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일 동안의 스페인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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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렘보다는 불안한 마음으로 새벽 4시에 눈을 떴다. 등 전체를 감쌀 정도로 기다란 여행 가방과 금방이라도 터질 듯 빵빵한 보조 가방을 앞뒤로 메고, 공항으로 가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걱정과 다르게 공항은 한산했고, 출국까지는 시간이 꽤 남았기에 파리바게뜨에서 빵과 커피를 먹으며 잠시 한숨 돌리고 있었다. 그런데 웬걸, 노래를 들으려고 에어팟을 꺼냈더니 한쪽 이어팁이 빠져 있었다. 환전소 직원과 대화하기 위해 급하게 이어폰을 귀에서 빼 주머니에 넣었던 것이 떠올랐다. 평소 같았으면 투명하고 작은 물체를 찾을 생각조차 하지 않았겠지만, 15시간의 비행을 앞두고 있던 나에게는 일생일대의 위기로 느껴졌다.

어떻게든 찾아야겠다는 생각에 반쯤 남은 커피번을 재빨리 입에 쑤셔 넣었다. 마약탐지견이 된 마냥 바닥을 이리저리 쳐다보며 환전소부터 걸어온 길을 되짚었다. 때마침 직원들이 바닥 청소를 하고 있었기에 눈과 발걸음은 바쁘면서도 마음은 반쯤 포기한 상태였다. 20분쯤 둘러보았을까, 건물 구석에서 흰색의 작은 물체를 발견했다.

발견한 위치에서 짐작했듯, 내가 잃어버린 이어팁은 아니었다. 아마도 나와 비슷한 이유로 떨어뜨렸을 누군가의 것이었다. 지갑이거나 여권이었다면 분명 분실물 신고를 했을 테지만, 이 경우에는 설령 신고를 한다고 해도 받아주지 않을 것이다. 빠르게 합리화를 마치고 화장실에서 꼼꼼히 그것을 씻어 나의 이어폰에 꽂아 보았다. 다행히 잘 맞았다. 이어팁을 결국 찾지 못한 채 비행기를 탔을 누군가에게 연민과 감사의 마음을 보내며, 잃어버린 게 고작 이어팁이라는 데에 안도감을 느끼며 출국 수속을 마치고 비행기에 올라탔다.

15시간의 비행은 끔찍할 정도로 지루했다. 책을 두 권이나 읽었고(요즘 나의 한 달 독서량에 맞먹는다), 미리 받아놓은 시리즈 「더 스튜디오」도 거의 다 보았다. 잠깐 옆으로 새어 책과 드라마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쇼샤』는 히틀러의 침공을 앞두고 폴란드에서 불안한 삶을 영위하는 유대인 작가를 다룬 소설인데, 주인공은 일생일대의 기회를 몇 번이나 차 버리고 스스로 불행을 택하곤 하는 고집(혹은 신념)이 강한 인물이다. 심지어 히틀러의 폴란드 침공을 앞두고도 자신의 고향에 남기로 결정하는데, 당대 폴란드에 남았던 사람들의 심리—결연함, 불안, 혹시 하는 마음 비슷한 것들—를 간접적으로나마 느낄 수 있었다. 주인공 그 자신이 신체적 결함을 가졌던 『그녀를 지키다』와 달리, 주인공이 사랑하는 소녀가 정신적·신체적 성장이 멈춘 인물로 등장하는데, 남들은 이해하지 못하는 독특하고 비합리적인 사랑의 형태를 그려냈다는 점에서 더욱 마음이 동했다. 『벌집과 꿀』은 다른 시간, 다른 장소에 흩어져 살고 있는 한국계 디아스포라들에 대한 이야기를 엮어낸 단편 소설인데, 덤덤하면서도 읽는 맛이 있었다. 「더 스튜디오」는 스크린 뒤에 있는 제작자의 이야기를 다루는데, 마틴 스코세이지론 하워드 감독의 우스꽝스러운 연기를 볼 수 있어 즐거웠고, 폴 다노·조이 크라비츠·그레타 리·아담 스콧 등의 다양한 배우가 카메오로 등장하여 실제 업계 비즈니스를 더욱 생생하게 훔쳐보는 듯했다. 현장의 긴박함을 그대로 전달하기 위한 롱테이크 신이 많은 편인데, 가끔은 너무 정신이 사나워서 가학적이라는 생각마저 들었다.—한 줄 요약하자면, 비행기에서 한숨도 자지 못했다.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숙소로 향하는 택시에 무거운 몸과 짐을 실었고, 도착하니 호스트 Marina와 고양이 미카가 나를 반겨주었다.

예약 당시 나누었던 에어비앤비 채팅에서 그녀는 한국어를 공부하고 있다는 메시지를 보냈는데, 나는 “안녕하세요”나 “감사합니다” 정도의 인사말 정도를 배웠다는 정도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만나 이야기해 보니, 그녀는 6개월 넘게 주 2회 한국어 학원에 다니며 한국어를 진지하게 공부하고 있었고, 한국의 드라마와 음악을 나보다 더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이어 쑥스러워 하면서도 내심 자랑하는 투로 자신이 공부 중인 한국어 문제집을 보여주었고, 서울과 부산, 제주를 오가는 여행을 꼭 다녀오고 싶다고 말해주었다. 15시간의 긴 비행을 거쳐 도착한 바르셀로나 숙소에서 한국 노래를 들으며 한국 이야기를 하고 있는 기분이 생경했다. 전혀 다른 나라에 와 있는 기분이 들지 않았달까. 그만큼 그녀는 먼 나라에서 온 나를 환대해 주었고, 덕분에 즐겁고 편한 대화를 나누었다.

밤이 꽤 늦었지만 장시간 비행한 탓에 배가 고팠다. 근처 햄버거집에서 햄버거를 먹었는데 몹시 맛있었다. 특히 빵이 촉촉했고, 감자튀김은 죄책감이 들 정도로 짜고 맛있었다. 고양이 미카는 내가 숙소에 들어올 때마다 근처에 와서 내 손을 한 번 핥은 뒤, 만지라는 듯 엉덩이를 들이밀었다. 찹찹 물 마시는 소리도 몹시 귀여웠다. 그렇게 시차를 더한 24+8시간의 하루가 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