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언의 약속

더위를 피하고자 달리는 시간을 새벽으로 옮긴지 어느덧 3개월. 일주일에 서너 번은 주로에서 마주치는 러너들이 있다. 늘 파란 싱글렛을 입는 어르신, 반대편에서 빠른 속도로 달려오는 근육질의 아저씨, 더운 날씨에도 하얀 면장갑을 끼고 달리는 아주머니, 태양으로부터 얼굴과 몸을 꽁꽁 가린 신원 미상의 러너까지. 이제는 행여 그들이 보이지 않는 날이면 내심 서운할 정도로, 누구도 빠짐없이 내가 사랑해 마다치 않는 이른 아침 풍경의 일부로 자리 잡았다.

나도 드디어 그들의 아침 풍경 한 자리를 차지한 걸까. 일주일 전부터 파란 싱글렛의 어르신이 힘찬 목소리로 인사를 건네기 시작했다. 처음엔 반가우면서도 당황스러워 고개를 냅다 꾸벅 숙였다. 무뚝뚝해 보이던 어르신은, 의외로 키 호이 콴을 닮은 서글서글한 인상의 소유자였다. 오늘도 어르신은 땀과 웃음기 가득한 얼굴로 힘차게 화이팅을 외쳐 주었고, 이번엔 나도 소리 내어 인사했다(파이팅!).

무더웠던 8월이 지나고, 어느덧 새벽 공기에서 가을 냄새가 묻어 나오기 시작한다. 일출 시각이 점점 뒤로 밀리더니 이제는 나간 지 한참 지나서야 해가 산 너머로 떠오르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여름이 지나도, 어둠이 걷히지 않아도 뛰러 나가는 시간은 되도록 유지하려고 한다. 무언의 약속을 나눈 이들이 생겼기 때문이다.