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식사로서의 미술사
양식이라 번역되는 ‘stil’, ‘style’은 라틴어의 스틸루스(stilus)에서 유래한다. 원래는 납끌판에 쓰는 철필을 가리켰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필적, 서법, 문체를 의미하게 되었다. 16~17세기에 걸쳐 이 말의 용법은 점점 확대되어 조형예술에도 사용되기 시작했다. 처음에 이 말은 예술가의 개인적 작풍을 의미하는 ‘마니에라(maniera)’와 동일시되었으나, 점차 예술의 ‘보편적인 관점 및 표현의 방식’으로서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Stil을 이러한 개념으로 정립하고 처음 미술사의 영역으로 가져온 인물이 근대 미술사학의 기초를 세운 빙켈만이다. 그는 고대 그리스·로마 미술을 분석하면서 개별 작가의 특성이 아닌, 시대와 지역에 따른 양식의 변천을 체계적으로 서술하고자 했다.
그러나 빙켈만 이후 약 한 세기 동안 미술사학에서 양식 개념은 중심적 위치를 차지하지 못했다. 19세기 전반 독일 학계를 지배한 것은 헤겔의 관념론 미학이었다. 헤겔은 예술을 ‘절대정신의 감각적 현현’으로 보았으며, 작품의 형식보다 그것이 담고 있는 이념과 정신적 내용을 중시했다. 이 관점에서 그리스 조각이 위대한 이유는 형태의 균형이나 비례 때문이 아니라, 인간 정신의 자유로운 이념을 구현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내용 중심의 사변적 접근에서 벗어나 양식사 연구의 불씨를 다시 지핀 것이 야코프 부르크하르트의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문화》(1860)이다. 부르크하르트는 추상적 이념이 아닌 구체적인 역사적 맥락과 문화 전체 속에서 예술을 파악하려 했으며, 이로써 양식의 역사적 변천을 실증적으로 연구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했다.
부르크하르트가 ‘무엇을 연구할 것인가’—즉 양식의 역사적 변천—를 보여주었다면, 그러한 연구가 ‘왜 정당한가’를 철학적으로 논증한 인물이 콘라트 피들러이다. 피들러의 순수 가시성 이론은 당시 지배적이던 헤겔식 관념론 미학에 정면으로 맞섰다. 그는 조형예술의 본질이 문학적 서사나 도덕적 메시지가 아니라, 눈으로 지각되는 형태 그 자체의 조직 방식에 있다고 주장했다. 가시적 표상의 구성만을 예술적 가치로 인정한 그의 이론은 조형예술의 자율적 법칙을 확립하려는 시도였으며, 이후 순수화를 지향하는 모던 아트를 논할 때도 여러 차례 인용되곤 한다.
피들러가 제공한 이 철학적 전제—형식 자체가 내용이나 이념과 독립된 고유한 예술적 가치를 갖는다는 것—위에서, 부르크하르트의 제자 하인리히 뵐플린과 빈 학파의 시조 알로이스 리글은 양식의 형식적 변화 법칙을 체계적으로 분석했다.
알로이스 리글은 순수 가시성 이론을 미술사에 적용하면서, 예술을 판단하는 종래의 규범적 기준을 모두 폐기했다. 그가 거부한 선입견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인간의 표현에 관계되는 ‘대예술’과 장식이나 디자인에 관계되는 ‘소예술’의 위계적 구별이고, 다른 하나는 그리스 미술이나 르네상스 미술을 절대적 기준으로 삼는 편향된 시각이었다.
