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산둘레길을 달리다

지난 2월 풀 마라톤을 처음으로 완주하고 나서 잠시 러닝에 권태를 느꼈다. 다음 목표라고 할 것이 딱히 없었고(더 빠르게 달리는 것에는 의외로 관심이 가질 않았다), 매일 같은 주로를 달리는 것이 슬슬 지겨운 것도 있었다. 그러던 중 트레일 러닝에 대한 궁금증이 생겼고, 근처에 있는 이말산을 처음으로 달리게 되었다. 처음 접한 트레일 러닝은 생각보다 훨씬 즐거웠다. 똑같은 길이라는 게 없이 구불구불했고, 나무와 돌을 피하거나 딛기 위해서 지면을 밟는 자세를 계속해서 바꿔주어야 했다. 동일한 리듬을 길게 유지하는 로드 러닝과는 다른 매력에 빠지게 되었고, 그렇게 일주일에 한두 번은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한 바퀴는 약 71.5km라고 한다

그러던 중 북한산둘레길 또한 트레일 러닝을 하기에 좋은 장소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내가 사는 곳에서 20분 거리도 되지 않는 곳에 그곳으로 향하는 입구가 있다는 것도. 이곳을 떠나 먼 곳으로 이사 가기 일주일 전에서야 발견하게 된 것이다. 불과 2년 전만 해도 ‘근처에 뛸 곳’이 없다는 핑계로 운동을 하지 않았던 나였다. 역시 관심을 가져야 보이는 법이다. 아무튼 이사를 가기 전에 꼭 한 번은 북한산둘레길을 달려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마침 긴 연휴를 맞이하여 실행에 옮겼다. 코스는 8코스에서 1코스까지(1코스에서 출발해 집으로 돌아오는 편이 훨씬 나았을 것 같다). 약 25km 남짓 되는 거리이다.

구간 이름 거리 난이도 주요 특징 및 테마
8 구름정원길 5.2km 숲길과 마을길, 구름전망대 등 조망 포인트
7 옛성길 2.7km 북한산 봉우리 조망, 오르막·내리막 반복, 경치 우수
6 평창마을길 5.0km 주택가와 산길 혼합, 평지와 오르막 반복
5 명상길 2.4km 조용한 숲, 명상과 사색에 어울리는 길
4 솔샘길 2.1km 솔샘발원지, 숲길, 가족 산책에 적합
3 흰구름길 4.1km 전망 좋은 오르막, 북한산 경관 감상, 계단 구간
2 순례길 2.3km 역사적 유적지, 사찰과 묘역, 조용한 분위기
1 소나무숲길 3.1km 울창한 소나무숲, 피톤치드 가득한 숲길, 힐링코스

집 근처에 이런 길이 있다는 걸 이사 가기 일주일 전에 알게된 나 이때까지만 해도 룰루랄라였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찍은 꽃 사진

8코스 ~ 7코스 구간은 여유 있게 경치 구경도 하고 이동진의 파이아키아를 건축한 봉일범 건축가와의 대담을 재미있게 들으며 무난하게 올랐다. 집에서 멀지 않아 길도 익숙했다.

아스팔트 시작

가장 힘들었던 코스는 다름아닌 6코스 평창마을길이었다. 트레일러닝을 할 때는 산보다 아스팔트 길이 훨씬 힘들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는데, 나에게도 그랬다. 경사가 심한 아스팔트 길을 꾸역꾸역 오르느라 많은 힘을 써야했다. 무엇보다 지루한 길의 연속이었는데 집들에 둘러싸여 풍경은 보이지도 않고 같은 곳을 계속 맴도는 듯한 느낌이었다. 다음 코스인 명상길이 나왔을 때는 안도감에 육성으로 탄식이 터져 나왔다.

나중엔 이 정도 완만한 오르막도 너무 힘들었음

평창마을길에서 힘을 다 소진한 걸까. 아직 절반도 지나지 않았는데 체력이 고갈되었다. 집에서 가져온 물도 거의 다 마셨고, 무엇보다 배가 고팠다. 트레일 러닝 대회에는 곳곳에 CP가 마련되어 있다고 들었다. 주먹밥이나 과일 등으로 배를 채우고, 사람들과 이야기하며 잠시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곳이라고 한다. 한 번도 쉬지 않고 쭉 걷고 뛰어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만의 CP를 찾아 잠시 숨을 고르고, 다리를 풀어준 뒤 앞으로 나아갔다.

밥 챙겨주는 할머니가 있어서 그런지 여유롭고 위풍당당해 보였던 고양씨

솔샘길로 진입하기 전에 다행히 편의점을 발견하여 간단하게 빵으로 끼니를 때웠다. 근처에 김밥.라면.칼국수.순댓국집 간판이 보였지만 꾹 참았다. 여기서 포기하면 오늘의 달리기는 이도 저도 아닌 것이 된다. 솔샘길을 지나 흰구름길, 순례길을 차례로 올랐다. 그렇게 어렵지도, 그렇다고 쉽지도 않은 적당한 난이도의 길이었다. 8코스부터 6코스까지는 사람을 거의 만나지 못했는데, 이곳에 진입해서부터는 정말 많은 사람들을 볼 수 있었다. 나처럼 트레일 러닝을 하러 온 사람들도 간간이 보였다.

내가 서울을 오해하고 있었던 걸까? 곳곳에 처음 보는 풍경들이 많았다. 부끄럽지만 국립4.19민주묘지도 그중 하나 열쇠 찾는 거 깜빡함(사실 찾을 생각도 없었지만)

4시간 이상을 뛰어본 것은 처음이다. 물론 걸었던 비율이 훨씬 더 높았던 것 같지만, 그래도 목표지까지 어떻게 잘 도착할 수 있었다. 첫 풀코스를 완주했을 때보다 더 기쁘고 뿌듯했고, 그 점이 신기했다. 집에 오면서 곰곰이 생각해 보니 풀코스 마라톤은 ‘포기할 수 없어서’ 완주한 것도 있었다. 핸드폰과 카드를 포함한 모든 짐을 맡겼기 때문에 도중에 멈추어도 어차피 완주 지점까지 가야했고, 그 편이 훨씬 더 힘들어 어쩔 수 없이 뛴 셈이다. 그런데 이번 둘레길은 포기할 수 있는 기회들이 10분마다 있었다. 하지만 걸을지언정 포기하지는 않았다. 여기서 멈추면 오늘 하루의 기분이 좋지 않을 걸 알기 때문이다. 물론 달리는 와중에는 ‘도대체’, ‘왜’, ‘다시는’, ‘함부로’ 같은 단어를 1,000번도 넘게 되뇌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그런 감정은 신기하게도 오래가지 않는다. 벌써 몇 번의 경험으로 ‘그럼에도’와 ‘결국’에 중독된 셈이다.

p.s. 찾아보니 둘레길을 한 바퀴 다 도는 사람들도 꽤 많은 듯하다. 하지만 올챙잇적의 기억이 가장 생생한 것을 알기에 이제는 이런 글도 부끄러움 없이 쓸 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