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나의 과거의 총합인가
‘나는 나의 과거의 총합인가(엄밀히 말하자면 나는 과거가 만들어낸 존재인가)1‘에 대해 아직도 선뜻 답을 내리기 어렵다. ’다행히’와 ’안타깝게도’를 반복하며, 성공과 실패를 쉽게 정의하기 어려운 일을 겪으며, 대개는 도전이라고 부르기도 뭣한 어중간한 시도를 반복하며, 무언가에 대해 수동 공격적인 자세로 변호하거나 가끔은 편견들에 설득되어 고개를 끄덕이면서— 어디에서 어디론가 이동한 것만큼은 분명하다. 나름의 비장함이 감도는 시기도 있었고, 터무니없을 정도로 도박에 가까운 용기(혹은 내맡김)를 내보이는 일도 아주 가끔 있었던 것도 같다.
어떤 경험은 나의 다음 결정에 아주 큰 영향을 미쳤고, 어떤 경험은 아주 사소해서 영영 잊혔으며(그중 일부는 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나서야 떠오르기도 했다), 또 어떤 경험은 혹시라는 마음으로 다시 뛰어들었다가 역시나를 두 번 세 번 반복하기도 했다. 일련의 경험을 아주 구체적이면서도 사소한 숫자들로 변화를 가늠해 볼 수도 있겠으나, 그 효용은 결코 수고로움을 이기지 못할 테다(불행히도 많이 해 봐서 안다).
나름의 변화가 있다면, 나의 성격에 ’아직도’와 ’여전히’라는 꼬리표를 붙이는 일을 그만두는 중이다(그러한 시도야말로 ’아직도’와 ’여전히’에 어울리는 일일 것이다). 여전히 낯선 사람을 경계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충분한 사랑을 표현하지 못하고, 아직도 어딘가에 전념하기를 두려워하면서도 냄비에 담긴 물의 온도가 서서히 높아지는 것에 대해서는 미련하리만치 둔감하다. 어떨 때는 불안과 자기혐오에 못 이겨 나와 같은 사람들을 변호하는 책을 몇 권 읽었지만, 어디까지나 일시적인 진통제에 불과했다. 필요한 건 변화가 아니라 인정이었고, 어떤 인정은 변화보다도 힘들고 버거웠다. 물론 온전히 ’노력’으로 인한 변화라고 말할 수 있을 만큼 뿌듯하지는 않다. 개중에 대부분은 시간이 해결해 주었고, 아직 끝내 인정하지 못한 나의 모습도 못지않게 많이 남아 있다.
그럼에도 나는 제법 덜 불안하다. 조금 더 감사할 줄 안다. 그럼에도 좋아하는 일과 잘하는 일을 아주 조금 더 잘 구분할 줄 알고, 내가 저지른 실수에 대해 한 발 먼저 깨닫는다. 가끔은 말 대신 행동한다. 이러한 변화에 대해 과거에게 공을 돌리지 않을 수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본질이 실존에 앞서2는 우를 범하고 싶지는 않다. 과거를 만드는 것 또한 나이므로, 내가 과거의 총합이라기보다 과거가 나의 총합이라고 부르는 게 더 적절할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아주 가끔이지만, 세상은 나를 과거와 무관한— 전혀 다른 곳으로 데려다 놓을 때도 있으니까. 10년 전 대학가 술자리에서 한 번 보고 만 사람에게 받은 질문에 대해 이제야 (답까지는 못 되어도) 주장에 가까운 글을 작성할 수 있게 되어 속이 후련하다(변하지 않은 사실: 나는 제법 뒤끝이 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