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일 동안의 스페인 (3)

발렌시아로 향하는 날. 트레이닝복 바지에 시계를 넣어놓고는 숙소에 두고 나왔다고 착각하여 아침부터 진땀을 뺐다. 길거리 한복판에서 짐을 헤집느라 시간을 허비한 탓에 커피 한 잔도 마시지 못하고 기차역으로 향해야 했다. 당연히 모든 전광판이 스페인어로 되어 있었고, 출발 시간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알자 머리가 새하얘졌다. 위기를 느끼면 낯짝이 두꺼워지는 법. 상주하는 직원과 주변에 있던 스페인 할아버지에게 손짓 발짓을 해 가며 길을 물었다. 특히 할아버지는 내가 묻기 전부터 도와줄 마음으로 나를 주의깊게 살펴보았는데, 정말 감사하게도 영어로 대답을 해 주었다. 우리는 서로 어디서 왔느냐, 바르셀로나에서 무엇을 보았느냐 같은 짧은 대화를 나누었고, 그에게 다시금 고맙다는 인사를 전했다. 무사히 기차에 탑승하고 나니 창밖에 펼쳐진 비현실적으로 좋은 날씨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짐을 풀고 투리아 공원 (Turia Gardens)으로 향했다. 직선 길이가 8km 정도 되는 길쭉한 공원인데, 이곳 사람들은 공원에서 달리기·자전거·요가·댄스·인라인 스케이트 등 온갖 야외 활동을 즐긴다고 한다. 겨울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덥고 화창한 날씨여서 이곳이 과연 현실에 존재하는 곳인가 진지하게 의심이 들었다.

발렌시아의 지역 축제에도 다녀왔다. 각각의 마을에 협동 조합(?)이 정기적으로 소규모 축제를 연다고 한다. 축제는 온갖 종류의 올리브·향신료·고기·초콜릿·타로카드 등 다양한 음식과 액세서리로 가득했다. 특히 우리에게 여러 종류의 김치가 있는 것처럼 저마다의 방식으로 담근(?) 올리브를 팔고 있었는데, 그중 후추향이 알싸하게 느껴지는 올리브는 여행만 아니었다면 한가득 포장하고 싶을 정도로 맛있었다. 800ml는 족히 되어 보이는 거대한 샹그리아는 달콤시원해서 여행의 긴장을 한순간에 풀어주었고, 소시지는 짰지만 맛있었다. 숙소 체크인을 하고 8시도 안 되어 바로 곯아떨어졌다.
2/9

이번 한 주는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공유오피스에서 일을 한다. 오피스에 도착하니 직원들이 친절한 미소로 맞이해 주었고, 칠판에는 한국어로 쓴 환영 인사가 적혀 있었다. 자리에 앉아 오랜만에 노트북을 꺼냈는데 키보드를 두드리는 감각이 영 익숙치 않았다. 화장실에 들어갔는데 문이 4개로 되어 있어 깜짝 놀랐다. 성중립 화장실인 듯했다(그럼 나머지 하나는 뭐지?). 다양성에 따라 칸이 나누어져 있으면서도 손을 씻는 건 하나의 공간으로 해두었다는 게 신기하고 의아했다.

식사는 근처 샌드위치 가게에서 가볍게 때웠다. 보통 2시부터 시작하는 이곳의 점심 식사 시간이 영 적응이 되지 않았다. 그러나 나쁜 건 빨리 배운다고 했던가. 나도 그들처럼 더 이상 신호를 지키지 않고 빨간불에도 아무렇지 않게 길을 건넜다. 이곳의 사람들은 신호를 규칙이 아닌 제안(Suggestion) 정도로 생각한단다. 그도 그럴 것이, 한국처럼 차가 많지 않아서 초록불이 될 때까지 기다리는 게 오히려 불합리해 보일 때가 많다. 보행자뿐 아니라, 차도 슬금슬금 눈치를 보다가 빨간불에도 사람이 없으면 신호를 무시하고 달린다. 처음엔 나름 합리적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신호 하나를 건널 때마다 눈치를 살펴야 하는 게 갈수록 피곤했다. 또한 ‘적당한 눈치’라는 게 사람마다 다른 법이어서, 차가 버젓이 오고 있음에도 일단 건너고 보는 사람들이 있어 굉장히 위태로워 보일 때도 많았다.

