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들러의 순수 가시성 이론

순수 가시성(reine Sichtbarkeit) 이론은 콘라트 피들러가 제창한 예술 이론으로, 당시 지배적이던 헤겔관념론 미학에 정면으로 맞섰다.

피들러는 조형예술의 본질이 문학적 서사나 도덕적 메시지가 아니라, 눈으로 지각되는 형태 그 자체의 조직 방식에 있다고 주장했다. 가시적 표상의 구성만을 예술적 가치로 인정한 그의 이론은 조형예술의 자율적 법칙을 확립하려는 시도였다.

야코프 부르크하르트가 ‘무엇을 연구할 것인가’—즉 양식의 역사적 변천—를 보여주었다면, 피들러는 그러한 연구가 ‘왜 정당한가’를 철학적으로 논증했다. 이 철학적 전제—형식 자체가 내용이나 이념과 독립된 고유한 예술적 가치를 갖는다는 것—위에서 알로이스 리글하인리히 뵐플린양식사로서의 미술사를 체계적으로 수립할 수 있었다.

리글은 순수 가시성 이론을 미술사에 적용하면서, 예술을 판단하는 종래의 규범적 기준을 모두 폐기했다. 그가 거부한 선입견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인간의 표현에 관계되는 ‘대예술’과 장식이나 디자인에 관계되는 ‘소예술’의 위계적 구별이고, 다른 하나는 그리스 미술이나 르네상스 미술을 절대적 기준으로 삼는 편향된 시각이었다.

뵐플린 역시 종래의 도상학적 미술사에서 벗어나 피들러의 순수 가시성 이론에 입각하여, 개별 예술가의 작품에 나타나는 보편적 양식의 전개를 추적하고자 했다.

순수 가시성 이론은 이후 순수화를 지향하는 모던 아트를 논할 때도 여러 차례 인용되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