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22일의 33하고 44로운 이야기

나이키 블랙 레벨이 되어 앱의 그래프 색이 검정으로 변했다. 5,000km를 달렸다는 뜻. 올해 이루고 싶었던 목표 중 하나를 이뤘다. 마냥 뿌듯하여 하루에도 여러 번 앱을 껐다 켜기를 반복했다.

작고 소중한 1포인트..

가을 단풍으로 유명한 문경새재에서 열린 트레일 러닝 대회에 다녀왔다. 우리나라 트레일 러닝의 전설적인 심재덕 선수가 실제 훈련하던 코스라고 한다. 전날 공용 숙소에서 만난 분들과 가볍게 담소를 나누고 레디샷도 같이 찍었으나 다음날 대회에서는 만나지 못했다. 초반 10km 정도는 완연한 가을을 즐길 수 있는 완만한 코스였다. 바람이 불면 낙엽이 우수수 떨어졌고, 그럴 때마다 곳곳에서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본격적으로 주흘산을 오르기 시작하면서 감탄사는 곡소리로 변했다. 무릎을 허리춤까지 올려야 할 정도로 가파른 코스가 계속되었다. 1시간을 넘게 올라 가까스로 정상에 도착하고 나니 그제야 숨이 트였다. 날이 흐리고 길이 좁아 풍경을 제대로 감상하지 못했다. 내려오는 길은 크고 작은 돌덩이가 많아 자칫하면 발목을 접질리기 십상이었다. 땅만 보고 내려오는 데 집중하느라 코스를 잘못 들었는데, 다행히 뒤따라오던 분이 알려주어 무사히 도착지까지 길을 잃지 않고 내려올 수 있었다. 경기장 주변에는 단풍 구경을 온 관광객이 단풍만큼이나 많았다. 유명한 문경 사과 맛이 궁금했지만 차마 집까지 들고 갈 자신이 없어 씻고 부리나케 집으로 왔다. ITRA 포인트를 지급하는 첫 대회였는데, 점수를 쌓으면 50K, 100K를 달리는 대회 및 해외 대회에 신청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진다. 아직은 자신도 욕심도 없다.

진지함과 장난스러움을 동시에 가졌다

빈스 길리건의 신작 「플루리부스」를 기다리다 지쳐 「베터 콜 사울」을 오랜만에 다시 정주행했다. 극에 나오는 많은 배우들이 매력적이지만, 그중 킴 웩슬러 역을 맡았던 레아 시혼의 연기를 특히 좋아한다. 「베터 콜 사울」에서 킴 웩슬러는 억세고 정의감 가득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자신의 인생을 망칠지도 모를 만큼 무모한 장난을 벌이는 변호사로 등장한다. 상반된 면모를 가진 입체적인 캐릭터를 조금의 위화감 없이 표현해 내는 레아 시혼의 연기는 시리즈 내내 단연 돋보였기에, 그가 「플루리부스」에서 주연을 맡았다는 소식에 한참 전부터 방영을 애타게 기다렸다. 이번 작품 역시 빈스 길리건 사단의 광적인 디테일로 짜인 세계관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고, 잔잔하면서도 무언가 대단한 것이 다가오는 듯한 기대감을 주고 있다. 시즌 간격이 길기로 유명한 애플 티비에서 방영한다는 점이 나를 벌써부터 안달 나게 만든다는 점만 제외하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

올해의 모든 대회를 마치고 한껏 늘어진 일상을 보내고 있다. 곧 다음 3월에 있을 서울마라톤을 다시 준비해야 하기 때문에, 조금은 쉬어도 되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다. 그럼에도 마냥 달리기를 놓을 수는 없어 적어도 이틀에 한 번은 옷을 꽁꽁 싸매고 밖으로 나가 달렸다. 이맘때쯤의 아침 날씨를 정말 좋아하는데, 게으름쟁이에게도 관대하여 7시가 지나서도 멋진 일출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밤새 얼었던 풍경이 조금씩 녹아내리는 모습을 보는 것도 제법 즐겁다. 훈련하느라 보고도 지나쳐야 했던 광경을 마음껏 멈추어 찍어댔다.

씨네큐브 25주년 특별전이 한창이다. 그동안 놓쳤던 작품들을 극장에서 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였기에, 무리를 해서라도 가능한 많은 작품을 보려 하고 있다. 「하나 그리고 둘」과 「애프터 미드나잇」을 보았고, 오늘은 「멀홀랜드 드라이브」를 볼 예정이다. 비교적 최근 작품인 「왼손잡이 소녀」와 「마스터 마인드」도 보았는데, 션 베이커가 편집으로 참여했다는 「왼손잡이 소녀」는 보는 내내 아역 배우의 빵빵한 볼이 화면을 가득 채워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보았고, 켈리 라이카트의 「마스터 마인드」는 「퍼스트 카우」보다 한 발 더 물러서 주인공과 시대를 비추는 그 시선에 잔뜩 매료되었다. 켈리 라이카트가 이야기의 불씨를 지피는 발화점은 언제나 독특하고 절묘해서, 그것이 하나의 작품으로 탄생하여 스크린에 펼쳐진다는 사실만으로도 세상은 나의 비관보다 조금 더 살 만하다는 위로를 얻는다.

음악 모임에서 같이 이야기해 보면 좋을 것 같아 재미 삼아 만든 사이트를 여기저기 공유했는데, 그것이 발단이 되어 처음으로 외주를 맡게 되었다. 심리 상담 관련한 곳의 간단한 이벤트 사이트를 만드는 일이었다. 3일 동안 진행된 아주 짧은 작업이었음에도 배운 게 참 많았는데, 그중 대부분은 역시나 커뮤니케이션이었고, 나머지는 나의 부족함에 대한 새삼스론 깨달음이었다.

17박 18일 동안 스페인에 가게 되었다. 스페인에 사는 대표님이 비행기표를 끊어 주면 올 생각이 있느냐는 말에 대뜸 그렇다고 대답한 것이다. 적당히 느슨한 계획을 세워봐야지. 당장 떠오른 생각은 톨레도에 가야겠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