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픔을 상상하는 아픔
많은 예술 작품이 각자의 방식으로 누군가의 아픔을 상상한다.
- 조너선 사프란 포어의 내가 여기 있나이다에서, 주인공 제이컵은 어렸을 적에 그가 가지지 않았던 장애와 질병을 연기했다. 처음에는 맹인을, 다음엔 농인, 그 다음엔 화상을 입은 사람과 척추가 부러진 사람을 연기했다. 그의 엄마는 그에게 로션을 발라주며 그것이 연고인 것처럼 아들이 빨리 낫기를 바라주었다. 다음 날 멀쩡한 사람이 된 제이컵에게 “기적이 일어났구나.”라고 말하면, 그는 “약이 잘 들었을 뿐이에요.”라고 대답했다. 장애와 부상은 계속 이어졌다.1 갈비뼈에 금이 가고, 왼쪽 다리에 감각이 없어지고, 손가락이 부러지고. 이내 아들은 죽음을 연기하기에 이른다. 큰 충격을 받은 그의 엄마는, 다시는 그에게 그런 짓을 하지 말라며 그를 때리지만, 그는 계속해서 할 수밖에 없다고 대답한다. 그는 무엇을 느끼려고 했던 걸까? 무엇을 느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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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W의 The Great Destroyer 9번 트랙 ‘When I Go Deaf’는 청각을 잃었을 때를 상상하며 부르는 노래이다.
내가 귀가 먹어도
전혀 신경 안 쓸 거야
난 괜찮을 거야
전혀 문제없어밤새도록 밖에서
하늘만 바라볼 거야
내 시력은 남아 있을 테니까
그래, 내 눈은 여전히 있을 거야그리고 우리는 사랑을 나눌 거야
싸울 필요도 없고
말할 필요도 없고
거짓말할 필요도 없을 거야
그리고 나는 노래 쓰기를 멈출 거야
가사를 긁어내는 것도 멈출 거야
생각할 필요도 없고
운율을 맞출 필요도 없을 거야2
이 노래를 들으며 드는 생각은, (1) 노래를 쓰고, 가사를 긁어내는(scratching out lines) 일이 너무나도 고통스럽다. (2) 때때로 존재는 부재보다 힙겹다는 것이다. 귀가 들리지 않게 된다는 것은, 결국 음악을 하지 않게 되었을 때를 가정한 것이 아닐까. 그들을 존재케 했던 것도 예술이지만, 그들을 힘겹게 만들었던 것 또한 예술이었던 셈이다. 2022년, 난소암 투병 끝에 세상을 떠난 미미 파커의 목소리가 가사의 아픔을 더한다. 나는 이 곡이 그녀의 추모곡인 것만 같다.
누군가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으로 치환한다는 것은 타인의 아픔을 헤아리기 위함일 때도, 반대로 자신의 아픔을 헤아리기 위함일 때도 있다. 아픔을 가장 정확히 측정하는 단위는 아마도 ‘나만큼’이기 때문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