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가족

어느 가족〉(2018)은 가족이란 무엇인가 깊게 생각하게 만드는 영화이다. 과연 가족의 정의는 무엇일까? 영화에서 오사무와 노부요는 정식적인 입양도 아니고 길에서 주운 아이를 데려다 키운다. 그것도 두 명이나. 심지어 유리라는 꼬마아이는 가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폭력에서 구한다는 이유로 그들의 동의도 없이 이름도 바꾸고 몰래 데려다 키운다. 집에는 할머니와 손녀가 함께 살고 있다. 정확히는 할머니의 집에 얹혀 사는 셈이다. 그들은 밥을 같이 먹고 잠도 같이 자지만 과연 가족이라고 부르기에는 애매한 구석이 있다. 그렇다면 그들은 과연 어떤 공동체인가?

밥도 먹여주고 잠도 재워주지만 아이들은 그들을 부모라고 부르지 않는다. 오사무와 노부요는 내심 그러길 바라는 것 같지만, 가르쳐 줄 것이 도둑질밖에 없는 그들이 과연 제대로 된 부모 노릇을 하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처음에는 마냥 단란해 보이고 법의 바깥에서 나름 잘 살아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들의 관계는 언제 깨져도 이상하지 않을 사상누각과도 같다.

영화가 황금종려상을 수상했을 당시 심사위원이었던 케이트 블란챗(Kate Blanchett)이 ‘앞으로 우리가 찍는 영화에 우는 장면이 있다면 안도 사쿠라를 흉내 냈다고 생각하면 된다’고 표현하여 화제가 되었던 만큼 이 영화에서 그녀의 연기는 특히 돋보였다.

영화가 끝난 뒤에는 씨네큐브 25주년 기념으로 진행된 GV가 마련되어 있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과 송강호 배우, 이주영 배우 그리고 김세윤 작가가 함께 하는 행사였다. 송강호 배우와 이주영 배우가 직업인으로서 키키 키린의 연기에 대한 찬사를 보냈던 것이 기억에 남는다.

정성일 평론가의 대담1을 읽고 나서야 영화를 보다 깊이 이해하게 되었다. 툭 던지는 한 마디 대사. 잠깐의 시선에도 많은 것이 담겨 있는 영화였고, 부끄럽게도 나는 놓쳤던 부분들이 많다.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그 순간 예민하게도 그 질문에 말 못 하는 유리를 카메라로 잡으며 또 다른 한 사람을 함께 프레임에 넣습니다. 아무 말 없이 앉아 있는 노부요입니다. 이제까지 유리에게 아무런 관심이 없던 노부요가 ‘온몸이 상처투성이네’ 하는 말에 고개를 돌리는 장면을 보여줍니다. 타이밍을 딱 맞춰서. 그 말에 갑자기 반응하는 건 뭡니까. 어린 시절 매 맞고 자란에게 금방 반응하는 건 자기 얘기이기 때문입니다. 유리에게서 즉각적으로 자기를 본 겁니다. ‘나랑 똑같은 애가 온 거야? 내가 과거에 겪었던 걸 지금 똑같이 겪는 애가 우리 집에 나타난 거야?’라는 듯한 즉각적인 반응.1

영화를 본다는 건 그 장면을 ‘정말 보는’ 겁니다. 얼핏 보면 영화의 전반부는 가난하지만 즐거운 유토피아처럼 보이죠. 어떤 집이든 가난하지만 행복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오해하면 안 됩니다. 고레에다가 일본에서 했던 인터뷰를 찾아보았습니다. 자기가 이 영화의 일본 관객들의 반응을 보며 가장 실망한 것 중 하나는 이 가족들의 모습을 마치 유토피아처럼 해석할 때라고 했습니다. 그때 분노를 느낀다고 했습니다. 어떻게 이게 유토피아 일 수 있는가. 이걸 유토피아로 느낄 정도로 일본 사회는 망가졌는가. 이게 유토피아가 아니라는 걸 분명하게 보여주는 장면이 있습니다. 오사무가 다리가 다쳐 넘어졌을 때, 그 가짜 가족 중에서 얼마나 다쳤는지 물어보는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다 돈 얘기만 합니다. 이들이 왜 여기에 모여 사는지 보여주는 건 돈입니다. 하지만 감독은 우리들이 충분히 오해할 수 있을 만큼 가난을 의식적으로 비참하게 찍지 않았습니다.1

쇼타는 지금 진실이 궁금한 게 아닙니다. 진실은 이미 아니까. 이미 알고 있으니까. 너무 잘 알고 있으니까. 그럼 쇼타는 왜 이 질문을 한 겁니까. 오사무의 대답이 궁금했던 겁니다. 그 대답이 듣고 싶었던 겁니다. 쇼타는 어제의 그 어린애가 아닙니다. 자, 그런데. 오사무가 대답합니다. ‘응, 그랬어’ 아무 변명도 하지 않습니다. 아무 변명도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반문해야 합니다. 왜 변명하지 않습니까. 왜. 왜 오사무는. 하고 싶은 변명이 만 마디쯤 있을 텐데, 벌떡 일어나 앉아서 만 마디쯤 할 수 있었을 텐데, 변명하지 않습니다. 변명하지 않는 까닭은 그다음 말을 하기 위해서입니다. ‘아빠는 이제 아저씨로 돌아갈게’ 이 말을 하기 위해서.1

이 영화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설명할 수 있겠지만, 결국엔 쇼타가 어른이 된 이야기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쇼타는 친부모에게 돌아가기를 거절한 아이입니다. 그건 무슨 얘깁니까. 자기가 이제 어른이 됐다고 생각하는 아이입니다. 그래서 쇼타는 친부모에게 돌아갈 생각이 없습니다.1

씨네큐브 GV