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 키드와 안티 시트콤
뒤뚱뒤뚱 걷던 조카가 몇 년 전에 초등학교에 입학하더니 이젠 핸드폰까지 생겼다. 프로필 사진은 역시나 아이가 가장 좋아하는 포켓몬. 주말 아침에 전화를 했는데 이모가 빨리 낫게 기도하고 왔다고 한다. 아이는 나보다 더 멋지고 사려 깊은 어른이 되리라. 장난감을 갖고 노느라 바쁜 조카를 더 이상 방해하지 않기 위해 봄이 되면 같이 공원을 뛰기로 약속한 뒤 빠르게 전화를 끊었다. 조카의 기도 덕분에, 다행히도 이모의 수술은 무사히 끝났다. 모두가 똑같이 나이 든다는 게 불공평하고 무섭다.

이번 1월은 어느 날은 너무 춥고, 어느 날은 눈이 많이 내리고, 또 어느 날은 미세먼지 때문에 공기가 탁해 달리러 나가기가 귀찮았다. 눈이 오든, 한파가 찾아오든 일단 밖으로 나가 뛰었던 작년 이맘때를 생각하면 마음과 의지의 온도차가 여름과 겨울만 하다. 이날만을 기다려왔다는 듯 체중계의 숫자는 빠른 속도로 올라가기 시작했고, 그게 싫고 무서워서 사흘에 한 번은 귀찮은 몸과 마음을 억지로 일으켜서라도 나가 뛰었다. 요즘같이 추운 날에는 손가락과 발가락 마디마디가 얼어붙은 듯 감각이 없어지고, 속눈썹에 물기가 맺혀 시야를 가리기 일쑤다(마치 속눈썹이 처마가 되어 그 밑에 아주 작은 고드름이 맺히는 것만 같다). 그렇지만 겨울에도 쉽게 끓어오르는 마음의 화를 차갑게 식혀주어서, 한바탕 달리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어느 순간보다 개운하다.

겨울의 달리기가 좋은 이유가 하나 더 있다면, 느지막이 나가도 일출을 볼 수 있다는 점이다. 해가 강 맞은편 산봉우리 위로 떠오르는 시간은 대략 8시. 손이 시려도 기필코 사진을 찍지만, 항상 눈으로 담는 것보다 못하다.

《미틱 퀘스트》정주행을 마쳤다. 롭 매킬헤니를 비롯한 필라델피아는 언제나 맑음 제작진의 가장 큰 매력은 안티 시트콤1을 짜증 날 정도로 잘 소화해낸다는 점이다. 그들의 시리즈 속 인물은 하나같이 자기반성이 대단히 결여되어 있어 누구 하나에게 특별한 애정을 주기 힘들다. IT— 그것도 게임 회사를 다룬 나름의 장르물이라는 점, 인사이드 조크를 적절히 활용하여 그들을 로스팅하면서도 이따금씩 창작자에 대한 헌사를 보내며 그들을 치켜세운다는 점에서 적잖은 감동과 재미를 주었다. 극 중 포피 리 역할을 맡은 샬롯 닉다오의 우악스러운 연기가 좋았고, 《베터 콜 사울》에서 보았던 제시 애니스의 또 다른 매력을 발견하는 재미도 있었다. 《홈랜드》에서 손에 땀을 쥐게 했던, C.W 역의 F. 머레이 아브라함이 성추행 논란으로 극중 하차했는데, 그것 치곤 너무 아름답게(?) 보내준 것이 아닌가 싶었다. 시즌 1의 DQD2를 포함한 일부 에피소드의 작가로 참여한 롭 매킬헤니의 동생 케이티 맥킬헤니가 오빠와는 사뭇 다른 매력을 보여주어 다음 행보를 기대하게 만들었다. 그들 제작진이 자신들의 색을 지키면서 더 다양한 쇼를 제작해 주길 바라는 마음이다.

《빛나는 TV를 보았다》를 보았다. 중학교 시절, 밤 11시에 학원을 마치고 졸린 눈으로 새벽 1-2시까지 그날의 드라마를 다시 보기로 보고 나서야 잠에 들었던 TV 키드 시절의 내가 떠오르기도 했다. 《별나도 괜찮아》에서 자폐 스펙트럼을 가진 주인공의 동생 역할을 맡았던 잭 헤이븐이 반가웠고, 극중 오웬을 연기한 저스티스 스미스의 청소년부터 40살까지를 아우르는 몽환적인 분위기(‘파’에 가까운 목소리 톤이 그것을 더해주었다)가 인상 깊었다. 영화를 다 본 후에는 어릴 적 텅 빈 집에서 혼자 TV를 볼 때와 비슷한 느낌으로 등골이 서늘했고, 아직도 그 느낌이 사라지지 않는다.

리처드 링클레이터 감독의 《누벨바그》와 더불어 재개봉한 장뤽 고다르 감독의 《네 멋대로 해라》를 보았고(올해 최악의 영화!), 과거의 인물은 그 시대의 패러다임 안에서 이해해야 한다지만, 과연 어디까지 용인할 수 있는가에 대한 꽤 골치아픈 물음을 얻은 채 영화관 바깥을 나와야 했다. 과거에 재미있게 보았던 《국외자들》을 다시 보아도 비슷한 물음이 생기려나? 그렇다면 그냥 덮어두어야지. 아직 루브르 박물관을 뛰어보지 못했으므로.
대학원 진학을 포기하며 그만두었던 미술/예술사 공부를 조금씩 다시 시작하기로 한다. 준학예사 시험을 준비하며 풀었던 문제들을 다시 읽는데, 어렴풋이 떠오르면서도 전혀 모르겠는 문제들이 많다. 어떤 문장은 전혀 내가 쓴 것 같지 않다. 도서관에서 핼 포스터의 『실재의 귀환』을 빌렸고, 클레멘트 그린버그의 『[[예술과 문화]]』는 절판이 되었다고 하여 구할 방법을 찾는 중이다. 나는 왜 복싱장 안의 복서가 되고 싶어 하는 욕심을 버리지 못하는가?3 아주 오래된 의문이다.
친구들과 몇 년 만에 서소문성지역사박물관을 다시 들렀다. 특유의 고요한 분위기에 마음이 고요해졌다. 박물관 안에 도서관도 좋아 보였는데, 마음을 차분히 정리하고 싶을 때 들러도 좋을 것 같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