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일 동안의 스페인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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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지막이 일어나 과달키비르 강을 달렸다. 강은 잔잔하고 넓어서 이름도 모르는 수상 스포츠를 마음껏 즐기고 있었다.

2/17

오전에는 한국인 가이드의 세비야 대성당 관광을, 오후에는 에어비앤비로 예약한 현지인 가이드의 유대인 지구 관광이 있는 빡센 하루였다. 하루종일 세비야의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도시에 얽힌 여러 이야기들을 들었는데 아마 콜럼버스에 대한 이야기가 절반이었고, 가장 기억에 남는 건 공영주차장 한 켠에 자리잡은 어느 유대인의 묘였다. 에어비앤비 가이드는 영어로 진행되었는데, 가이드가 영어를 구사할 때 스페인어를 섞어서 말하느라 영어도 간신히 알아듣는 나로서는 알아듣기가 굉장히 힘들었다. 세비야의 마지막 날이었지만, 피곤한 나머지 해가 지기 전에 숙소에 들어와 푹 쉬었다.

2/18

세비야에서 말라가로 이동하는 날. 아침에 강가를 40분 정도 뛰고 나서 기차역으로 향했다. 기차는 아주 당연하다는 듯 20분 늦게 도착했고, 왜인지 모르게 도착은 50분이나 늦었다. 말라가의 햇살은 그 어느 도시보다 강렬해서 선글라스를 끼지 않으면 눈이 곧바로 나빠질 것만 같았다. 썩 나쁘지 않은 콩 수프를 먹고 숙소에서 잠시 숨을 골랐다. 오후에는 에어비앤비 타파스 체험이 예약되어 있었다.

호스트는 「아파트 이웃들이 수상해」에서 조이 역으로 등장했던 안드레아 마틴을 닮은 유쾌한 여성 분이었고, 네덜란드에서 온 가족이 함께 참석했다. 호스트는 능숙한 솜씨로 우리를 맛집에 데려다 주었고, 이른 시간임에도 가는 곳마다 사람이 가득했다. 그곳에서 먹은 술과 음식의 맛이 과연 훌륭해서, 술을 조금밖에 하지 못하는 것이 아주 오랜만에 안타까웠다.

두 번째로 향한 식당이 스페인의 유명한 영화 배우 안토니오 반데라스 소유라고 말해주었는데, 내가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을 좋아한다고 하자 눈이 번뜩이더니, 식당 벽면에 있는 여러 영화인들의 사인과 사진을 따로 보여주었다. 말라가에서 개최되는 영화제에도 꼭 방문할 것을 권했는데, 과연 그런 날이 올 수 있을지 모르겠다. 네덜란드 부부는 혼자서 온 내게 다정히 말을 붙여주었고, 내 영어 실력은 그들의 다정함에 보답하기에는 살짝 모자라서 못내 아쉬웠다.

2/19

말라가의 공유 오피스로 출근해서 일했는데, 유리창 너머 보이는 풍경이 예뻐서 일할 맛이 났다. 발렌시아의 공유 오피스에서는 커피 한 잔 당 1유로를 내야 했는데, 이곳은 공짜여서 두 잔을 마셨다.

말라가 해변을 구경할 겸 달렸다. 처음엔 길이 불편했는데 3km 정도 지나니 뛰기 편한 해변 도로가 쭉 이어졌다. 유독 외관이 독특한 건물이 많았는데, 부자들의 별장이 그렇게 많단다.

저녁으로는 태국 음식점에서 팟타이를 먹었다. 직원이 내가 아시아인 걸 보고는 젓가락을 챙겨 주더니, 매운맛을 원하는지 물어보았다. 딱히 매운 음식을 먹고 싶지는 않았지만 그의 배려에 응해야 할 것 같아 high spicy로 주문했다. 진라면 순한 맛보다 안 매웠다. 자기도 매운맛을 좋아한다는 등 가벼운 이야기를 주고받고 나서 기분 좋은 마음으로 나왔다. 이제 슈퍼마켓에서 긴장하지 않고 물건을 살 수 있다.

2/20

에어비앤비 호스트에게 추천받았던 말라가의 전통 시장에서 생선 튀김을 먹었다. 구글맵에 한국인의 칭찬이 가득했는데 그냥 그랬다. 내가 구글맵 음식점 평점을 보면서 느낀 건, 여행지에서는 음식의 맛보다 직원의 친절함이 별점을 좌우한다는 것이었다. 낮은 별점과 함께 적힌 후기를 보면 주문을 제대로 받아주지 않았다거나, 미스커뮤니케이션이 있어 돈을 더 지불해야 했다거나, 종업원이 불친절했다는 내용이 음식의 맛보다 더 많았다. 반대로 말하면, 별점이 높다고 해서 맛이 보장된 식당은 아니라는 거다.

날씨가 너무 좋아 걷다가 벤치에 앉았다가를 반복하며 햇빛을 만끽했다. 바르셀로나의 피카소 미술관보다 이곳 피카소 미술관의 줄이 훨씬 길었는데, 입장하고 나니 바로 납득이 되었다. 그의 고향인 만큼 시기별 중요한 작품들이 가득했고, 공간도 훨씬 잘 꾸며져 있었다. 마침 큐레이터가 학생들을 데리고 투어를 하고 있길래 설명을 엿들으며 그들 무리와 따로 또 같이 전시실을 돌아다녔다.

건물과 사람과 풍경 구경을 잔뜩 하다가 숙소로 돌아와 쉬었다. 이번 여행에서 가장 기억하고 싶은 건 이곳의 온도와 습도와 바람과 햇빛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글을 쓰는 지금도 역시 그렇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