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국보》를 보고

인간보다 예술을 지상(至上)에 놓는 영화를 볼 때 느끼는 묘한 불쾌감이 있다. 그것은 혐오라기보다는 일종의 소외감에 가깝다. 예술의 선택을 받은 자는 우리와 같은 언어를 쓰면서도 전혀 다른 세계에 거주하는 것처럼 보이고, 그 앞에서 우리는 스스로가 무언가의 숙주, 혹은 범속한 것들에 묶인 존재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이러한 주제를 다루는 예술에는 지켜야 할 선이 있다. 가장 원형적인 방식은 이런 것이다. 예술을 얻되, 누구에게도 이해받지 못하는 외로운 삶을 살아야 한다. 반대로 말하면, 인생을 모두 내놓아야 우리는 예술에 선택된 인물을 향해 비로소 팔짱을 풀고 그의 이야기를 들어줄 용의가 생긴다는 것이다. 《국보》는 이 거래를 ‘악마와의 계약’이라고 노골적으로 부른다. 그리고 영화는 그 계약의 조항들을 하나하나 이행해 나가는 한 남자의 생애를 담담하게 좇는다.

영화는 시간을 자주 뛰어넘는다. 그 도약 속에서 집중하는 것은 오로지 한 예술가의 삶뿐이다. 전쟁이 끝나고, 시대가 바뀌고, 사람들이 늙어가지만, 그것들은 모두 키쿠오라는 인물의 주변부에서 희미하게 스쳐 지나갈 뿐이다. 영화는 키쿠오와 세상을 별개의 것으로 본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키쿠오 자신이 그렇게 보기 때문에 영화도 그의 시선을 따른다. 그에게 있어 가부키는 세상의 전부이며, 세상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는 정말로 중요하지 않다.

인간관계도 마찬가지다. 누군가가 그의 곁에 있다가 이내 사라지는 식이며, 영화는 그것을 구태여 해명하지 않는다(만약 영화의 스크린타임을 줄인다면, 이곳에서 더 줄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단짝이자 라이벌이었던 슌스케는 키쿠오의 재능에 벽을 느끼고 도망치고, 오랜 소꿉친구 하루에도 함께 떠난다. 그녀 역시 자신과는 다른 세계에 사는 키쿠오의 곁에서 외로움을 견디지 못한 탓이겠다. 인물 간의 갈등 구조가 다른 영화에 비해 느슨하거나 거친 면이 있는데, 이는 오히려 이 서사에 어울리는 설정이다. 키쿠오에게 그것들은 정말 중요하지 않았을 테니까. 아니, 일찍이 체념했다는 말이 더 어울릴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키쿠오에게 가장 소중한 존재가 누구였냐 묻는다면 단연 슌스케겠다. 그는 키쿠오가 세상에 발을 붙일 수 있게 해준 유일한 끈이었으며,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결국 서로야말로 서로를 의지할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된다. 슌스케는 키쿠오만큼의 재능은 없었을지 몰라도, 예술에 대한 갈망만큼은 키쿠오 못지않았다. 두 다리가 괴사해가는 와중에도 공연을 멈추지 않았을 정도니까. 가부키를 통해 같은 풍경을 바라보고 싶어했다는 점에서 둘은 서로를 가장 잘 이해하는 존재였을 것이다.

가부키는 철저히 가족세습적인 예술이다. 아버지의 예명(襲名)을 아들이 물려받는다. 야쿠자의 아들로 태어나 부모를 모두 잃은 키쿠오에게 가장 부족한 것은 혈통이다. 엄청난 재능을 지녔음에도 그는 천대받는다. 반면 슌스케는 재능은 부족할지언정 하나이 한지로의 피를 이어받은 정통 후계자다.

그러나 운명은 그렇게 일방적이지 않다. 결국 슌스케를 무대에서 내리게 한 것도 유전으로 인한 질병이었으니까. 이러한 몇 차례의 엎치락뒤치락은 우리네 인생이 결코 직선으로 흘러가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우리는 대개 영화를 볼 때 과정보다 결과가 변화 가능한 것으로 생각하지만, 끝에 가서 돌아보면 진짜 변화무쌍했던 것은 언제나 과정이다. 올챙이가 개구리가 되는 것은 정해져 있지만, 어떤 연못에서 어떤 계절을 보내느냐는 그때그때 다른 것처럼 말이다.

오스카 와일드는 “예술이 삶을 모방한다”는 통념에 반대하여 “삶이 예술을 모방한다”고 주장했다. 예술이 원형인 사람에게 삶은 모방과 추적의 연속이다. 키쿠오에게 세상의 모든 것은 가부키 위에 존재하고, 그 외의 것은 생각할 가치조차 없는 허상이다. 진정한 실재는 오직 무대 위에만 있으며, 현실의 인간관계와 욕망들은 그것의 그림자에 불과하다.

《국보》가 불쾌하면서도 아름다운 것은 바로 이 지점 때문이다. 영화는 키쿠오의 삶이 옳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이 거짓이라고도 말하지 않는다. 예술에 모든 것을 바친 이의 뒷모습은 쓸쓸하지만, 그 쓸쓸함 속에서 피어오르는 무대 위의 순간들은 부정할 수 없이 눈부시다. 마지막 무대에서 키쿠오를 감싸는 벚꽃은 무대 소품에 불과하다. 그러나 무대만이 세계였던 그에게, 그것은 그토록 찾았던 단 하나의 풍경이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