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몬느 드 보부아르의 『아주 편안한 죽음』을 읽고
“위험을 각오하고 죽음을 사유하느니 차라리 생각지 않는 편이 죽음을 견뎌 내기 쉽다” - Blaise Pascal
우리는 어쩌면 매 순간 죽음을 오해하며 살아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 책을 읽으며 그런 생각이 들었다. 보부아르는 병상에 놓인 어머니와 화해를 시도하면서, 동시에 죽음에 대해 덤덤하게 받아들이려 애쓴다. 그리고 그것은 번번이 실패한다. 그의 말을 빌리자면, 인간에게 죽음은 하나의 부당한 폭력에 해당1하기 때문이다. 책은 죽음이라는 무분별한 폭력 앞에 마주한 한 인간의 모습을 고스란히 드러냄으로써 그에 대한 깊은 애정과 경의를 표하고 있다.
자연스러운 죽음은 없다. 인간에게 닥친 일 가운데 그 무엇도 자연스러운 것은 없다. 지금 이 순간 인간으로 존재하고 있다는 것, 이는 그 자체로 세상에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다. 모든 인간은 죽는다. 하지만 각자에게 자신의 죽음은 하나의 사고다. 심지어 자신이 죽으리라는 걸 알고 이를 사실로 받아들인다 할지라도, 인간에게 죽음은 하나의 부당한 폭력에 해당한다.1
아버지가 돌아가신지 6년이 되어간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 나는 아직도 가끔씩 당신이 나오는 꿈을 꾼다. 생전에 그렇게 친밀하지 않았음에도, 병상에서 마주했던 마지막 9개월 남짓한 시간이 우리의 모든 세월을 보상하겠다는 듯이 내 마음 어딘가에서 거대하게 부풀었다. 당시의 나는 거의 모든 사람들과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진정한 슬픔은 입이 닫히고 출입이 멎는다‘2는 문장이야말로 나의 감정을 잘 표현해 주는 문장이라 생각하며, 애도일기나 아침의 피아노 같이, 누군가가 느꼈을 비슷한 감정을 담은 책을 읽으며 위안을 받았다. 시몬느 드 보부아르의 아주 편안한 죽음을 읽고 나니 6년 전의 감정이 다시금 새록새록 떠오른다.
아버지의 장례식장에서 들은 위로 중 나에게 큰 위로가 되었던 말은 자신의 슬픔에 대한 내밀한 고백이었다. 그가 자신의 슬픔을 내게 꺼내는 것이 얼마나 용기 있고 어려운 일인가를 잘 알게 되었기 때문이리라. 그것이 나로 하여금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라면 나의 내밀한 슬픔을 기꺼이 꺼내어 보여줄 용기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보통은 슬프다 말하면서 어느 정도 타인에게 기대려 한다. 그건 슬픔이 아니다. 진정한 슬픔은 입이 닫히고 출입이 멎는다. 그후 서서히 암흑을 가르며 물이 고이기 시작한다.2
푸페트는 신경이 날카로워진 상태로 지냈다. 나 역시 혈압이 높아 얼굴이 붉어진 상태였다. 우리는 엄마가 임종 직전까지 갔다가 다시 회복하는 상황이 반복되는 걸 보는 게 괴로웠다. 또한 그걸 지켜보면서 모순적 감정을 느끼는 우리의 처지로 인해 특히나 힘들었다. 고통과 죽음 사이에 경주가 벌어지는 가운데 우리는 죽음이 이기길 간절히 바랐다. 하지만 죽은 듯 잠든 엄마의 얼굴을 바라볼 때면, 우리는 시계를 매달아 둔 검은색 리본이 미미하게나마 움직이는지를 확인하게 위해 엄마가 입고 있는 하얀색 실내복을 걱정스러운 눈으로 조심스레 관찰하곤 했다. 이게 마지막 경련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위가 쪼그라들 정도로 괴로워하면서.1
물가에 앉으면 말이 없어진다. 그렇다고 말이 사라지는 건 아니다. 현자가 현자를 만나면 왜 말없이 차만 마시는 줄 이제 알겠다. 존재의 바닥에 이르면 거기는 고요이지 침묵이 아니다. ‘고요의 말’이 있다. 누가 어찌 살았던 그 평생은 이 말 한마디를 찾아 헤매는 길인지 모른다. 사실 누구나 구도자다.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