리글은 초기 저작 《양식의 문제》(1893)에서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등 고대 동방에서부터 그리스, 로마, 비잔틴, 아라비아에 이르기까지 장식문양의 모티브를 수집하고 그 구성원리를 분석하여, 수천 년에 걸친 양식사의 내적 발전 연관을 구명하고자 했다. 이러한 문제의식이 본격적으로 표현된 것이 《후기 로마시대의 공예》(1901)이다. 이 책에서 그는 고전·고대·중세의 세 단계 양식 전개를 ‘촉각적’과 ‘시각적’이라는 기초 개념으로 설명했다. 당시 미술사학계에서는 이집트 미술을 고대미술의 전사(前史)로, 중세 미술을 고전미술의 쇠퇴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었다. 리글은 이에 맞서 후기 로마시대의 미술 역시 전대로부터의 내적 필연성에 근거한 일관된 양식 발전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이 내적 동인으로서 각 시대에 고유한 ‘예술의지(Kunstwollen)’가 있음을 상정했다. 리글에 따르면 미술의 역사에 진보나 완성, 쇠퇴란 없다. 그것은 끊어지지 않는 흐름이며, 일정한 규칙과 기준을 세워 그 달성도를 판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가 문제 삼은 것은 그 예술적 표현이 어떠한 의도로 이루어졌는가, 즉 작품에 내재된 의지였다.
하인리히 뵐플린은 리글과 교류하면서 리글의 ‘촉각적/시각적’ 대립을 ‘고전적/바로크적’ 대립으로 재구성했다. 그는 종래의 도상학적 미술사에서 벗어나 피들러의 순수 가시성 이론에 입각하여, 개별 예술가의 작품에 나타나는 보편적 양식의 전개를 추적하고자 했다. 이런 점에서 뵐플린의 미술사는 ‘인명 없는 미술사’로 불린다. 이는 스승 부르크하르트의 ‘과제에 의한 미술사’라는 견해를 계승한 것이기도 하다.
뵐플린은 양식의 이중근원을 설명하며, 시각형식 그 자체 속에도 양식 전개의 내재적 필연성이 있음을 주장했다. 각 시대에는 그 나름의 특유한 시각형식이 있고, 그 시대에 태어난 예술가들의 개성이 다를 수 있어도 결국 거시적으로는 동일한 시각형식의 발전 기반 위에 있다는 것이다. 이 ‘시각의 층’을 탐구하는 것이 미술사의 과제라고 본 뵐플린은 16세기와 17세기의 양식 차이를 다섯 가지 대립 범주로 정리했다.
이 ‘직관의 범주’에 기초한 뵐플린의 양식사는 미술사의 자율성을 주장한다는 점에서 획기적이었다. 뵐플린은 이 조소적에서 회화적으로의 전개 도식이 다른 시대에도 적용될 수 있다고 보았다. 실제로 현대미술 비평에서도 추상표현주의를 ‘회화적’으로 특징지어 유럽의 기하학적·구성적 추상과 대비시킴으로써 미국 회화의 정체성을 주장하려는 시도가 있었는데, 이는 뵐플린의 이론에 근거한 것이다. 그의 개념이 미술사 전체의 발전을 설명할 수 있는가는 여전히 문제로 남지만, 형식의 문제를 정밀하게 분석하여 양식사를 수립했다는 점은 높이 평가받아야 한다.
그러나 리글과 뵐플린이 확립한 형식주의적 양식사에 대해 다른 방향에서 접근하려는 흐름도 있었다. 막스 드보르작을 중심으로 한 정신사로서의 미술사가 그것이다. 드보르작은 미술을 시대정신과 세계관의 표현으로 보고 일반 정신사 속에서 파악하고자 했으며, 양식사와 정신사의 통합을 지향했다.
그러나 드보르작의 방법에는 구체적인 것이 무시되고 작품의 형식적 파악이 소홀해진다는 단점이 있었다. 한스 제들마이어는 드보르작의 형식주의적 선입견, 주지주의적 선입견, 전체주의적 역사관 등을 거론하며 ‘정신사로서의 예술사’를 예리하게 비판했다. 그러면서도 제들마이어는 자신들의 과제가 드보르작이 뿌린 씨앗을 키워나가는 것이라고 말했다. 양식사로서의 미술사와 정신사로서의 미술사, 두 유형의 불완전성을 보완하면서 제3의 길을 모색하고자 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