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국보》를 보고

인간보다 예술을 지상(至上)에 놓는 영화를 볼 때 느끼는 묘한 불쾌감이 있다. 그것은 혐오라기보다는 일종의 소외감에 가깝다. 소위 ‘예술의 선택’을 받은 자는 우리와 같은 언어를 쓰면서도 전혀 다른 세계에 거주하는 것처럼 보이고, 그 앞에서 우리는 스스로가 범속한 존재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리라.
이러한 주제를 다루는 영화가 으레 지키는 선이 있다면 이런 것이다. "그 인물은 누구에게도 이해받지 못하는 외로운 삶을 살아야 한다." 반대로 말하면, 인생을 모두 내놓아야, 우리는 예술에게 ‘선택 받은’ 인물을 향해 비로소 팔짱을 풀고 이야기를 들어줄 용의가 생긴다는 것이다. 《국보》에서는 이에 대해 ‘악마와의 계약’이라는 노골적인 대사로 거칠지만 확실하게 처리한다.

영화는 시간을 자주 뛰어넘는다. 그 도약 속에서 집중하는 것은 오로지 한 예술가의 삶뿐이다. 시대가 내포할 수 있는 모든 함의를 내팽겨치고, 오로지 키쿠오라는 인물에만 집중한다. 키쿠오에게 그것들은 전혀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세계 속의 개인이 아니라, 개인의 세계에 대해 다루는 영화다. 그에게 있어 가부키는 세상의 전부이며, 세상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는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
인간관계도 마찬가지다. 누군가가 그의 곁에 있다가 돌연 사라지는 식이며, 영화는 만남과 이별의 이유를 구구절절 해명하지 않는다. 다른 영화였다면 그의 곁에 잠시 머물렀던 3명의 여인에 대해 조금 더 설득력 있(어 보이)는 서사를 부여했을지도 모른다. 이처럼 국보는 인물 간의 갈등-해결 구조가 다른 영화에 비해 느슨하거나 거친 면이 없지 않은데, 이는 오히려 키쿠오라는 인물의 세계를 더 잘 드러낸다. 그를 설명하는 데 있어 그것들은 중요하지 않을 테니까.
슌스케에 대해서도 이야기하고 싶다. 키쿠오가 재능을 가졌다면, 슌스케는 피를 가졌다. 잠적의 기간이 있었지만, 결국 슌스케만큼 가부키(예술)에 대한 갈망은 키쿠오 못지않았다. 남은 다리마저 괴사해가는 와중에도 펼친 공연을 마지막으로 그를 퇴장시킨 것은 영화가 슌스케 또한 한 명의 예술가로서 바라보고 있다는 반증이겠다.

가부키는 철저히 가족세습적인 예술이다. 아버지의 예명(襲名)을 아들이 물려받는다. 야쿠자의 아들로 태어나 부모를 모두 잃은 키쿠오에게 가장 부족한 것은 혈통이다. 엄청난 재능을 지녔음에도 그는 천대받는다. 반면 슌스케는 재능은 부족할지언정 하나이 한지로의 피를 이어받은 정통 후계자다. 그러나 운명은 그렇게 일방적이지 않다. 결국 슌스케를 무대에서 내리게 한 것도 유전으로 인한 질병이었으니까. 이러한 몇 차례의 엎치락뒤치락은 우리네 인생이 결코 직선으로 흘러가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우리는 대개 영화를 볼 때 과정보다 결과가 변화 가능한 것으로 생각하지만, 끝에 가서 돌아보면 진짜 변화무쌍했던 것은 언제나 과정이다. 좋아하는 시의 한 구절1을 인용하자면, 올챙이는 개구리가 될 수밖에 없다.

오스카 와일드는 “예술이 삶을 모방한다”는 통념에 반대하여 “삶이 예술을 모방한다”고 주장했다.2 예술이 원형인 사람에게 삶은 모방과 추적의 연속이다. 키쿠오에게 세상의 모든 것은 가부키 위에 존재한다. 진정한 실재는 오직 무대 위에만 있으며, 현실의 인간관계와 욕망들은 그것의 그림자에 불과하다.
《국보》라는 영화가 가진 매력은 바로 이 지점이라고 생각한다. 영화는 키쿠오의 삶이 옳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이 거짓이라고도 말하지 않는다. 예술에 모든 것을 바친 이의 뒷모습은 쓸쓸하지만, 그 쓸쓸함 속에서 피어오르는 무대 위의 순간들은 부정할 수 없이 눈부시다. 마지막 무대에서 키쿠오를 감싸는 벚꽃은 무대 소품에 불과하다. 그러나 무대만이 세계였던 그에게, 그것은 그토록 찾았던 단 하나의 풍경이었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