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일 동안의 스페인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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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 사람들이 많이 먹는다는 tortilla de patatas를 먹었다. 스페인식 감자 오믈렛인데 그냥 그랬다. 어제부터 바람이 많이 분다. 스페인에 처음 왔을 때 오렌지가 주렁주렁 열린 나무들을 보고 신기해했는데, 오늘따라 바닥에 떨어져 있는 오렌지를 많아 보여 최대한 피해서 걸었다.

일을 슬슬 마치려는데, 한 외국인이 나에게 ‘한국에서 오셨어요?’라고 한국말로 물어왔다. 잘못한 건 없지만 괜히 정체를 들킨 것처럼 흠칫 놀랐다. 그녀의 한국 이름은 문보라. 한때 수원에 살며 기아 자동차에서 일을 한 적이 있다고. 지금까지 9개국을 돌아다녔으며, 이곳 발렌시아에 온 지는 3년 정도 되었다고 한다. 내일 보자며 한국어로 인사했지만, 그녀는 금요일에 출근하지 않았다(부러웠다).

2024년에 ‘세계에서 가장 맛있는 햄버거’로 뽑혔다던 버거 가게에서 햄버거를 먹었다. 기준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으나, 과연 명성에 걸맞게 맛있었고, 사이드로 나오는 폭립(?)도 아주 달달하고 부드러웠다.

이곳의 햇빛은 너무 강해서 사진으로 찍으면 주황빛이 돈다. 평평하고 잔잔한 지중해를 보고 있자니 배를 타고 저 바깥으로 나가면 낭떠러지인 줄 알았다던 옛사람들의 마음이 십분 이해되었다.

호아킨 소로야 미술관에도 다녀왔는데, 호아킨 소로야를 비롯한 스페인 화가들의 전통적인 그림들로 가득했다(심지어 무료이고, 사람도 없었다). 스페인의 전통 의상, 아직도 여행지로 유명한 장소들을 화폭에 담아낸 풍경화, 지역마다 다른 성격의 사람들을 그린 인물화 등을 보며— 그들이 그들 서로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엿보는 재미가 있었다.

근처 골동품점에도 들러 잡동사니를 구경했다. 접시가 마음에 들었지만 여행을 더 힘들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핸드폰에는 3일 뒤에 타기로 되어 있었던 세비야행 기차의 운행이 취소되었다는 알림이 와 있었고, 이미 다른 기차와 비행기는 엄청나게 비싸져 있었다. 하는 수없이 12시간이나 걸리는 버스를 예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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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점점 거세지더니, 오늘은 재난 문자가 여러 번 울려 나를 놀라게 했다. 그래도 숙소에만 있기 아쉬워 공원에 가 뛰었다. 큰 나무들이 활처럼 휘어지는 와중에도 달리는 사람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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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렌시아의 마지막 날. 이모와 엄마에게 영상 통화를 걸어 한국과는 딴판인 투리아 공원의 초록 초록한 풍경을 보여주었다. 서로의 말이 5초 뒤에 들려서 대답을 하면 질문이 날아왔고, 질문을 하면 대답이 도착했다. 그렇지만 우리가 떨어져 있는 거리에 비하면 5초라는 시간도 참 신기하지 않은가.

선선하고 좋은 날씨에 공원을 뛰어다니는 사람들을 보니 나도 덩달아 뛰고 싶어졌고,, 커피를 한 잔 마시고 나서 숙소에 돌아와 운동복으로 갈아입고 다시 나오는 수고스러움을 감수하며 공원을 달렸다. 나에게 있어 발렌시아는 달리기를 위한 도시 같았고, 있는 동안 그 분위기를 만끽하고 싶었다.

알고 보니 발렌시아가 빠에야의 고장이라더라. 나름 짭조름하고 맛있었지만, 나는 샤브샤브를 먹고 계란과 함께 비벼 먹는 죽이 더 좋다.

베네치아를 그대로 재현해 놓은 수상 도시에도 다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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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3시 버스를 타고 세비야로 향했다. 꼬박 12시간이 걸렸는데, 비행기를 탔다면 한국에 도착할 수 있는 시간이다. 옆자리에 마음씨 좋은 아주머니가 휴게소에서 쉴 때마다 나에게 몇 분을 쉬는지 손가락으로 알려주었다(스페인어는 무려 30을 셀 때까지 불규칙해서 외우기가 불가능에 가깝게 느껴진다). 세비야 숙소에 도착하니 어느덧 오후 4시가 되어 있었다. 숙소는 촬영 스튜디오로도 쓰이는 곳이었는데, 내가 묵은 숙소 중에 가장 넓고 특이했다. 근처 케밥집에서 케밥을 먹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세비야에서 먹은 음식 중 가장 맛있었다.

피곤을 무릅쓰고 이사벨 다리랑 스페인 대성당을 구경했다. 집에 오는 길에 맥도날드에서 아이스크림을 포장했는데, 내 주문번호를 늦게 알아챘더니 직원이 잔뜩 짜증 난 얼굴을 하고 있었다. 691번을 어떻게 알아듣겠는가… 늦게 알아차려 미안하면서도 조금 억울했고, 버스 옆자리에 앉았던 아주머니가 괜히 그리웠다. 녹초가 되어 숙소에 와서 한국에서는 볼 수 없었던 「파고」 시즌 1을 보기 시작했다. 노트북 스크린 위로 인물들이 대사를 읊는 모습을 쳐다보고 있자니 심신의 평화가 찾아왔다. 누군가는 여행지에 와서도 노트북 화면을 쳐다보는 걸 시간 낭비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나에게는 방전된 에너지를 충전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다(결국 스페인에서 시즌 2까지 보고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