에 성공하면서 올해 버킷리스트인 풀마라톤에 예상보다 빠르게 도전하게 되었다. 목표는 서브4인데, 이는 4시간 이내에 완주하는 것을 뜻한다. 달리기 분석 사이트인 Runalize에 따르면 일주일에 74km 이상을, 일주일에 한 번은 29km 이상의 장거리를 달리면 최대 3시간 31분의 기록도 노려볼 수 있다고 한다(하지만 나는 불가능하다고 굳게 믿는 기록이다). 6개월 전만 해도 불가능한 훈련량이었지만, 지난 12월부터는 나름 잘 소화해내고 있다. 사이트가 말하는 나의 현재 Marathon Shape는 89%. 아직 부족한 11%를 남은 기간 동안 잘 채워보아야겠다.
설 연휴에는 친구와 제주에 다녀왔다. 10년 전과 다르게, 이제 우리에게 제주는 설렘보다 안정감을 주는 곳이 되어 있었다. 전에 갔던 식당과 카페를 찾았고, 특별히 어딜 다녀오고 싶다는 욕심도 들지 않았다. 우리는 시간을 각자가 보내고 싶은대로 보냈는데, 그 말은 즉슨 나는 제주에 가서도 달리기에 한참의 시간을 쏟았다는 뜻이다. 서울의 설날은 너무 춥고, 눈이 왔고, 도로가 꽁꽁 얼어 뛰기 힘들었던 반면에 제주의 해안도로는 너무나도 선명하고, 평화롭고, 비교적 따듯했다. 세 번째 되는 날에는 애월에서 협재까지 이어지는 해안도로를 따라 뛰었는데, ‘환상 자전거길’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사진으로도 담을 수 없는 멋진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새해의 밥 친구는 Its Always Sunny in Philadelphia와 Hacks가 차지했다. 특히 최근에 막 끝마친 Hacks는 베이비 부머 세대의 기성 코미디언과 젠지 세대의 젊은 작가가 함께 일하면서 서로의 골 때리는 면모를 마주하며 유대를 쌓는 드라마인데, 유머 코드나 이야기의 진행 방식이 너무나도 세련되어서 보는 내내 감탄했다. 데버라 밴스 역의 진 스마트의 연기가 압권인데 실제로 시즌이 방영되었던 2021, 2022, 2024년에 모두 에미 여우주연상을 수상을 했다고 한다. 또한 주제가 주제인 만큼, 이러한 각본을 머리를 맞대고 쓰는 할리우드의 작가들은 누구일지도 문득 궁금했다. 도대체 시즌 4는 언제쯤…
누군가와 유머 감각을 공유한다는 건 자신만의 언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을 찾는 것과 같죠. 서로를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어요. - S01E09
Its Always Sunny in Philadelphia는 FOX의 최장수 시리즈인데, 친구 셋이 디지털카메라를 빌려 자신의 아파트에서 찍은 쇼로 시작된 것이라고 한다. 가끔은 정말 불쾌하고 역겨울 정도의 장면과 대사들이 나옴에도 그것이 너무 신랄하고 날 것이어서 시즌이 끝날 즈음에는 얼마 남지 않음에 아쉬워했다. 특히 버드맨을 오마주한 에피소드나, 꿈에서 흑인이 되었던 에피소드 등은 감탄하며 보았다. 실제로 극에 등장하는 삼인방이 직접 대본을 쓰고 제작에 참여한다고.
그 어느 때보다 단조로운 일상을 안분하는 마음으로 지내는 요즘이다. 충분한 도전이 결여되어 있다고 느끼지만, 지금의 일상을 큰 무리 없이 이어가게끔 하는 관성의 상당 부분을 스스로 만들어낸 것에 대한 대견함도 못지않게 크다. 어쩌면 그렇게 흘러가는 이야기의 힘을 믿는 것으로 충분한 것일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