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춘기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로, 뒤뚱이며 걷던 조카가 어느새 무럭 자라 여러 어른의 손을 필요로 하기 시작한 이후로, 1년에 지내는 제사의 수가 늘어난 이후로, 몇 번의 결혼식이 치러진 이후로 임 씨네 여자 넷은 더 자주 만나기 시작했다. 엄마와 이모가 고등학생일 때 사촌 누나들이 태어났고, 사촌 누나들이 중학생일 때 내가 태어났다. 어제는 넷이 코스모스 구경을 하겠다며, 다짜고짜 내가 사는 동네까지 차를 몰고 찾아왔다. 코스모스는 비바람에 힘 없이 누워 있었다. 멀리서 보았을 때는 꽤 아름다웠지만, 가까이서 보면 안쓰러웠다.

조카가 또래 친구의 눈치를 보기 시작할 나이가 되었는지, 이제 학교에서는 사촌 누나와 손을 잡지 않으려고 한단다. 얼마 전까지 엄마가 화장실만 가도 애타게 찾던 아이는 얼마 지나지 않아 사춘기를 겪을 것이다. 사촌 누나는 나의 엄마에게 내가 사춘기를 겪었을 때 어땠는지 물어보았다. 엄마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했다. 나는 분명히 기억한다.

중학교 3학년 때 엄마의 엄마와 아빠, 그러니까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가 거의 동시에 돌아가셨다. 나의 사춘기는 엄마의 슬픔에 비할 것이 못 되었고, 엄마의 슬픔은 나의 사춘기보다 훨씬 더 길었다. 나의 사춘기 또한 덩달아 반항이 아닌 무기력의 형태로 변해갔고, 학교와 학원과 집을 가리지 않고 엎드려 잠을 잤다. 반면에 엄마의 사춘기는 그렇지 않았다고 한다. 이모의 증언에 의하면 엄마는 ‘싫어’를 입에 달고 살았고, 할머니에게 대들다가 혼쭐이 나기 일쑤였다고.

어릴 땐 혼란스러워하는 사춘기 시절의 나를 돌볼 겨를이 없던 엄마를 원망하기도 했던 것 같다. 적어도 이제는 엄마가 나에게 사춘기를 빚졌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서로 의지하면서, 대들면서, 먼저 떠난 사람을 기리고 가족의 탄생을 축복하면서, 불쑥 찾아 문을 두드리기도 하면서 함께일 수 있다는 것은 큰 축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