미뤄둔 빨래를 했는데 8유로가 들었다. 당시 한국 환율로 따지자면 14,000원 정도인 셈이다. 동전의 무게가 왠지 더 무겁게 느껴졌고, 한국이 조금 그리웠다. 빨래를 마치고는 공원을 뛰었다. 이곳 발렌시아는 마라톤 세계 신기록이 종종 세워질 정도로 달리기 좋은 도시인데, 그래서인지 투리아 공원 안에는 자전거 도로처럼 러닝 전용 도로가 있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정말 많은 사람들이 공원을 달리고 있었고, 그들 중 하나가 되고 싶다는 마음에 꽤 오랜 시간을 달린 뒤 집으로 돌아왔다.
2/10
아침마다 골든을 들으며 하루를 시작하고 있다. 근처 학교에서 아침마다 학생들에게 틀어주는 듯하다. 어제와 같은 시간에 일을 시작하고, 어제 갔던 카페에서 샌드위치를 먹었다. 점심 시간은 2시부터라지만, 카페는 오전 10시부터 사람들로 붐빈다. 이 사람들은 언제 일하고 언제 쉬는 건지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 잠시 이곳에서 오래 거주하는 삶을 상상해 보았다. 이제는 좋은 점 말고 안 좋은 점도 냉정하게 나열해 볼 정도로 이곳에 익숙해졌다. 당장은 어렵겠다는 생각에 다다르면서도, 하나의 다른 가능성을 열어두는 일은 언제나 즐겁고 설레는 법이다.

편의를 봐 주어서 일찍 일을 시작하고 오후 4-5시에는 다시 여행자의 신분으로 이곳을 구경할 수 있다. 한국보다 묘하게 더 집중이 잘 되었는데, 단순히 놀고 싶어서 그런 건 아니다. 환경도 새롭고, 떠들 사람도 없고, 여기까지 와서 딴짓 하고 싶지도 않았다. 일을 무사히 마치고 러닝도 할겸 발렌시아 대성당과 세라노스 탑을 구경하러 다녀왔다. 20도의 날씨여서 운동을 할 때에는 반팔 반바지도 덥다. 이곳에 와 탄수화물을 너무 많이 먹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집에 오는 길에 아침을 대신할 사과를 샀다.
2/11

예전부터 다른 나라의 영화관에서 영화 보는 걸 해 보고 싶었다. 이번 스페인 여행에서 내가 보고 싶었던 영화는 「마티 슈프림」. 즐겨 듣는 영화 팟캐스트의 에피소드로 올라왔지만, 한국에서는 개봉 소식이 좀처럼 들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표님이 먼 나라까지 와서 영화를 보고 싶다는 나를 이해하지 못하겠다며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근처의 예술 영화관을 추천해 주었다. 또한 내가 놓쳤던 사실이 하나 있었는데, 대부분의 스페인 영화관은 더빙판을 상영한다는 것이다. 몇몇 예술 영화관만이 ‘특정 시간대에’ 원어로 된 영화를 상영한다는 사실을 몰랐다면 제대로 허탕을 칠 뻔했다. 영화표는 4.9유로인데, 빨래방의 절반 정도 되는 가격인 셈이다. 스페인에서 무엇이 싸고 무엇이 비싼지에 대한 기준이 한국과는 많이 다르다는 걸 또 한 번 느꼈다.

결과는 대만족. Cines Babel은 외관부터 상영관 내부까지 보기 좋게 꾸며져 있었고, 한국과는 제법 다른 영화 관람 문화를 구경하는 재미가 대단했다. 기억에 남는 것들을 적어 보자면,
- 좌석을 고를 수 없고, 선착순이다(찾아보니 이곳만 그렇다고 한다).
- 이 사람들은 어디서나 수다를 좋아하는 듯하다. 영화 상영 전후로는 너나 할 것 없이 큰 소리로 떠든다.
- 웃음에 관대하다. 유머러스한 장면이 나오면 다같이 한바탕 웃음을 터뜨린다.
- (영화의 맥락과 관계 없이) 아기·동물이 나오면 여기저기서 귀여워하는 감탄사가 들린다.
- 일반 상영임에도 영화가 끝나면 다같이 기립박수를 친다.
한국의 관객보다 감정을 더 적극적으로 표현하는 그들을 이방인의 신분으로 지켜보는 경험이 꽤 즐거웠다. 스페인에 다시 온다면, 영화관에 꼭 들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