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일 동안의 스페인 (2)

피곤한 와중에도 6시가 되니 눈이 저절로 뜨였다. 한국과는 다른 온화한 날씨에 밖으로 나가 달리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고, 지친 몸을 억지로 끌고 나가 바르셀로네타 해변 근처를 뛰었다. 해가 뜨기 직전의 바다 풍경이 아름다웠고, 새벽까지 음악을 틀어 놓고 술을 마시는 사람과 하루의 시작을 달리기로 여는 사람이 공존했다. 그 풍경이 묘해서 현실 감각을 더욱 무디게 만들었다.

숙소로 돌아오니 고양이 미카가 하루를 시작하는 듯 스트레칭을 하고 있었다. 나 또한 정신을 깨워줄 커피가 간절했다. 이곳의 카페는 일찍 여는 곳이 그렇게 많지 않은 듯하다. 다행히 근처에 테이크 아웃 전용 카페가 있어 발걸음을 향했다. 카페 문을 여는데 커다란 개 한 마리가 기다렸다는 듯 탈출을 감행했고, 주인이 그를 붙잡기 위해 곧이어 거리로 뛰쳐나갔다. 왠지 나의 잘못인가 싶어 사과했더니 “개를 붙잡아두는 건 자신의 책임이니 미안할 필요가 없다”라고 말했다(카페 주인이 통역을 도와주었다). 그리고 내가 시킨 코르타도를 카탈루냐어로 어떻게 부르는지(tallat) 알려주었다. 당시엔 이걸 왜 알려주는 걸까 의아해했는데, 최근 독립 시도까지 있었을 정도로 구분된 정체성을 갖고 있다는 이야기를 나중에야 듣게 되었다. 카탈루냐어는커녕 스페인어도 하지 못하는 나는 탈리얏-이라는 단어를 몇 번 따라 해 보고는 인사를 하고 밖으로 나와 해변가를 마주 보는 벤치에 앉았다. 해가 어느덧 완연히 떠올랐고, 바다 근처로 사람들이 하나둘 모이고 있었다.

작은 크루아상 하나로는 부족해 샌드위치 가게에 들렀다. 샌드위치를 주문하는데, 직원이 자꾸 나에게 비키니?라고 되물었다. “왜 갑자기 수영복 이야기를 하는 거지”라고 생각했지만, 일단 알겠다고 하고 기다리니 아주 평범한 샌드위치를 내어주었다. 알고 보니 bikini 샌드위치는 햄 치즈 샌드위치를 뜻하는 말이었다. “햄 치즈”라고 나에게 말해주었다면 참 좋았을 텐데. 이런 경험을 몇 번이나 더 하고 나서야 이곳 사람들이 영어를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처음으로 향한 곳은 사그라다 파밀리아 대성당이었다. 생각보다 가까워 조금 일찍 도착했는데, 근처는 이미 관광객들로 붐비고 있었다. 사진이 잘 나올만한 곳마다 줄이 길게 늘어져 있었고, 거리는 마주 오는 사람과 나란히 걷는 사람으로 가득해 어디론가 휩쓸려 가는 듯했다. 와중에도 성당은 미려한 곡선을 지니면서도 날카롭고 위엄 있는 모습으로 그 위용을 뽐내며 나에게 경건함과 놀라움을 느끼도록 요구하고 있었고, 나는 기꺼이 응할 수밖에 없었다. 내부는 더욱 장관이었다. 사방에 위치한 스테인드글라스로 들어오는 햇빛이 제각각의 색으로 변하여 성당 내부를 비추었고, 무엇 하나 허투루 만들어지지 않았다는 걸 곧바로 수긍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위대함 만큼 사람 또한 득실거렸으므로, 얼마 안 되어 지쳐버린 나는 사진을 몇 장 찍고 도망치듯 바깥으로 나왔다.

성당 구경을 마치고 구엘 공원으로 향했다. 가는 길에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파는 곳이 있다 하여 지체 없이 향했다. 이렇게 온화한 날씨임에도 따듯한 커피를 마시는 사람들이 새삼 신기했다. 한겨울에도 멈추지 않는 한국인의 아이스 아메리카노 사랑은 진화론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논거 중 하나가 아닐까. 공원을 한 바퀴 걸은 뒤 나무그늘이 있는 벤치에 앉아 잠시 낮잠을 잤다. 사람들은 책을 읽거나 가족들과 즐겁게 대화 나누며 토요일 오후를 보내고 있었다.

피카소 미술관에도 다녀왔다. 엘 그레코벨라스케스 등의 작품을 재해석하면서 그린 습작과 작품들이 과연 볼 만했다.

카탈루냐 음악당에서 베토벤 운명 교향곡 공연을 보았다. 온몸으로 연주하는 첼리스트와 발을 소리 나게 구르면서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는 지휘자의 열정이 멀리서도 눈에 띄었다. 악단은 젊은 연주자부터 머리가 희끗한 어르신까지 다양했는데, 특히 나의 아버지 세대로 보이는 바이올린 연주자를 보며 과연 그의 하루는 어떨지 궁금해하기도 했다. 일어나 밥을 먹고, 합주 연습을 하고, 점심엔 산책을 조금 하다가 남은 연습을 마친 뒤 집으로 돌아와 가족들과 하루를 마무리하는 일상이려나. 아니면 생계를 위한 다른 직업을 갖고 있으려나? 연주하는 와중에 그의 표정은 시종일관 몰두해 있었고, 행복해 보였다. 아무튼 시간이 남아 급하게 예매한 공연이었지만 꽤 만족스러웠다. 다만 연주 도중 누군가가 무려 10분도 넘게 은박지로 된 사탕 껍질 비슷한 무언가를 손으로 만지작거려서 심히 거슬렸는데, 다행히 주변 사람이 주의를 주어 진압(?) 되었다. 도대체 왜 이런 곳에서 사탕 껍질을 만지작대는 걸까? 짜증만큼의 궁금함이 들었다. 도대체, 왜…?

숙소에 도착하니 호스트 마리나가 하루를 마무리하고 있었고, 우리는 2시간 정도 못다 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녀가 사는 집은 국가 차원에서 보호 지정되어 있을 정도로 역사가 깊은 건물인데, 그런 건물에 사는 그녀가 언젠가 한국에 살고 싶어 한다는 게 새삼 신기했다. 그녀는 한국어 듀오링고를 하러, 나는 쏟아지는 잠을 해결하기 위해 이른 작별 인사를 건넸다. 그렇게 바르셀로나의 이틀이 순식간에 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